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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임의탈퇴 이천수, 이대로 무너질 것인가?

기사입력 2008.12.26 09:59 / 기사수정 2008.12.26 09:59

유진 기자

[엑스포츠뉴스=유진 기자] 어느 종목을 막론하고 프로스포츠에서 그 재능에 비해 꽃을 피우지 못한 선수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 반대로 재주는 없되, 피나는 노력으로 주전의 자를 꿰찬 선수들도 있다. 두산 베어스의 김현수를 포함하여 LG트윈스의 박종호, 한화 이글스 장종훈 코치의 공통점은 모두 ‘신고선수’로써 프로에 입문하여 절정의 기량을 보여주었다는 데에 있다.

또한, 프로축구 수원 삼성의 이운재 선수도 젊은 시절 최인영이라는 노장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선수였다. 대기만성형의 이운재가 한국 프로축구 MVP까지 올랐다는 사실은 그가 들인 노력의 양이 절대 적지 않았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 있어서 현역시절 '팔방미인'으로 불렸던 박노준 해설위원이 선수생활을 일찍 접었다는 사실은 한국야구계의 큰 손실이었다. 1982년 세계 야구선수권대회 우승 주역이기도 했던 박노준은 투수, 타자를 가리지 않는, 희대의 야구천재였다. 그러나 프로야구단에서 자기 자리를 잡지 못하여 일찌감치 선수생활을 접어야 했다.

1974년 대학 야구선수권대회 MVP를 차지했던 허구연 해설위원도 안타까운 케이스다. 1976년 한일 올스타 경기에서 큰 부상을 당했던 허구연씨는 프로야구가 출범되기 불과 6년 전에 야구를 그만두어야 했다. 그 재능에 비해 운이 없었던 선수들이었다. 이 외에 손경수, 김건덕 등 재능있는 수많은 선수가 프로에서 꽃을 못 피우고 사라진 경우가 있었다.

또 하나의 안타까운 영건, 이천수

최근에는 김진우씨가 KIA에서 임의탈퇴 선수로 한동안 야구계를 떠나있어 많은 야구팬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훈련 무단이탈 등 구단의 속을 썩였던 야구유망주가 반성의 눈물을 쏟아내는 장면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쓴웃음을 지어내게 한다.

그런 점에 있어서 이천수 또한 안타까운 케이스다. 지금으로부터 8년 전인 2000년, 청소년 축구팀에 나타난 이천수라는 존재는 한국축구계의 구세주와 같은 존재였다. 고종수, 이동국의 뒤를 잇는 차세대 스타로 떠오른 그에 대한 찬사는 끊이지 않았고, 이에 부응이라도 하듯 그는 아시아의 날쌘돌이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 한국 프로축구계에서 이천수만한 날쌘돌이도 없었다

2000년 청소년 대표팀을 거쳐 시드니 올림픽 국가대표로써 활약했던 이천수는 겁없는 신예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21세에 불과하던 그에게 2002년 한일 월드컵 대표팀 발탁은 기회이기도 했다. '선수간 벽 허물기'를 주문했던 당시 히딩크 대표팀 감독의 의중을 가장 먼저 따르기라도 하듯 연습경기에서 홍명보, 황선홍과 같은 당대의 노장 선수들에게 "여기로 패스해!"라며 반말로 말했다는 일화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 그는 주로 조커로써 활약하며, 지친 노장들 사이에서 빠른 발을 자랑하는 선수이기도 했다. 이로 인하여 히딩크 감독은 그의 넘치는 패기와 빠른 발에 높은 점수를 줬다.

이에 탄력을 받은 이천수는 월드컵이 끝나자 세계 최고의 리그라 불리는 스페인 프리메가리가의 러브콜을 받는다. 빠른 측면 공격수를 찾고 있던 레알 소시에다드에 이천수라는 카드는 분명 매력적이었다.

데뷔전에서 도움을 기록하는 등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었던 이천수였지만, 그 한계는 일찍 찾아왔다. 그 이후로 좀처럼 기회를 잡지 못했던 것이다. 소속팀에서 이렇다 할 활약을 펼치지 못했던 이천수는 2004년 누만시아 임대 이후 2005년에 결국 국내로 유턴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죽지 않았다. 당시 소속팀 울산 현대를 우승으로 이끌었던 이천수는 2006년 독일 월드컵 대표팀에 다시 승선했다. 아직까지 화자가 되고 있는 그의 토고전 동점골은 전 세계에 이천수라는 이름 석자를 알리기에 충분했다.

프랑스, 스위스전에서도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인 이천수는 월드컵 이후 다시 해외진출을 모색하게 된다. 이번에는 네덜란드리그였다. 바로 송종국이 한때 몸담았던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이 그에게 손짓을 한 것이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네덜란드를 바탕으로 다시금 빅리그에 진출하는 일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내성적인 성격이 또 문제가 되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남에게 속을 잘 드러내지 않는 그의 모습이 스스로 발목을 잡은 것이다. 향수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것도 이때쯤이었다. 구단의 허락 없이 귀국했다는 이야기가 나올 때쯤 그는 다시 임대라는 형식으로 K리그에 복귀했다. 이번에는 수원 삼성이었다.

연예부 기사에도 자주 이름이 거론되었던 이천수

이천수는 차범근 삼성 감독을 아버지라고 부를 정도다. 따라서 모든 축구인들은 그가 수원을 바탕으로 재기하여 다시 네덜란드로 돌아갈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부상에 이어 코칭스태프와의 불화, 훈련 무단불참 등 그를 둘러싼 소식들은 희망찬 것이 아닌 절망과 좌절, 그리고 실망에 가득 찬 것일 뿐이었다.

여기에 연예부 기사에도 심심찮게 그의 이름이 거론되기도 했다. 바로 열애설 때문이었다. 유명연예인 심씨를 포함하여 미스코리아 출신 김씨 등이 그러했는데, 개인적인 문제를 떠나 이 모든 사실이 적어도 그의 선수 생활에는 플러스가 되지 않았다. 또한, 최근 금전문제로 피소되었다는 소식까지 들려오자 그의 사생활이 집중되기도 했다. 큰 악재였다.



▲ 이천수는 지금이 선수생활 최대의 위기다.

그의 이러한 행보에 대한 1차적인 책임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이천수 본인에게 있다. 본인에게서부터 발생한 문제이며, 본인이 모두 자초한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해외로 진출한 선수들이 대부분 소속팀에 적응하고자 애쓴 것에 비해 그는 스스로 인정한 것처럼 내성적인 성격을 쉽게 버리지 못했다. 축구 천재라고는 불렸지만, 결코 최고가 될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가 아버지처럼 믿고 따르는 차범근 감독도 레버쿠젠 시절에 숱한 어려움을 이겨내고 분데스리가 외국인 최다득점 기록을 달성했다. 그리고 외국인에 배타적인 독일도 '차붐' 이야기만 나오면 모두 손뼉치며 친심어린 경의를 표한다. 1류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이천수 스스로 바랐던 점도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이천수, 이름처럼 ‘二千 修(이천수)’를 해서라도 일어서길

이천수. 어쩌면 그는 천재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축구를 사랑하는 평범한 소년에게 '천재다, 빠르다, 잘한다'는 달콤한 사탕을 주었기에 '허영'이라는 단어가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을 수도 있다.

따라서 작금의 '이천수 임의탈퇴'에 대해 주변의 책임도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라고 본다. 적어도 축구를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그를 끝까지 믿고 지켜봐야 할 일종의 채무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싶다.

2002년 월드컵 당시 붉은악마 사이에서는 '축구선수들 중 가장 수능시험을 많이 본 선수가 누구일까'라는 넌센스 퀴즈가 출제된 바 있다. 그 정답에 해당되는 선수가 바로 이천수였다. 재수, 3수를 넘어 2천 번이나 시험을 봤기 때문이라는, 유머 아닌 유머가 널리 퍼지기도 했다. 그러나 작금의 이천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점이라 본다.

이천수. 그의 이름에서 비롯된 말처럼 스스로 이천 수(二千 修)를 해서라도 재기하기를 기원한다. 제2의 김진우(KIA)가 되느냐 아니냐는 본인이 노력하기에 달렸다. 그리고 그가 쓰러진다면 이는 스스로 문제를 떠나 한국축구계의 큰 손실이기도 하다.

[사진=이천수 (C) 수원삼성 공식 홈페이지]



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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