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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엽의 격투사담] 하리의 비상식적 행동, 본야스키에 대한 미량의 아쉬움

기사입력 2008.12.09 11:33 / 기사수정 2008.12.09 11:33

남기엽 기자




- 바다 하리와 레미 본야스키, 그들에게 느끼는 단상의 작은 조각들

1 . 격투기 

텅 빈 공간…사각 링 그리고 몰려드는 관중…레이저와 라이트 불빛 속에 설치되는 카메라. 사회자의 절규에 가까운 호명.

그런 무대에서 장렬한 음악과 함께 등장. 파이터는 그렇게 등장한다.

축구는 90분, 야구는 기본 3시간 이상이라지만 격투기 무대에서 선수가 선수로서 뛸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10분 남짓. 그마저도 안될 땐 수십 초 만에 무대를 떠나야 하기도 한다. 누구는 경기 뒤 쓸쓸하게 무대를 떠나고 누구는 당당하게 다시 무대에 입성한다. 이긴 자는 그렇게 계속해서 살아남고 진 자는 그렇게 패퇴한다.

그렇게 선수를 둘씩 불러와 한 명을 비참하게 내보내는 링이라는 공간은 마치 '빈 들판' 같다. 인간이 한 투쟁 본연의 자태가 의식 속에 얼비친다.

누구에게나 영혼의 들판은 있다. 파이터들에게 영혼의 들판은 사각 링이다. 그리고 그 영혼의 들판에서 선수들은 승부에 관계없이 자신을 부수며 혼을 불사르고 자아를 확인한다. 팬들은 열광하고 같이 함께 호흡한다.

그고 지난 6일 열린 K-1 그랑프리 결선에 올라온 8명의 선수는 수많은 각 링에서 상대 선수를 한 움큼씩 밟고 올라온 이들이다.

이들은 연초부터 지역예선에서 피나는 격전을 벌였고 그것도 모자라 개막전에서 시 한 번 시험받았으며 여기서 또 몇 번의 시험을 거쳐 최종 무대에는 '악동'바다 하리와 '젠틀맨' 레미 본야스키만이 남게 되었다.

K-1 결선 2008 무대는 그렇게 스피드 있는 테크니션 중 한 명의 우승으로 마무리되는 듯했다.

 2 . 바다 하리가 보여준 비상식(非常識)적 행동

그러나 경기는 모든 이의 예상과 배치됐다. 하리는 자신의 분을 삭이지 못하고 레미 본야스키에게 경기 주도권을 내준 채 끌려다녔으며 결국 무리하게 안으로 들어가다 포인트를 잃고 다운을 당했다.

경기가 안 풀리자 본야스키를 넘어뜨리고 펀치를 두 번 넣었다. 그것도 모자라 스탬핑 킥까지 선보였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카쿠다 노부야키의 레슬링 실력을 볼 필요가 없었다. 그의 아찔한 영어 실력은 더더욱 볼 필요가 없었다. 어느 한 명이 1분 넘게 쓰러져있는데도 경기 종료 공이 울리지 않는 광경은 아예 보지 말아야 했다.

하리는 명백히 실수했다. 아니, 실수라고 덮어두기엔 어이가 없었다.

2년 전 루슬란 카라예프에게 싸커킥을 당해 그렇게 뛰고 싶었다던 K-1 결선에조차 진출하지 못해 분을 삭이지 못하던 게 누군가.

그 장본인이 꿈에 그리던 결선의, 그것도 결승전이라는 최고의 무대에서 저런 모습을 보이다니 순간 믿고 싶지 않았다. 16년 역사를 자랑하는 K-1 결승전 무대가 이런 식으로 끝나 버리는 게 너무 허무했다. 부정하고 싶었다.

아무리 K-1이 매치 메이킹을 불균형하게 하고, 편파 판정을 하며 세간의눈총을 산 적이 있다 하더라도 결선 무대만큼은 분명 수준 이상의 상징성이있는 무대다. 그 챔피언 벨트 하나를 못 차 제롬 르 밴너는 10년 넘게 뛰며 아직도 우승을 바라보고 있으며 마이크 베르나르도, 미르코 크로캅 같은 이들은 결국 꿈을 버리고 은퇴하거나 다른 단체로 전향해야 했다.

K-1 결승전은 이곳을 거쳐간 수많은 파이터와 이곳을 바라보는 팬들, 그리고 이곳에서 뛰고 싶어하는 연습생의 꿈과 땀, 열정이 질펀하게 얽힌, 그런 공간이다. 뛰고 싶다고 해서 뛸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며 강하다고 해서 뛸 수 있는 곳도 아니다.

역사상 최강자라 불리는 세미 슐츠는 단지 인기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티켓도 못 받고 집에서 K-1을 관전해야 했다.

3 . 본야스키의 억울함

본야스키는 하리의 반칙으로 다소 김빠지게 벨트를 감을 수밖에 없었다. 하리의 반칙을 괘씸하게 여긴 카쿠다 노부야키 심판은 그에게 실격 판정을 내렸고 챔피언은 자동으로 본야스키의 차지가 됐다.

이를 두고 일본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말들이 많다. 

요약하면 '하리의 반칙이 경기를 못 할 정도로 심한 것이냐'는 것. 심지어 본야스키 개인에 대한 비난도 보인다. 하지만, 타니가와 프로듀서의 말대로 문제의 쟁점은 '하리가 악의적 반칙을 했냐 안 했냐'의 여부지 본야스키가 경기를 '재개할 수 있었으냐 없었으냐'가 아니다.

결론적으로 본야스키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엄밀히 말해 그는 피해자다.  정정당당하게 경기를 했고 게임 흐름까지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으며 충분히 4년 만에 챔피언 벨트를 두를 자격이 있었다. 



단,  본야스키가 만약 그런 상황에서도 경기를 했었다면 그것이 (경기를 보고 싶어했던 팬들 입장에서는) 더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4 . 실력과 매너, 그러나 지극한 미량(微量)의 아쉬움.

시계추를 조금만 더 돌려보자. 장소는 네덜란드. 이곳은 연방 사람들로 북적댄다. K-1의 또 다른 전설 '미스터 퍼펙트' 어네스트 후스트의 자국 경기 은퇴전이 열릴 예정이란다. 상대는 그에게 치욕적인 2번의 패배를 안겨 준 '야수' 밥 샵. 후스트는 또 다시 지지 않기 위해 매일같이 피땀 흘려 트레이닝했다.

그런데 유례없는 사건이 터졌다. 대회 개장 전만 해도 있던 밥 샵이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경기 시각은 다가오는데 상대는 없다. 아무도 없다. 그렇다고 아무런 명성 없는 무명의 연습생을 데려다 붙이면 야유가 휘몰아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화살은 엉뚱하게도 당시 해설을 위해 자리에 와 있던 아츠에게로 돌아갔다. K-1 측이 아츠에게 대신 싸워줄 수 없겠냐고 물어본 것. 아츠는 흔쾌히 수락하고 슐츠의 트렁크를 빌려 입고 경기에 나선다. 그는 필생의 라이벌에게 1승이라는 전적을 안겨주는 대신 자신에게는 1패라는 전적을 고스란히 남겼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나는 파이터다. 파이터는 언제 어디서든 싸운다. 나는 그런 인간이다'

그리고 여기서, 다른 파이터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파이터다. 파이터는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결코 싸우지 않는다.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이 파이터가 팬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여기서 필자는 아츠와 본야스키의 차이를 본다. 

물론 단정할 수 없지만, 아츠 혹은 앤디 훅이라면 'K-1 결선 무대의 결승전'이라는 무대의 상징성과 중요성을 감안한다면, 어땠을까라는 단상을 K-1을 사랑하는 팬이라면 충분히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필자는 미량의 아쉬움을 느낀다. 실력과 젠틀함을 겸비한 본야스키에게 실력, 매너 그 외에 사람을 끓게 하는 혼을 불러 일으키는 단면을 볼 수 있다면 그를 더욱 좋아할 수 있을 것 같다.

누구에게나 영혼의 들판은 있다. 파이터에게 영혼의 들판은 사각링이다. 그리고 파이터들은 때론 사각 링에서 자신을 부수고 자아를 확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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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포츠뉴스 브랜드테마] '남기엽의 격투사담' / '순수, 열정, 자유로운 저널리즘' 랜디저널 남기엽 편집장이 풀어놓는 격투기 이야기



남기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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