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츠뉴스 이아영 기자] "안도하는 순간, 성장은 거기까지다. 편해지는 순간, 확장은 멈춘다. 그래서 계속 불편해지려고 한다."
배우 박은석은 MBC 드라마 '역적:백성을 훔친 도적'에서 홍길동(윤균상 분)과 대물림된 악연으로 악독해지는 조참봉 박씨의 아들 수학 역을 맡아 열연했다. 평범한 유생이었지만 권력 싸움에 휘말리며 점차 치기 어린 모습으로 변해갔고, 결국 노비로 몰락하는 입체적인 캐릭터를 인상적으로 그려냈다.
박은석에게 '역적'을 준비할 시간이 길지 않았다. 박은석은 "준비할 시간도 없었을뿐더러,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 끝나자마자 투입됐다"며 "그래도 배우니까 역할을 맡았으면 해야된다. 서이숙 선배님이 사극이라고 해서 크게 다른 게 없다고 조언해주셨다. 감독님도 감정이 더 중요한 거지, 말 때문에 걱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해서 위로가 됐다"고 말했다.
그에게 첫 사극이 더 걱정이었던 이유는 성장 환경 때문이다. 그는 미국에서 학창시절을 보내 한문이나 사자성어, 사극 말투 등이 다 낯설었다고. 박은석은 "사극 장르가 저에게 너무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할 생각이 없었는데, 기회가 찾아왔다. 당연히 걱정했지만 닥치는 대로 하자고 생각했다. 끝내고 나니 또 하나의 장벽을 넘어선 느낌이라 좋았다. 제 연기 스펙트럼, 범위가 넓어졌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그런 게 있으면 가리지 않을 생각이다"고 '역적'이라는 작품이 가지는 의미를 설명했다.
짧게 준비했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완벽하게 수학의 인생을 그려냈다. 변화가 많고 다양한 캐릭터를 표현해야 했기 때문에 어려운 역할이었는데, 박은석의 연기 때문에 서사가 더욱 풍부해졌다. 박은석은 "저는 폭넓은 캐릭터가 더 좋다. 일방적인 것보다 반전이 있고, 상대적인 면이 있는 게 연기자로서 표현할 수 있는 게 다양해져서 재밌다. 그게 인생과 비슷하기도 하다"고 말했다.
특히, 노예가 된 수학이 어머니의 원수를 갚겠다고 위협하는 장면은 충격적인 퇴장이었다. 아모개(김상중)가 수학의 아버지를 죽였던 걸 떠올리게 하면서 완전히 역전된 홍길동과 수학의 인생을 단 한 커트로 표현해냈기 때문. 박은석은 "제가 쌓아온 캐릭터가 몰락하는 순간이었다. 감정적으로 폭발하고, 절망하는 게 재밌기도 했다. 캐릭터의 마지막 단추라고 생각해 더 몰입했다. 만일 수학이 전쟁에서 그냥 죽었다며 잊혀졌을텐데, 살아남아서 노비까지 됐고 그게 상징하는 바가 있어서 더 의미 있는 마무리였다"고 회상했다.
또 "어머니(서이숙) 생각을 많이 했다. 어머니를 갖다버리라고 한 주인에게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특히 아버지가 노비(아모개)에게 그렇게 당했으니까 연기하면서도 굉장히 묘했다. 또 그런 상황이라면 충분히 그 행동에 스스로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을 거 같다고 이해하게 됐다"고 말했다.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에 이어 연이어 악역을 맡은 박은석은 "악역은 외롭다"고 말했다. 그는 "욕먹는 건 괜찮다. 박은석이 욕먹는 게 아니라 캐릭터가 비난의 대상이 되는 거니까. 근데 '월계수'에서도 가족들은 화기애애한데 저는 인상 찌푸리고 있고, '역적'에서도 마지막에 궁 문을 열어주는데 거기 무리는 사람이 많은데 여기는 적고. 그런 게 외롭게 느껴지더라"고 덧붙였다.
'역적'의 의미는 시대마다, 또 개인마다 다르게 해석되겠지만 박은석은 "여전히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대표적으로 재벌이나 대기업 등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업신여기는 '갑질'을 꼽았다. 그는 "지금도 있다. 없는 척하는 것 뿐이다"라며 "저도 미국에서 소수자로서, 동양인으로서 살았기 때문에 많이 겪었다"고 말했다. 또 "홍길동이라는 캐릭터가 계속 사랑받고, 드라마나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우리 사회에 영웅이 필요하고, 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라며 '역적'이 사회상을 반영한 좋은 작품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미국에서 혈혈단신으로 한국에 와 부모님의 도움 없이 스스로 이 자리까지 온 박은석은 "나를 배우라고 소개할 수 있어 뿌듯하다"고 말했다. 그는 "예전엔 작품을 짧게 하고 쉬고, 공백이 길어서 배우라고 말하기가 힘들었다. 지금까지 많은 에너지와 시간, 노력을 들였고 좌절도 많이 했다. 그래서 나름의 프라이드도 있다"고 자부심을 드러냈다.
"제 좌우명이 있다면, '오늘을 살자'다. 안도하는 순간 성장은 거기까지다. 편해지는 순간 확장은 멈춘다. 그래서 계속 불편해지려고 사서 고생하는 스타일인 거 같다. 어떤 역할이 있으면, '이건 박은석이 해야 해' 라는 얘기를 들을 수 있는 배우, 생각나는 배우가 되고 싶다.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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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영 기자 lyy@xports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