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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성이 없어도 축구는 즐겁다

기사입력 2008.05.22 18:09 / 기사수정 2008.05.22 18:09

박형진 기자

[엑스포츠뉴스=박형진 기자]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끝났습니다.

많은 한국팬이 바라는 대로 결과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의 승리였죠. 그러나 모두가 기대했던 박지성은 출전하지 않았습니다. 새벽잠을 설치며 새벽 3시 티비 앞에 앉은 많은 한국인이 박지성의 결장에 실망한 것이 사실입니다.

"퍼거슨 감독의 원양어선급 낚시였다"며 퍼거슨 감독의 연이은 박지성 칭찬이 연막에 불과했다는 비난도 있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는 약과입니다. 박지성 때문에 맨유를 응원했던 많은 한국팬이 "퍼거슨 감독에게 인간적인 배신감을 느낀다"며 "이제부터 첼시팬이 되겠다"고 선언하고 나섰습니다. 박지성과 관련한 언론보도나, 그 기사에 달린 네티즌의 댓글이나 모두 박지성의 결장과 그로 인한 실망감이 주된 내용입니다.

기자이기 전 한 개인으로서 박지성의 결장은 참 안타까운 대목이었습니다. 박지성만의 축구, 탁월한 발놀림은 아니지만 한 발 더 뛰고 한 번 더 움직이는 모습. 스스로 '아시아인에 대한 편견을 극복했다'고 자부할 만큼 박지성은 자신만의 색채로 유럽축구를 평정했습니다. 그가 이번 시즌 정말 중요한 경기에서 보여준 활약은 박지성의 가치를 충분히 입증해주었으니깐요.

기자로서도 박지성의 결장은 참 안타까웠습니다. 퍼거슨 감독이 믿었던 루니의 활약이 극히 부진했기 때문입니다. 전방에서 활발한 활동력으로 수비를 교란시켜주는 역할을 해야 할 루니가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하자 테베즈, 호날두 역시 빛을 발하지 못했습니다. 나니와 루니가 교체되는 상황에서 사실 나니보다는 박지성이 팀에 필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선수였을 것입니다. 퍼거슨 감독은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한 방'을 노리기 위해 나니를 준비시켰지만, 오늘 경기에서 더 필요했던 것은 나니의 한 방보다 박지성의 활동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하고싶은 말은 '박지성이 안 나와서 아쉽다'는 말이 아닙니다. 제가 하고싶은 말은, 이번 기회를 계기로 우리가 축구를 즐기는 방법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축구는 11명이 하는 '팀' 경기

축구선수들 사이에는 분명히 '수준차'가 있습니다. 같은 팀 안에서도 좀 더 잘하는 선수와 떨어지는 선수가 있는 법이죠. 그러나 축구의 매력은 잘하는 선수를 위주로 경기를 하는 팀이 꼭 이기리라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하는 선수라도 11명을 모두 뚫고 골을 넣을 수는 없고, 혼자서 11명의 공격을 다 막아낼 수는 없습니다. '팀'이 하나가 되어 움직이지 않으면 이길 수 없는 경기, 그것이 바로 축구입니다.

박지성은 한국인에게 매우 특별한 존재입니다. 그의 인생 자체가 드라마라고 할까요. 평발에 왜소한 체격, 축구선수로는 너무나 불리한 조건을 타고난데다 좋은 축구선수로 성장하기 위한 환경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한국땅에서 태어난 박지성. 그가 온갖 시련을 이겨내고 유럽 최고의 클럽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뛴다는 것 그 자체가 드라마입니다. 박지성은 한국인에게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민족의 아이콘인 셈이죠.

그러나 그런 박지성 역시 팀의 일원입니다. 그리고 박지성은 그 누구보다 팀을 위해 헌신하는 선수입니다. 박지성이 팀이 아닌 개인의 명예와 이익을 위해 축구를 했다면, 맨유의 13번 박지성은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것입니다. 한국인에게는 박지성 개인의 성공을 축하하고, 그것에 자긍심을 느낄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축구를 보면서 팀이 아닌 개인을 지켜보고, 그 개인을 중심으로 팀을 생각한다면 아주 왜곡된 분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현재의 상황이 그렇습니다.

퍼거슨 감독으로서는 후보 명단을 짜면서 두 가지 상황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지고 있을 때와 이기고 있을 때. 퍼거슨 감독은 이기고 있을 때를 대비하여 오셔와 실베스트르와 같은 수비수를 준비시켰고, 지고 있을 때를 대비하여 나니와 긱스를 준비시켰습니다. 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개인의 능력으로 경기를 뒤집을 수 있는 성향의 선수가 필요하고, 그런 선수에 박지성보다는 나니와 긱스가 좀 더 부합했을 뿐입니다.

박지성이 최근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었고, 박지성이 나온 경기마다 맨유가 좋은 성적을 거두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맨유는 명실상부한 유럽 최고의 클럽이며, 박지성만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고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게 아닙니다. 모든 선수가 다 좋은 활약을 보이는 상황에서 감독의 임무는 그날 경기에 적합한 선수를 준비시키는 일입니다. 적어도 박지성 대신 하그리브스를 오른쪽 미드필더로 출전시킨 퍼거슨 감독의 결정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그리브스는 정말 최고의 활약을 보여주었으니깐요.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박지성처럼

또 하나 바로잡아야 할 논란거리가 있습니다. 과연 박지성이 맨유에 계속 머물러야 하는지, 박지성이 맨유에서 뛸 수준의 선수인지에 대한 논쟁입니다. 소위 '이적 논쟁'이랄까요.

최근 박지성이 상승세를 타자 영국언론이 그에 대한 기사를 내보내기 시작했고, 국내언론은 챔피언스리그 결승을 앞두고 영국언론의 칭찬을 받아쓰기하느라 바빴습니다. 이러한 보도에 한국팬들이 크게 고무되었던 것도 사실이고요. 그러나 막상 박지성이 결장하자 팬들의 실망감은 다시 '이적 논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차라리 박지성의 기량을 인정해주는 팀으로 옮겨 주전으로 뛰는 게 낫다는 주장이 고개를 든 것이지요.

그런 분들께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속해있는 직장에서, 학교에서 항상 '최고'입니까? 당신은 언제나 모든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으며, 자신의 능력과 가치를 인정받으며 살고 계십니까?

우리는 솔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박지성이 맨유의 붙박이 주전이 아니라는 점을 말입니다. 한 시즌에 40골씩 터뜨리는 호날두, 어린 나이에 유럽무대를 평정한 루니와 박지성의 실력을 동등하게 평가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말입니다. 그렇다고 박지성이 아무것도 아닌 선수일까요? 정말 그는 맨유의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 위에서 들러리만 서고 있는 것일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박지성이 '최고'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박지성보다 더 훌륭한 선수들이 축구계에는 아직 많으니깐요. 저는 박지성이 포지션 경쟁자인 호날두, 나니, 긱스보다 낫다고 단언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박지성이 '최고'가 아니기 때문에 맨유를 떠나야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비록 '최고'는 아니지만 자신이 속한 직장에서 묵묵히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죠.

세상에는 극소수의, '최고'의 능력과 기량을 만인에게 인정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이들을 우리는 '스타'라고 부르지요. 그러나 세상을 이끌어가는 힘은 몇몇 스타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스타의 후광 뒤에서 묵묵히 자신의 할 일을 하는 보통사람에게서 나옵니다.

축구도 마찬가지입니다. 11명이 모두 호날두처럼 골을 넣고 드리블을 하기 위해 골문으로 달려간다면, 과연 그 팀이 이길 수 있을까요? (갑자기 반 데 사르가 골문 앞에서 라보나킥을 구사하는 장면을 상상해봅니다.) 호날두가 골을 넣기 위해서는 묵묵히 자기 포지션에서 제 역할을 하는 10명의 선수가 필요합니다. 박지성은 묵묵히 자기 포지션에서 역할을 잘 소화하는, 보통 선수입니다. 그러나 그 '보통 선수'가 정말 필요하기에 맨유와 같은 팀에서 많은 연봉을 주고 그를 보유하고 있으며, 그를 선발로 출전시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박지성은 '보통 사람'들의 '스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현재 자기 분야에서 최고의 위치에 서 있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옆 동네, 야구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처음 팀에 들어올 때 입지 그대로 평생을 가야한다면, 장종훈이라는 걸출한 야구선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시작할 때의 상황과 끝이 변함이 없다면, 유재석이란 '국민 MC'는 지금도 무명의 듣지도 보지도 못한 연예인에 불과했겠죠.

모두가 현재 자신이 최고가 아님에도 열심히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최고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붙박이 주전이 아닌 박지성. 그러나 그 역시 노력하고 기량을 갈고 닦는다면 맨유의 주전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처음부터 주전인 선수도, 영원히 주전인 선수도 없습니다. 만약 처음과 끝이 그대로였다면, 박지성은 이름도 없이 잊힐 J리그 선수 중 한 명이었을 것입니다.

여유를 가지고 축구를 즐기자

저 역시 프리미어리그 경기를 앞두고 선발명단이 언제 나오나, 박지성이 선발로 나올까 기다리며 한 시즌을 보낸 축구팬 중 한 명입니다. 박지성이 골을 넣고 좋은 모습을 보이면 그 누구보다 기뻐하는 사람 중 한 명입니다.

많은 한국팬은 박지성을 보기 위해 새벽잠을 설칩니다. 그렇기에 박지성이 경기에 나오지 않으면 무척 실망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박지성이 못 하면 경기에서 이겨도 기쁘지 않고, 박지성의 평점이 낮을까 영국 스포츠언론사 홈페이지를 방문해 높은 팬 평점을 매기고 오고, 그러고도 가끔 평점이 낮으면 분개하기도 합니다.

선수를 지켜보는 것 역시 축구를 즐기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혹시, 당신은 박지성만을 보고 있기에 박지성이 뛰고 있는 너무나 흥미진진한 축구의 묘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박지성이 뛰고 있는 팀을 생각하지 못하기에 박지성의 진정한 가치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박지성은 정말 뛰어난 선수이고, 또한 강인한 체력을 가진 선수입니다. 그런 점을 인정받아 J리그에서 네덜란드 에레디비제로, 에레디비제에서 프리미어리그로 터전을 옮기며 발전해온 선수가 바로 박지성입니다. 비록 맨유의 붙박이 주전은 아니지만, 현재 박지성이 좀 더 훌륭한 선수로 커가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요? 박지성의 성공과 발전의 '과정'을 좀 더 즐겁게 지켜볼 수는 없을까요?

박지성의 매력에 푹 빠져 프리미어리그와 챔피언스리그를 보시는 분들께, 새벽잠을 설치며 박지성의 출전을 기다리는 분들께 박지성이 뛰지 않는 맨유의 경기를 한 번 여유로운 마음으로 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아마 더 큰 축구의 매력, 그리고 진정한 박지성의 매력을 발견하게 되실 것입니다.



박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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