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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데스리가] '그리운' 도르트문트 선수들, 지금은 어디에?

기사입력 2008.03.05 19:57 / 기사수정 2008.03.05 19:57

박중현 기자



[엑스포츠뉴스=박중현]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당당히 명문 클럽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예로부터 도르트문트는 그 명성에 걸맞게 많은 유명 선수들이 그 실력을 떨치던 클럽이다.

오늘 '분데스리가 리포트'에서는 도르트문트의 이끌었던 '거성'들을 재조명하면서, 최근 근황을 전하는 시간을 가져보기로 했다. 


 

Matthias Sammer
1993-1998 115경기 21골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서 두 번의 분데스리가 마이스터, UEFA 챔피언스리그, 인터콘티넨탈 컵을 차지했던 마티아스 잠머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레전드라고 불릴만한 인물이다.

그는 동독 출신 선수 중 가장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선수다. 디나모 드레스덴에서 시작한 그의 인생은 90년 여름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지면서 서쪽의 클럽인 슈트트가르트로 이적하였으며 그는 슈트트가르트에게도 마이스터샬레를 안겨주기도 하였다.

인테르가 마티아스 잠머를 영입하였지만, 그는 이태리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 채 6개월 만에 다시 독일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로 돌아오게 된다. 그 당시 이적료 4백만 파운드로 독일 레코드를 기록한 마티아스 잠머는 결국 95년 팀을 분데스리가 첫 우승으로 이끌었고 다음해에 역시 우승을 지켜냈으며, 96년 유로 대회 우승으로 96년에 호나우두를 한 표 차로 누르며 발롱도흐를 수상한 이후, 97년에는 챔피언스리그를 우승하며, 그의 전성시대임을 전 세계에 알렸다.

그는 선수 말미에 잦은 부상을 겪었고, 네 차례 이상의 무릎 부상과 수술 끝에 결국 32세의 나이에 은퇴하였고, 도르트문트에서 받은 코치 연수 끝에 어시스턴트 코치를 거쳐서 2000년 7월 팀의 감독이 되었다. 그는 팀의 적극적인 투자와 함께 00/01시즌 3위를 기록하였고 그 다음 시즌에는 선수생활 번쩍 들어올렸던 마이스터샬레를 감독이 되어 다시 한번 번쩍 들어올릴 수 있게 되었다. 2002년 그가 우승을 했을 때 그는 그동안 독일의 챔피언이 된 감독 중 가장 어린 나이의 감독이었다.

하지만, 그는 잦은 부상과 전술적인 경직성으로 인해서 도르트문트가 추락하는 것을 막지 못했고 결국 2004년 5월 30일 도르트문트 감독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그는 이후에 슈트트가르트의 감독으로 선임되었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한 채 1년 만에 감독직에서 역시 내려오게 되었다.

현재 그는 DFB의 스포르팅 디렉터로 있으며, 그는 열정을 가지고 이 일을 수행하고 있다.

보 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최고의 스트라이커 중 하나인 스테판 샤퓌자는 스위스의 레전드이자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레전드이다. 그는 대한민국의 레전드인 차범근이 가지고 있던 분데스리가 외국인 최고 득점자 기록을 갈아치운 인물이며, 그의 기록은 비록 에우베르에 의해서 깨지고 말았지만, 그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레전드란 사실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는 91년 우에르딩엔에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로 이적한 이후에 첫 분데스리가 커리어를 시작하였으며, 8시즌 동안 106골을 넣는 탁월한 득점력을 보였다. 앞서 언급된 마티아스 잠머와 함께 두번의 마이스터샬레와 한 번의 챔피언스리그, 그리고 한 번의 인터콘티넨탈 컵을 들어올렸으며, 그는 그 92, 93, 94, 그리고 2001년 스위스 올해의 선수에 뽑히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2003년 11월 UEFA 50주년 행사에서 스위스 축구 협회가 선정한 50년간의 스위스 최고의 선수에도 뽑히기도 하였다.

그는 99년 도르트문트에서의 선수 생활을 마치고, 고국인 스위스의 그라스호퍼 취리히로 이적하였고, 그라스호퍼에서의 2년간을 보낸 후 2002년 영 보이스 베른으로 이적하였고 3년간을 보낸 후 그의 고향 클럽인 로잔으로 이적한 후 2006년 은퇴하였다. 그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시절 가장 사랑받는 선수 중 하나였다. 또한, 그는 EURO 2004 스위스 대표팀으로 발탁 된것은 많은 팬을 놀랍게 한 사건이었다. 물론, 그가 출장한 경기에서 큰 임팩트를 보여주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현재, 그는 FIFA의 SOS Children's Villages의 대사로서 일하고 있다.

마 티아스 잠머와 함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위대한 수비수라 불리는 위르겐 콜러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독일의 왕좌에 오른 이후 유벤투스에서 영입한 선수이다. 그는 발도프 만하임에서 축구 생활을 시작하였고, 쾰른과 바이에른 뮌헨을 거쳐서 이탈리아의 유벤투스 투린으로 이적하였다. 유벤투스에서 네 시즌을 뛴 이후 독일로 돌아와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서 두 번의 마이스터 샬레와 한 번의 이어를 들어올렸다.

그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빅이어를 들어올릴 당시 4강전에서 만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전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펼쳤다. 그는 축구 선수 중 가장 귀찮은 수비수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으며 강력한 대인방어, 영리하면서도 거친 수비수로 정평 받은 수비수였다. 그는 체력 관리를 아주 철저히 하는 선수였으며, 철의 스토퍼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콜레르는 세계 무대와 세리에 아 무대에서 반 바스텐, 스쿠라비, 리네커, 루드 굴리트 등과의 맞승부를 펼치며 세계무대에서도 그의 진가를 발휘했으며 그의 가장 큰 라이벌은 반 바스텐이었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의 그의 활약은 세계 최고의 수비수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정도였다. 

그는 UEFA 컵 결승전 무대를 그의 은퇴 경기로 할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지만 레드 카드를 받으며 퇴장을 부여받고, 그 경기에서 도르트문트가 상대팀인 페예노르트에게 패하면서 아쉬운 은퇴를 가지게 되었지만 UEFA컵 결승전이 있기 전 베스트팔렌슈타디온에서의 은퇴식과 그 경기에서의 승리로 인해서 마이스터샬레를 들어올린 것은 그의 커리어에 있어서 가장 감동적인 날 중 하나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는 여전히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서포터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선수이며, 영원히 기억될 선수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는 커리어를 도르트문트에서 마친 후, 독일 21세 이하 청소년 대표팀의 감독으로 일을 하였으며, 2003년 3월에는 바이엘 레버쿠젠의 스포르트 디렉터로 선임 되었다. 또한, 그는 2005년 12월 17일 MSV 뒤스부르크의 감독직을 수행하였지만, 그가 선수 시절 수많은 스트라이커의 골을 저지한 것과는 달리 뒤스부르크의 강등을 막지는 못하였다.

현재, 그는 울리 스틸리케 아래에서 코트 디 부아르의 코치로서 일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의해서 덜 언급되는 기운 넘치는 수비수 마르틴 크리는 도르트문트의 90년대 중반 성공시대에 있어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이다. 그는 도르트문트 시절 두개의 리그 타이틀과 챔피언스 리그 타이틀을 획득했으며, 도르트문트가 유럽 챔피언에 오를 당시 키 플레이어 중 하나였다. 그는 분데스리가에서만 플레이 하였으며 보쿰, 레버쿠젠, 도르트문트 시절 동안 총 401경기를 뛰었던 선수이다.

그는 그의 선수로서의 커리어를 끝 마친 후, IT 분야로 뛰어들었으며 IT-코칭센터를 열었고 가끔 BVB 트래디셔널팀에 슈바르츠겔벤 져지를 입고 뛰곤 한다.


그는 도르트문트에서 우승컵과 인연이 조금 먼 선수였다. 그는 바이에른에서는 몇 개의 우승컵을 들어올리긴 했지만 도르트문트에서는 아무런 우승컵을 들어올리지 못했다. 그는 부상으로 인해서 총 102경기의 출장 기회가 있었지만 고작 59경기만을 소화했을 뿐이며, 그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챔피언스리그를 거머쥔 이후 와서, 독일 챔피언이 되기 전에 레인저스로 떠나게 되었다.

그는 레인저스에서도 부상 등으로 인해서 큰 출장 기회를 잡지 못하였으며, 2004년 카이저슬라우테른으로 돌아왔지만 역시 부상으로 인해서 단 9경기를 뛰었음에 불과했다.

그는 결국 잦은 부상으로 인해서 2006년 조용히 은퇴하였다.



BVB 의 팬들은 그의 험한 인생을 모두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선수 시절 심각한 뇌종양에 시달렸지만, 결국 그것을 이겨 냈다. 물론 그의 선수 생활은 그가 뇌종양에서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트레이닝에서 BVB의 동료였던 선데이 올리셰와의 충돌로 인해서 아쉽게 마감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그 는 선수 생활을 그만 둔 이후에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유소년 팀 코치로 일하였다. 도르트문트의 유소년 팀 코치로 일하던 도중 독일 U-17 대표팀 감독의 제의를 받았고 독일 대표팀을 이끌고 대한민국으로 와서 견고한 모습을 보이며 독일 대표팀을 3위에 올려 놓았다.

BVB 의 팬들은 그의 험한 인생을 모두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선수 시절 심각한 뇌종양에 시달렸지만, 결국 그것을 이겨 냈다. 물론 그의 선수 생활은 그가 뇌종양에서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트레이닝에서 BVB의 동료였던 선데이 올리셰와의 충돌로 인해서 아쉽게 마감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그는 선수 생활을 그만둔 이후에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유소년 팀 코치로 일하였다. 도르트문트의 유소년 팀 코치로 일하던 도중 독일 U-17 대표팀 감독의 제의를 받았고 독일 대표팀을 이끌고 대한민국으로 와서 견고한 모습을 보이며 독일 대표팀을 3위에 올려놓았다. 
 

Fredi Bobic
199-2002 56경기 17골

프레디 보비치는 공식적으로는 2002년 도르트문트 소속으로 마이스터 샬레를 들어올렸어야 했지만, 그는 도르트문트에서 많은 출장 기회를 얻지 못했고 2002년 겨울에 볼튼으로 임대 갔었기 때문에 챔피언이 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는 챔피언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고 늘 이야기 하곤 했다.

그는 도르트문트에서의 생활을 끝내고 하노버로 이적해서 다시 한번 그의 전성기를 뽐냈으며 헤르타 베를린에서도 적절한 활약을 하였다. 심지어 이러한 활약에 힘입어 EURO2004 독일 대표팀에도 발탁되기도 하였다. 그는 독일에서의 선수 생활을 끝내고 크로아티아의 NK 리예카로 이적하였으며, 그곳에서 8경기를 치른 이후 은퇴하였다.

현재 그는 그가 직접 차린 스포츠 용품 가게를 운영하고 있으며, 스포르팅 디렉터가 되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그는 이미 하노버, 베를린, 슈트트가르트, 볼프스부르크 등의 스포르팅 디렉터로서 거론되고 있는 중이다.

 



보 루시아 도르트문트와 유벤투스간에 펼쳐진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의 주인공이었던 칼-하인츠 리들레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서 두 번의 리그 타이틀과 한 번의 유럽 챔피언 타이틀을 거머쥔 선수이다. 그는 매우 골 결정력이 뛰어났던 포워드였다. 마치 독일의 레전드 스트라이커인 게르트 뮐러를 연상시키는 득점력을 지니고 있는 선수였지만 아쉽게도 그의 전성기에는 그보다 더욱 뛰어난 클린스만과 루디 푈러라는 벽이 그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는 블라우-바이스 90 베를린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해서 베르더 브레멘, 라치오를 거친 이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로 이적하였다.

그는 도르트문트에서 챔피언스 리그 타이틀을 거머쥔 이후에 잉글랜드의 명문인 리버풀로 이적하였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의 날카로운 골 결정력은 무디어져 갔고 리버풀에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리들레는 리버풀에서 2부리그의 풀햄으로 이적하였고 풀햄이 다음 시즌 1부리그로 승격했음에도 불구하고 큰 활약을 하지 못한 채 그는 풀햄에서 은퇴하였다.

그는 현재 스위스에 머물며 그라스호퍼 취리히의 스포르트 디렉터로 있으며, 또한 그는 4성 호텔과 아이들을 위한 풋볼 캠프를 소유하고 있다. 또한, 그라스호퍼 취리히의 고문으로도 일하고 있다.

그는 BVB 서포터들 사이에서 열렬한 지지를 받는 선수 중의 하나다. 그는 바바리아의 크로스컨트리 챔피언이었었으며, 그의 선수 생활은 뉘른베르크에서 시작한다. 당시 뉘른베르크는 2부리가 소속이었지만 그 다음 시즌 승격해 1부리가에서 뛰게 되었으며 그의 활약에 힘입어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하게 된다.

그는 바이에른 뮌헨에서 세 시즌을 뛴 이후에 이탈리아의 유벤투스로 이적했고, 곧바로 독일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로 돌아오게 된다. 그는 도르트문트에서 오른쪽 미드필더와 수비수로 활약했으며, 무려 307경기를 뛰었다. 그는 그의 은퇴 시즌인 2003-2004 시즌 38세에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고작 세 경기를 제외하고 모든 경기를 소화할 정도로 체력 관리를 잘한 선수였으며, 노련하게 경기를 운영하는 선수로 유명하였다.

그는 도르트문트에서 은퇴한 이후에, 도르트문트의 이사로 일하였으며, 2006년 1월에 그는 바바리아 땅으로 돌아가서 현재 1860 뮌헨의 팀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도르트문트에서 두 번의 마이스터와샬레와 한 번의 빅이어를 들어올린 외르그 하인리히는 곱상한 외모와는 달리 매우 정력적인 미드필더이자 수비수였다. 98년에 도르트문트에서 피렌체로 높은 이적료로 이적하였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활약을 보이며 다시 도르트문트로 돌아왔으며, 돌아온 이후에 좋은 활약으로 도르트문트를 분데스리가 우승으로 이끄는데 견인차 구실을 하였다.

그는 2003년에 도르트문트에서의 선수생활을 마감하고 쾰른으로 이적한 이후에 한 시즌을 뛰고 난 후에 프로로서의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그는 현재 1 FC 우니온 베를린에서의 스포르트 디렉터로 일하고 있으며, 때때로 5부리가 팀인 TSV Chemie Premnitz에서 뛰기도 한다.

 

유벤투스에서 챔피언스리그 타이틀을 차지하고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로 와서 챔피언스리그 타이틀을 차지한 이례적인 경력의 소유자인 파울로 소사는 도르트문트에서 1년 반을 뛰었지만, 그동안 챔피언스 리그 타이틀을 차지하는데 큰 공헌을 한 선수이다. 비록 뛰어난 기량에 비해서 잦은 부상에 시달렸던 그였지만 말이다.

그는 인테르의 5백만 파운드 제의를 거절하지 못하고 1998년 1월 인테르로 이적하게 되며 그 이후에도 파르마, 파나시나이코스, 에스파뇰 등 자주 소속팀을 바꿨던 선수였다. 그는 2002년 한일 월드컵에 포르투갈 국가대표로 참가한 이후에 31세의 짧은 나이에 은퇴하였다.

현재 그는 포르투갈 국가 대표팀의 어시스턴트 코치로 있으며, U-15 대표팀의 코치로 일하고 있다.

Stefan Klos
1990-1998 254경기 0골

도르트문트태생으로 도르트문트의 유스 출신인 스테판 클로스는 기량이 뛰어난 골키퍼임에도 불구하고 대표팀과는 전혀 인연이 없었던 선수이다. 그는 도르트문트에서 챔피언스 리그를 우승 했지만 경영진과의 갈등으로 법적 공방까지 벌인 이후에 레인저스로 이적하게 된다.


그는 레인저스에서도 뛰어난 기량을 자랑하며 오랜 기간 레인저스의 골문 앞을 지켰으며 2005년 1월에 부상을 당하면서 후보 골키퍼로 남게 되며 결국 2007-2008 시즌 시작 전에 은퇴를 선언 하였다.

폴 램버트는 도르트문트에서 활약한 두 명의 스코틀랜드인들 중 한 명이다. 그는 한 시즌 반을 뛰었지만, 챔피언스리그 타이틀을 따는데 일조하였으며, 그에게 언제나 도르트문트의 팬들은 You'll Never Walk Alone을 불러주었다. 그는 향수병으로 스코틀랜드로 돌아갔지만 그를 좋아하는 팬들은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

그는 셀틱으로 돌아가서 네 차례나 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며, 2003에는 UEFA컵 결승에서 주장으로 뛰기도 하였다. 그는 현재 잉글란드 리그2의 위컴비 원더러스의 감독으로 일하고 있으며, 2006년 12월에는 찰튼 애슬래틱 어웨이 경기에서 이기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묄 러는 도르트문트에서 오랜 기간을 뛰었지만 팬들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선수이다. 그는 도르트문트에서 많은 골과 많은 도움을 기록하며 모짜르트라는 별명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90년에 프랑크푸르트로 이적했을 때, 그가 약속을 어겼다고 생각한 서포터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2000년도에는 리그 라이벌인 샬케에 합류하면서 그에 대한 팬들의 사랑은 완전히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비록 그가 팬들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실력을 폄하하는 선수는 그 누구도 없을 것이다. 드리블, 패스, 득점력 모두 빼놓을 수 없을 만큼 좋은 공격형 미드필더였으며, 득점력 또한 좋아서 도르트문트 시절에 미드필더로서 71골이나 되는 득점을 기록하였다.

그는 2004년 3월에 은퇴했고 2007년 7월에 빅토리아 아샤펜부르크의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도르트문트에서 태어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서만 활약하였으며, 현재에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위해서 일을 하고 있는 선수, 바로 미카엘 "수지" 조르크이다. 조르크는 도르트문트에서 463경기를 뛰었으며, 이 기록은 클럽 레코드다. 또한, 그는 131골로 도르트문트에서 두 번째로 높은 득점 기록이 있기도 하다.

그의 별명인 "수지"는 그가 커리어를 시작할 무렵 그의 긴 헤어스타일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그는 많은 기간을 팀의 캡틴으로 있었으며 97년 빅 이어를 처음으로 들어올렸던 선수도 바로 조르크였다. 그는 선수생활 내내 수많은 서포터들의 지지를 한 몸으로 받았던 선수였다.

그는 선수 생활 은퇴 이후에도 도르트문트를 위해서 일하고 있고 현재는 도르트문트의 스포르트 디렉터로 일하고 있다. 그는 비록 선수생활 시절에 비해서 서포터들의 지지를 많이 받지 못하고 있지만 그가 도르트문트를 사랑하고 있다는 마음은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조르크와 마찬가지로 도르트문트에서 태어나, 도르트문트에서 선수생활을 하고, 이제 도르트문트의 보드진으로 일하게 될 선수가 있다. 90년대 중, 후반 축구에 관심이 있었다면 누구나 한번쯤은 이름을 들어 봤음 직한 선수 바로 독일의 비운의 축구 천재 '라스 릭켄' 이다. 그는 챔피언스리그 파이널의 최연소 득점자였으며, 그의 골은 전 세계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는 비록 현재 선수 생활이 막바지에 달했으며, 1군 경기의 출장 기회를 전혀 얻지 못하고 있지만 수많은 도르트문트의 서포터들에 의해서 가장 사랑받는 선수로 남아 있다. 비록 그의 결정들이 그가 야망이 없다고 비판받을지는 몰라도 그의 도르트문트에 대한 사랑은 경기장에 모인 81000명의 서포터들에게 영원히 지지받을 것임이 틀림없다.

옌 스 레만은 에센에서 태어나, 샬케04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하였다. 10년 가까이 샬케에서 활약하며 UEFA컵 우승을 차지하면서 좋은 기간을 보낸 이후에 이탈리아의 명문 AC밀란으로 이적하였다. 하지만, 그는 밀라노에서 많은 출장 기회를 잡지 못하였으며 다시 독일로 돌아오는데 그 클럽은 샬케의 라이벌인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였다.

그는 도르트문트에서 2002년 마이스터샬레를 들어올렸으며, UEFA컵 파이널에도 진출 하였다. 그는 매우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그는 분데스리가에서 가장 많이 퇴장당한 골키퍼 기록이 있는 선수이다. (5회)

그는 2003년 잉글란드의 명문 클럽인 아스날로 이적하였고 이적하자마자 아스날의 대기록인 무패우승에 일조하였다. 그는 아스날에서 리그 우승을 비롯한 몇몇 우승컵을 차지하였으며, 아직까지 아스날에 남아 있다.



여전히 에바니우손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나뉜다. 그가 수비적으로 좋지 않은 사이드 백이었다는 것과 공격적으로 훌륭한 사이드 백이었다는 것으로 말이다. 어찌됐건 에바니우손 역시 도르트문트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린 선수 중 하나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는 2005년 4월 고국인 브라질로 돌아갔다가, 2006년 1월 쾰른의 부름을 받았지만 쾰른이 강등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는 쾰른과 계약을 해지하고, 현재 아틀레티쿠 미네이루에서 뛰고 있다.



마 르씨우 아모루조, 그가 분데스리가의 이적료 기록을 깨고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 도착한것은 일종의 선언과도 같은 것이었다.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공격적인 투자를 통해서 팀의 가치를 끌어올리고자 했으며, 그것이 바로 세리에A의 득점왕 출신인 아모루조를 영입하는 것으로 그들의 야망을 그대로 보여줬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이적 첫 시즌은 그의 명성 답게 좋은 모습이었다. 첫 시즌에 그는 공동 득점왕을 차지했으며, 2002년에 도르트문트를 우승으로 이끄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이후부터 숱한 문제를 일으키며 피치 내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그는 결국 팀의 재정이 흔들리면서 2004년 말라가로 이적하였지만,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고 고향인 브라질로 돌아가 좋은 모습을 보이면서 이탈리아의 명문인 AC밀란과 계약 하였지만 출장 기회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며 다시 브라질로 돌아갔다. 하지만, 브라질에서도 큰 임팩트를 남기지 못한 채 현재 소속되어 있는 그레미우에서도 출장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도르트문트 시절 그는 세 번의 십자 인대 부상 때문에 그의 커리어를 대부분 망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2002년 우승 당시 마지막 경기에서 좋은 활약을 하였으며, UEFA컵 결승에 오르는데도 중요한 득점에 성공하는 등, 잊지 못할 기억을 팬들에게 선사한 선수이다. 그는 2005년 도르트문트와 작별을 고하고, 마인츠로 이적했지만 클롭 감독의 전술에 들어맞지 못하며, 조커로서 활약하였다. 그는 2007년 함부르크로 이적하였다.

체크의 거인, 얀 콜레르는 스테판 샤퓌자와 함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 있어서 기억에 남을만한 스트라이커 중 한 명이다. 마르씨우 아모루조와 함께 2001년에 이적하였으며 아모루조와 투톱을 서거나 혹은 에웨르톤이 가세헤 쓰리톱을 이루는 도르트문트의 공격진은 당시 누구도 부럽지 않을 만큼 좋은 공격진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팬은 그의 이적이 그의 부인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의 부인은 모나코의 꼬떼 다쥐르에서의 화려한 인생을 원했으며, 그는 모나코로 이적하게 되었다. 현재 도르트문트의 서포터들은 그의 이적이 해외로의 경험을 원하기 때문이라는 걸 믿지 않는다.

어쨌건, 그가 모나코로 이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도르트문트에 있을 시절 보여줬던 활약 등은 그것으로 인해서 빛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Tomáš Rosický
2001-2006 149경기 29골

위에서 언급한 얀 콜레르와 함께 '체크듀오'라고 불리었던 토마스 로시츠키는, 안드레아스 묄러 이후에 도르트문트의 중원에서의 창조성을 불어 넣어준 넥스트 모짜르트였다. 그가 가진 모짜르트라는 별명 답게 그는 피치 위에서 오케스트라를 연주하는 듯한 느낌으로 팀 전체 플레이를 조율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타고났다.

또한, 그를 영입할 당시 마티아스 잠머 감독이 직접 10번이 적혀 있는 도르트문트의 져지를 들고 로시츠키의 집을 방문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이를 통해 로시츠키는 도르트문트로 이적하게 되며, 도르트문트의 또 한번의 전성기를 이끌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도르트문트를 떠나 런던의 명문 클럽이자 그의 옛 동료 옌스 레만이 뛰는 아스날로 이적했으며, 아스날에서도 나쁘지 않은 활약을 선보이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많은 도르트문트 팬들은 그의 활약이 도르트문트 시절에 비해서 좋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여전히 그를 그리워하고 있는 팬들은 수없이도 많다.

도르트문트 팬들은 그를 여전히 좋아하고 있고, 그리워할 것이며. 이것은 아마도 도르트문트가 타이틀 컨텐더가 되기 전까지는 그 그리움이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특별한 선수였기 때문이다. 


David Odonkor
2001-2006 75경기 2골

 

그가 처음 도르트문트 1군 라인업에 이름을 올린 것은 2002년 레버쿠젠과의 경기였다. 하지만, 그는 그 이후 약간의 멘탈적인 문제 때문에 4년 동안 아마추어팀 경기를 소화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2005년 베르더브레멘 아마추어팀과의 경기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이며 1군에 다시 오르게 되었으며, 2005-2006시즌 나쁘지 않은 활약을 선보이며 놀랍게도 2006년 월드컵 클린스만의 대표팀에 뽑히게 된다. 

월드컵에서 조커로 투입되며 쏠쏠한 활약을 펼친 그는 반 마르바이크 감독의 전술 변화로 그의 자리를 잃어버렸으며 때마침, 레알 베티스의 매력적인 오퍼와 함께 레알 베티스로 이적하게 된다. 그는 여전히 스페인어를 잘할 줄 모른다고 하며, 겹치는 부상으로 인해서 베티스의 입지가 상당히 불투명한 상태이다. 


박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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