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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진의 '영화진화론'] '터미네이터5' 존 코너 없는 그들만의 세상으로

기사입력 2015.07.19 01:38 / 기사수정 2015.07.21 14:12

이영기 기자


[엑스포츠뉴스=김동진 대중문화평론가] ‘터미네이터 5’는 미래에서 온 시간여행자 ‘카일 리스(제이 코트니)’의 모험담이다. 자신이 구해내야 할 1984년의 ‘사라 코너(에밀리아 클라크)’는 이미 여전사가 되어 오히려 자신을 구해주고, 자신을 과거로 보낸 저항군 지도자 ‘존 코너(제이슨 클락)’는 터미네이터 T-3000으로 변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

이런 본말전도와 역할변화 앞에서 카일 리스는 혼란스러워 한다. 이 혼란스러움은 터미네이터 1편과 2편에서 ‘사라 코너’와 ‘존 코너’가 차례대로 경험했던 것이다. ‘자신을 죽이러 온 남자’와 ‘자신을 살리러 온 남자’ 사이에서 잠시 헷갈리다 양자택일하는 것, 그리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 죽음의 위협을 견뎌내는 것.

제임스 카메론의 인물들

제임스 카메론은 동떨어진 세계로 자신의 인물들을 보내 왔다. ‘터미네이터(1984)’의 카일 리스는 2029년에서 1984년으로 시간여행을 하고, ‘에이리언 2(1986)’의 리플리(시고니 위버)는 괴물이 우글거리는 혹성에 당도한다. ‘아바타(2009)’의 제이크 설리(샘 워싱턴)도 행성 판도라에 간다. 이 인물들은 때로 고립감을 느끼는 단독자이지만, 동시에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이어주는 매개자의 역할도 한다. 제임스 카메론이 기획한 ‘폭풍속으로(1991)’나 ‘솔라리스(2002)’에서도 이런 인물 패턴이 반복된다.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들에서는 대체로 선과 악이 명확하다. 악당들은 ‘설득과 협상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순수한(?)악’에 가까워서, 애초에 고담준론이 오고갈 여지가 없다. 남는 것은 인물들 사이를 가득 채우는 물리적 폭력이다. 카메론의 인물들은 눈앞에 닥친 생사의 위기를 돌파하느라 바빠서, 복잡한 생각이나 윤리적 고뇌를 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이런 단순명료한 선악 이분법에도 불구하고 카메론의 영화들은 유치해지지 않는다. 이 점은 카메론과 여타의 액션대작 감독들을 구별 짓게 만든다. 그가 만들어낸 악역들의 비인간적(사이보그, 외계인)인 면은 인간성 자체를 초월하면서, 어딘가 신(神)적인 영역에 가닿는다. 미래에서 온 합성유기체 ‘터미네이터’는 기독교 종말론에 등장하는 ‘묵시록의 네 기사’에 비교될 수 있다. ‘시간의 끝’에서 세상의 모든 생명체를 추수하는 ‘종결자’. ‘터미네이터’는 단지 몇 대의 사이보그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디스토피아’라는 미래 자체가 현재를 압박해 들어오는 공포를 만들어낸다.

‘터미네이터’나 ‘에이리언’은 본래 공포영화 캐릭터에 가깝다. ‘13일의 금요일’의 ‘제이슨’이나 ‘나이트메어’의 ‘프레디’처럼 이 악의 화신들은 계속 되살아나 부활한다. 제임스 카메론은 공포영화에 최적화된 불사신들을 액션영화 속에 밀어 넣은 것이다. 가차 없고, 철저하게 무자비한 공포영화의 악마들. 캐릭터로서 터미네이터의 매력은 이 ‘가차 없는 무자비함’에 있다. 낫을 들고 생명을 회수하는 저승사자처럼, 돈이나 권력관계 같은 인간적인 셈법은 이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 터미네이터를 만나면 그냥 제삿날이다. 카메론은 ‘터미네이터 1’에서 불도저나 대형유조트럭을 이용해서 ‘막무가내로 몰아붙이는’ 터미네이터의 성격을 시각화한다.



카일 리스로부터

‘터미네이터 5’는 카일 리스의 시점으로 내용이 전개된다. 1편이 ‘사라 코너(린다 해밀턴)’의 시점이었고, 2편이 ‘존 코너(에드워드 펄롱)’의 시점이었다는 점에서 꽤나 정통적인 접근법이다. ‘터미네이터 5’는 1편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카일 리스에 대해 모르는 지점들(2029년에 스카이넷을 괴멸시키고 타임머신에 타기까지)을 채워 넣는다.


주목받지 못했던 인물의 시점에서 서사를 재구성하는 것은 기존의 이야기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주요한 방법이다. 하지만 ‘터미네이터 5’에 대한 관객반응을 볼 때 이 시도가 온전히 성공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우선 관객들은 30년 전의 캐릭터인 ‘카일 리스’에 대해 알고 있는 바가 적었다. 골수팬들이야 1편을 반복해서 보며 ‘카일 리스’를 기억할 수 있겠지만, 일반적인 관객들의 입장에서 ‘카일 리스’는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다. 그래서 ‘카일 리스’를 따라 1984년의 세계를 다시 체험하는 게 그다지 큰 즐거움으로 다가오질 않은 것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카일 리스’가 화자로 선택되면서 인물관계와 갈등이 변화됐다는 점이다. 극작가는 당연히 ‘카일 리스’가 맞닥뜨릴 내면적‧외면적 장애물들을 서사의 순서에 맞게 배치했다. ‘카일 리스’가 도착한 1984년에서 ‘사라 코너’가 도움이 필요치 않은 여전사가 되어있는 것도, 이런 측면에서 보면 타당한 설정이다. 또한 T-800(아놀드 슈워제네거)이 ‘카일 리스’에게 마치 사위를 못마땅해 하는 장인처럼 구는 것도, 1편에서 ‘사라 코너’가 ‘카일 리스’를 믿지 못하는 그 갈등을 변주한 것에 가깝다.

무엇보다도 ‘존 코너(제이슨 클락)’의 T-3000으로의 변화 역시 ‘카일 리스’ 화자 설정에 종속됐다고 볼 수 있다. 가장 믿었던 인물이 결정적인 순간에 배신하도록 만드는 것. 이것은 전형적이지만 효과적인 작법 기술이다. 그런데 이 공을 들인 변화들이 ‘터미네이터’라는 우주 속에서 왠지 덜거덕거리며 겉돌게 된다.

앨런 테일러의 변주

‘터미네이터 5’를 감독한 앨런 테일러는 수많은 TV 걸작드라마를 만들어온 뛰어난 연출가다. 그중에서도 ‘소프라노스’나 ‘왕좌의 게임’은 앨런 테일러의 참여도가 높았던 작품들로, 여기서 그의 특성들의 일부분을 가늠해볼 수 있다. ‘소프라노스’는 냉혈한인 마피아 보스가 힘겹게 가장의 책무를 지켜나가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보여주는 이야기였다. 소프라노스는 직업적인 범죄자가 우리의 생각보다 좀 더 복잡한 인물이라는 것, 그리고 선과 악 사이에 수많은 절충지점들과 그러데이션(gradation)이 존재함을 보여줬다.

‘왕좌의 게임’에서는 이런 선과 악의 상대성이 더욱 부각된다. 어떤 등장인물도 전적으로 선하거나 악하지 않다. 선악은 관계의 파생물이고, 비극은 서로 다른 욕망이 부딪힐 때마다 매번 발생하는 상수(常數)에 가깝다. 이렇듯 ‘왕좌의 게임’은 판타지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어른의 세계를 그려낸다. 한편으로 ‘왕좌의 게임’은 주요 인물들을 거침없이 사라지게 하는 점에서 남달랐다. 설마 이 인물이 죽어나갈 일은 없을 것이라 믿는 ‘바로 그 인물’이 죽어나갔다.

앨런 테일러는 이런 ‘선악의 모호함’과 ‘주요인물에 대한 가차 없음’을 터미네이터의 세계에 끌어왔다. T-3000으로 변화된 ‘존 코너’가 ‘카일 리스’에게 외치는 궤변에는 이 두 가지 요소가 결합되어 있다. 스카이넷을 지구상에 존재했던 다양한 유기체들의 진화적 과정의 일부로 보는 시선은, 그동안 ‘터미네이터’의 서사적 우주가 외면했던 부분이었다. 과연 지구라는 행성의 항상성을 위해 ‘인류의 지속’이 필요한가라는 문제. 합성 유기체로 돌변한 ‘존 코너’는 이 입장에서 발언을 한다.

하지만 이 과감한 역할변화는 ‘터미네이터’ 세계가 근거로 삼는 상징적 지반을 위험에 빠뜨린다. ‘존 코너’는 미래에 인류를 구원할 인물로, ‘사라 코너’는 그런 구원자적 인물을 키워내는 ‘위대한 어머니’로 설정되어 있었다. 이것은 거의 직설적으로 ‘예수-마리아’의 관계로 연결되는데, 앨런 테일러가 ‘존 코너’라는 예수의 계승자를 거의 ‘적그리스도’로 강등시킨 급변을 관객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는 쉽지가 않다.



아놀드 슈워제너거라는 육체

‘터미네이터 5’를 보면서 느낀 가장 강렬한 감정은 ‘아놀드 슈워제네거’로 인해 일어났다. 지난 35년 동안(나는 한국에서 1983년에 개봉한 ‘코난’에서 처음으로 아놀드 슈워제네거를 만났다) 이 바디빌더 출신의 덩치를 ‘좋아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터미네이터 5’는 내 아버지와 동갑인 이 배우에게 그동안 얼마나 애정을 느꼈는지를 확인하게 해줬다. 나는 ‘아놀드’가 등장할 때마다 거의 좋아 죽을 지경이었다. 발음은 엉망이고 행동은 경직된 이 ‘발연기’의 아이콘을 보면서 말이다.

여기에는 대체될 수 없는 시간의 한계가 개입되어 있다. 관객의 삶은 배우의 삶처럼 특정한 시간대에 조건 지어져 있다. 나는 ‘카일 리스’같은 시간여행자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일회적인 삶’ 속에서 생의 가능성을 탕진하게 된다. 그래서 83년에 까치발을 돋우면서 ‘애국가’가 흘러나올 때 자리에서 일어나고, 대한민국의 한 해 예산이 2조 5천억이라는 사실을 ‘대한뉴스’에서 전해 듣는다. 그리고 시작되는 ‘코난’이라는 영화에서 과묵하기 이를 데 없는 ‘판타지 세계’의 검투사를 만난다.

추억은 우리를 넉다운(knock down)시킨다. 젊음 속에서 생이 발산될 때 우리는 추억의 힘을 예측하지 못한다. 이제 중년의 시간에 생이 수렴될 때 우리는 추억 속에 집을 짓는다. 나이든 어르신들이 ‘가요무대’를 보는 심정으로, 나는 ‘터미네이터 5’를 본 것이다.

아놀드 슈워제너거의 육체는 시간의 무상함을 벼락처럼 일깨웠다. 전무후무한 기록을 가진 바디빌더 챔피언의 육체. 그 육체도 노화를 거스르지 못하고, 그 노화는 거대 자본의 블록버스터에도 아로새겨진다. 타임 패러독스를 다룬 액션SF는 30년 만에 패러독스의 불가능성을 몸소 보여준다. 그 어떤 것도 시간이라는 ‘종결자’의 예외가 되지 못한다.



납작해진 세계

‘터미네이터 5’에서 미래와 과거는 현재를 향해 압축해서 밀려온다. 카일 리스가 최종적으로 당도하는 2017년은 2029년과 1984년 사이에 갇혀있는 시간이다. ‘터미네이터 5’가 T-800의 장황한 설명으로 구축하는 타임라인은 오히려 시간의 경계를 흩뜨려 놓는다. 시간여행으로 질서가 무너진 여러 겹의 평행우주들은 ‘유일한 시공간’이 갖는 간절함을 앗아간다.

여기서 우리는 1991년에 ‘터미네이터 2’가 보여준 선견지명을 떠올려야 한다. ‘스카이넷’은 1991년의 대중문화가 상상할 수 있는 미래의 최극단이었다. 현실 세계는 불과 3년 뒤에 ‘인터넷’이라는 ‘스카이넷’의 닮은꼴을 상용화하게 된다. 뜻밖의 예정조화. 1991년의 세계는 가능성으로 넘쳐났다. 팽창하는 우주.

‘스카이넷’의 발상은 여러 영화에 족적을 남긴다. ‘매트릭스’는 ‘스카이넷’에 가상현실이 덧입혀진 버전이었고, ‘어벤져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은 그냥 ‘스카이넷’이라고 불러도 무방하게 악역을 설정해 놨다. 그래서 ‘터미네이터 5’에서 스카이넷에 관련된 내용들은 뭔가 상투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이미 수많은 영화들이 ‘터미네이터’가 제안한 미래의 모습을 여러 방식으로 우려먹어왔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터미네이터 5’에서 T-3000은 ‘가차 없는 무자비함’을 실현하지 못한다. 5편의 악당들은 전혀 무섭지가 않다. 이것은 커다란 결점이다. 5편은 사이보그와 인류 사이의 묵시록적인 전쟁을 ‘아들과 엄마’의 싸움, ‘사위와 장인’의 싸움 같은 가족극으로 내려 앉혔다. 위축되는 우주.

‘터미네이터 5’는 현재에 인류가 처한 입장을 은연중에 비춰준다. 60억의 인구가 공동으로 살아남기 위해 처리해야할 문제들을 인지하면서도, 그것을 실행할 의지는 거의 없는 오늘날의 세계. 디스토피아로 가는 길이 점점 가까워오는데도, 인류는 지금의 생활방식을 바꾸지 못한다. ‘터미네이터’처럼 다가오는 재앙적 미래.

지난 30년 동안 이루어진 급격한 경제적 세계화는 거의 모든 도시들을 공간적으로 동질화시켰다. 지표면의 동질화와 시간의 압축은 우리가 사는 세계를 납작하게 만들고 있다. 거의 감옥을 닮아가는 세계. 어쩌면 인류의 끝은 바다 위의 ‘바벨탑’이었던 ‘타이타닉’의 침몰과 흡사할지 모른다. 우리는 ‘존 코너’가 더 이상 없는 ‘터미네이터’들만의 세계를 향해 추락하고 있다. 카일 리스처럼 벌거벗은 체로.

nivriti@naver.com

이영기 기자 leyoki@xport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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