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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진의 '시네리뷰'] '추억의 마니', 마법을 만나는 '갇힌 소녀들'

기사입력 2015.05.08 19:25 / 기사수정 2015.06.27 01:09

이영기 기자


[엑스포츠뉴스=김동진 대중문화평론가] '세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마법의 원이 있다. 원은 안과 밖을 나누는데, 다른 사람들은 원의 안쪽에 있고 나는 바깥쪽에 있다.'

지브리 애니메이션 '추억의 마니'는 세상에 자신이 설 자리는 없다고 생각하는 12살 소녀 안나의 이야기다. 안나의 근원적인 상처는 버림받아 입양되었다는 사실인데, 그 마음의 고통을 표현하기라도 하듯 발작적인 천식에 시달린다. 결국 안나는 의사의 권유로 홋카이도의 친척집에 요양을 가게 되고, 그곳에서 습지 저택에 살고 있는 마니를 만나게 된다.

쪽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만 도달할 수 있는 습지의 저택. 마니가 살고 있는 저택은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을 닮아 있다. 저택에는 밤이 와 있는데 하늘은 여전히 낮이다. 공존할 수 없는 밤의 빛(가로등)과 낮의 빛(태양)이 어우러진 기묘한 세계. '습지의 저택' 역시 꿈과 현실, 과거와 현재가 '안과 밖'으로 뚜렷하게 구별되지 않는 세계다. 자신이 '원 밖의 세계'에 있다고 믿는 소녀가 놀라운 경험을 할 만한 최적의 장소다.



지브리 애니메이션에는 '안과 밖을 뒤섞는 마법의 원'의 장소들이 자주 등장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시공간을 점프하는 '마법의 성'을 떠올려보라. 일본의 아동문학 비평가인 무라세 마나부는 이 마법의 원을 '정글'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정글의 우거진 수풀 사이에서는 우리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생명체가 튀어나온다. 나우시카의 '부해'에 나타나는 거대 곤충, 토토로의 '숲'에 사는 요정, 센과 치히로의 '유곽'에서 목욕재계하는 신(神)들 , 코쿠리코 언덕 '동아리 건물'의 괴짜 회원들까지. 기이한 생명체들로 들끓는 정글은 지금은 폐허처럼 보이지만 '삶의 진실과 생명력'을 복원하는 원형의 시공간이다. '추억의 마니'에서의 습지저택도 이 역할을 멋지게 해낸다.

이 외에도 '추억의 마니'에는 지브리 월드의 필수요소들이 정교하게 배치되어 있다. 낯선 세계에 적응하는 사춘기 소녀(빨강머리 앤, 마녀배달부 키키), 기묘한 존재와의 우정(토토로, 벼랑 위의 포뇨), 잊었던 이름을 기억해내기(센과 치히로, 게드 전기) 등등. 하지만 '추억의 마니'가 주는 감동은 이 패턴들의 정교한 결합을 뛰어넘는다.

결정적으로 우리를 사로잡는 건 섬세하게 묘사된 안나의 내면세계다. 자신을 드러내길 두려워하는 12살 소녀의 마음 풍경은 우리의 그 시절을 떠올리게 만든다. 본심과는 달리 가시 돋친 말을 뱉고, 그 말에 대한 후회로 스스로를 더욱 미워하던 시간들. 성인이 되어서도 이 마음의 폐쇄회로를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아니기에, 안나에 대한 애틋함은 배가 된다. 투명하게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은 '생의 과업'이라고 칭할 만큼 어려운 것이니까.



그래서 달빛아래 두 소녀가 춤추는 장면은 커다란 위로를 준다. 마니가 마음을 다해 안나를 포옹해 줄 때, 안나의 삶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영역으로 들어선다. 그 누구와도 마음을 터놓지 못하던 안나가 마니와는 '비밀과 약속'을 공유하게 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마니와의 관계를 숨기겠다는 ‘비밀’과 마니를 기억하겠다는 '약속'.


만일 안나가 습지저택에서 마니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어른들에게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안나를 제외한 마을사람들에게 습지저택은 폐가일 뿐이기에, 안나는 정신이 이상하거나 귀신에 홀린 아이로 손가락질 당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이 '비밀'은 '추억의 마니'에서 꽤 핵심적이다. 비밀이 누설되지 않아야만 안나는 계속 천식환자로 남을 수 있다. 안나가 마니를 만난 다음 어김없이 혼절해 있는 장면들은, 실제로는 이 비밀이 중의적인 쓰임새가 있음을 드러낸다. 안나가 마니에게 '홀렸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가끔씩 집에 온다는 마니의 엄마는 파티에 온 사람들로부터 '마녀'라고 불린다. 그에 비해 마니는 저택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금발에 빗질을 강요당하는 장면에서는 동화 '라푼젤'이 연상된다. 라푼젤은 '탑에 갇힌 공주'의 원형적인 이야기다. 중세 영웅서사의 단골 레퍼토리인 '누가 공주를 구할 것인가?'는 ‘탑에 갇힌 공주’와 한 쌍을 이룬다. 그래서 공주는 왕자(혹은 기사)를 부르기 마련인데, '추억의 마니'에서는 왕자 대신 '자기 안에 갇힌 소녀'가 불려 나온다.

결국 '추억의 마니'에서 '탑에 갇힌 소녀'와 '자기 안에 갇힌 소녀'는 서로를 포옹한다. 둘은 서로 다른 시공간에 존재하지만, 습지저택이라는 '마법의 원'에서 만난다. 그동안 지브리의 수장인 미야자키 하야오는 독립적이고 성숙한 소녀 캐릭터들을 무수히 창조해왔다. ‘나우시카’와 ‘원령공주’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충분한 데, 이 소녀들은 세계의 생사를 좌우할 정도로 영웅의 모습에 근접한 캐릭터였다. 그리고 이 소녀들이 가로지르는 세계는 액션 활극의 세계이기도 했다.

이런 면에서 '추억의 마니'의 안나와 마니는 지브리 월드의 뉴타입이다. 이 정적인 소녀들은 서로의 부족함을 어루만지며 기대어 선다. 우리의 내면에 영웅이 있다는 선언도 소중하지만, 그 내면에 수호천사(daimon)가 있다는 전갈은 비길 수 없는 안도감을 준다. 마치 달빛 아래 흐르는 엄마의 자장가처럼.

김동진 대중문화평론가 nivriti@naver.com

[사진=추억의 마니ⓒ스튜디오 지브리]

이영기 기자 leyoki@xport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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