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 ⓒ 서태지컴퍼니
[엑스포츠뉴스=한인구 기자] 공연장에서의 압도적인 힘은 여전했지만, 서태지(42)는 이제 반항기 가득한 가수는 아니었다. 한결 여유로워졌고 '시대유감'을 외치기보단 '세대공감'을 천천히 읊어갔다. 뜨겁게 저물어 간다는 것. 그 속에서 음악적 성장을 이어가는 서태지였다.
서태지의 컴백공연 '크리스말로윈(Christmalo.win)'이 18일 오후 7시부터 서울 잠실 주경기장에서 열렸다. 이날 공연은 시작 전부터 많은 인파가 몰리며 서태지의 5년만의 가요계에 복귀를 반겼다. 서태지컴퍼니에 따르면 2만 5천명의 관객이 모였다.
일찌감치 도착한 팬들은 공연장 밖에서 대형 화면을 통해 상영된 '소격동' 뮤직비디오를 시청했다. 정규 9집 '콰이어트 나이트(Quiet Night)'를 선판매하는 부스에는 일찍 신곡을 들으려는 인파로 긴 줄을 보였다.
공연의 콘셉트가 크리스마스와 할로윈의 합성어인 탓에 기괴한 복장을 한 팬들도 눈에 띄었다. 누더기 옷과 좀비를 연상하게 하는 분장부터 산타클로스 복장을 한 팬들이 곳곳에 있었다. 한 커플은 유령 분장에 영화 '크리스마스의 악몽'을 떠올리게 하는 턱시도와 웨딩드레스를 입었다.
서태지는 데뷔 때부터 줄곧 가요계에서 저항적인 자세로 파격적인 음악을 시도해왔다. 팬들도 공연장에서 뜨거운 열기로 화답했다. 하지만 이날 데뷔 23년 차 서태지의 팬들은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10,20대보다는 30,40대 팬들이 큰 비중을 차지했고, 어린 아이들의 손을 잡고 공연장을 찾은 젊은 부부도 많았다.
오후 5시부터 시작된 입장도 여느 록 콘서트와 다른 듯했다. 떠들썩하기보단 진행요원의 안내에 따라 차분히 줄을 서서 공연장으로 들어오는 팬들의 얼굴에는 설렌 미소가 가득했다. 해가 뉘엿뉘엿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 갔지만, 무대에서 흘러나오는 '난 알아요' '컴백홈'을 흥얼거리며 서태지의 등장을 천천히 기다렸다. 스탠딩 무대 뒤편에서는 햄버거와 핫바로 저녁을 대신하는 팬들도 있었다.
공연장을 감싸는 좌석칸 상단에는 '오빠 우리 많이 컸지요' '신인가수 비뽁 애비' 등의 응원 현수막이 설치되어 있었다. 최근 아이돌 콘서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야광봉을 든 팬은 많지 않았지만, 서태지를 향한 꾸준한 사랑은 충분히 느껴졌다.
사전 공지된 공연 시작은 오후 6시였지만, 30분 늦게서야 댄싱9팀의 공연이 이뤄졌다. 댄싱9팀은 전설적인 밴드 퀸의 'don't stop me now(돈 스탑 미 나우)' 노래에 맞춰 무대를 달궜다. 댄싱9팀의 박인수(31)는 "서대장님의 무대를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다"고 소감을 전했다.
객석에 열기가 전해질 때쯤 축하공연은 끝났다. 다시 20여 분간 공연장은 조용해졌다. 온라인 생중계로 현장 팬들은 오후 7시에 시작하는 공연을 멀뚱히 기다려야 했다. 댄싱9팀의 축하무대와 크리스말로윈 공연 사이에 온라인을 통해 '크리스말로윈' 드라마버전 뮤직비디오와 특별 영상이 전해질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항은 미리 알려지지 않아 애꿎은 현장팬들만 공연장에서 빈 무대만 쳐다봐야 했다. 이날 공연의 가장 아쉬운 부분이었다.
서태지 '크리스말로윈' ⓒ 서태지컴퍼니
이어 서태지가 무대에 오르자 관객석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서태지는 편곡된 '모아이'를 시작으로 공연의 막을 열었다.
아이유(22)와 서태지는 선공개된 '소격동'을 한 무대에서 펼쳤다. 8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무대와 애잔한 음성에 가을밤은 더욱 무르익었다. 또 서태지는 타이틀곡 '크리스말로윈' 무대를 처음으로 선보였다. 앞서 서태지컴퍼니가 밝힌 것과 같이 130대의 메인 스피커와 36대의 그라운드 서브 우퍼로 해 공연이 더욱 생동감있게 다가오는 듯했다.
서태지는 "보고 싶었어요"라고 말하며 애잔한 눈빛으로 객석을 바라봤다. 이어 "너무 오랜만이다. 5년만에 여러분 앞에 섰다.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여러분을 보니 그냥 좋다"고 말했다. 그는 말을 마친 뒤 울먹이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서태지가 '크리스말로윈' 공연에서 들려준 노래는 특정 앨범이 중심이 되진 않았다. 세상에 불만을 외치는 '시대유감'부터 지난해 드라마 '응답하라 1994'로 다시 사랑받았던 '너에게'와 새 앨범 수록곡 '숲속의 파이터' 등 장르적으로도 한쪽에 치우치지 않았다.
그는 특히 90년대 스타들을 조금씩 사라져 가는 별로 표현한 '나인티스 아이콘'을 노래했다.
서태지는 "우리 인생도 빨리 지나가는 것 같다. 잘 살아오고 있는지 궁금하다.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스타들이 많지 않느냐"면서 "우리의 별이었던 스타와 여러분의 인생도 저물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담담히 말했다.
이번 공연은 그 말에 담긴 의미처럼 서태지의 음악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전환점이 될듯했다.
'미소년'이던 서태지는 어느덧 한 가정의 '아버지'가 됐다. 팬들도 더 이상 소년·소녀들이 아니다. 혼을 쏙 빼놓는 열광적인 환호보다는 서태지의 음악을 들으며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는 팬들도 많았다.
서태지의 '크리스말로윈' 공연은 매진되지 않았다. 대형 공연장이라는 것을 고려하더라도 아쉬운 성적이다. 그래도 이번 공연에서는 객석수 등 수치화할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 있었다. 서태지는 이제 어린 팬들의 대장이 아닌 같이 나이를 먹어가고 추억을 공유하는 가수가 된 것이다.
아이유, 서태지 ⓒ 서태지컴퍼니
한인구 기자 in999@xportsnews.com
한인구 기자 in999@xports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