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츠뉴스=서영원 기자] 프로야구 10구단 창단, 이적시장 등 비시즌에도 야구계는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한국야구는 이제 두 달 앞으로 다가온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 전력을 다하는 일만 남았다.
WBC는 지난 대회와 달리 대회 참가팀의 확대, 대회 운영 방식의 변경 등을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 야구팬을 찾아갈 예정이다. 특히 WBC는 우리에게 4강, 준우승이라는 걸출한 성적을 올린 역사가 있어 야구팬들의 남다른 기대를 받고 있다.
WBC와 올림픽의 성공은 프로야구의 흥행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야구대표팀이 늘 잘했던 것은 아니다. 야구대표팀의 부진은 프로야구 흥행 부진을 뜻하기도 했다. 야구 졸전사, 잊지 말아야 한다.
아테네올림픽 아시아예선 1차전 한국 vs 대만 (5:6)
한국야구는 2000시드니올림픽 동메달, 2002부산아시안게임 금메달로 대표팀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2003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는 어두운 나비효과의 시작이었다. 2004아테네올림픽 예선을 겸한 아시아야구대회는 한국, 중국, 일본, 대만이 참여해 상위 2팀만 진출 할 수 있었다.
한국은 당시 현대왕조를 이끌던 김재박 감독에게 지휘봉을 맡기고 당시 최고의 선수들로 대회에 나섰다. 첫 번째 경기는 대만전이었다. 당시 대만은 마이너리거 왕첸밍을 비롯해 궈홍치, 천진펑 등 향후 대만 야구를 이끌 인재들로 가득차 있었다.
양 팀의 선발은 정민태와 왕첸밍이었다. 한국은 1회부터 이종범, 장성호, 이승엽의 연타에 힘입어 2-0으로 앞서 나갔다. 3회와 4회 내야수비 불안으로 두 점을 내줬지만 정성훈, 이종범, 이승엽의 활약으로 4-2로 달아났다.
문제는 9회였다. 정민태에 이어 마운드를 물려받은 임창용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임창용은 바깥쪽 공에 대한 판정이 스트라이크가 되지 않으며 집중력이 흐려졌다. 안타-볼넷-안타를 맞은 임창용은 조웅천에게 마운드를 넘겼다.
조웅천은 당시 좋지 않은 컨디션으로 구속과 제구력이 정상급이 아니었다. 조웅천은 2사 2,3루 상황서 적시타를 맞고 4-4동점을 허용했다. 10회 말 천진펑, 장타이산을 상대로 볼넷 안타를 내준 한국은 무사 만루 상황서 통한의 끝내기 안타를 맞고 패했다.
당시 패배의 충격은 컸다. 올림픽 본선 진출 실패와 더불어 양국의 차이를 보이는 나비효과가 발생했다. 대만은 궈홍치, 천진펑, 왕첸밍은 메이저리그에서 활약을 펼쳤다. 일본에서는 장치엔밍, 린웨이추가 각각 요미우리자이언츠와 한신타이거즈서 주전활약을 했다.
한국야구는 대만에게 역전 당할 수도 있다는 위기론이 커졌다. 2006WBC와 2008베이징올림픽으로 명예회복을 하기 까지 한국 야구는 암흑기를 걸었다.
Did you know? 아테네 올림픽서 아시아 대표로 참가한 일본은 동메달, 대만은 5위에 올랐다.
도하 아시안게임 야구리그 5차전 한국 vs 일본 (6:9)
당시 한일전은 ‘도하 참사’로 기억되는 경기다. 일본은 사회인 야구팀으로 나섰고, 한국은 병역문제로 인해 프로 중심 대표팀으로 구성했다. 감독은 지난 아테네올림픽 아시아예선을 이끈 김재박 감독이었다.
이미 1차전 대만전에 장치엔밍, 궈홍치 콤비에 눌려 2-4로 패한 한국이었다. 그럼에도 일본전 출발은 수월했다. 한국은 3회초 이대호의 3점 홈런을 시작으로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3회말 선발 류현진이 아웃카운트 1개를 잡는 동안 5실점이나 해 강판 당했다.
이후 일본이 2점 홈런으로 7-4로 달아났다. 한국은 상대 실책을 틈타 6회와 8회 만회하면 7-7동점을 만들었다. 9회말 운명의 순간이 다가왔다. 한국은 마무리 오승환으로 연장 준비를 시작했고 일본은 초노 히사요리가 타석에 들어섰다. 초노는 1사 1,2루 상황서 오승환의 직구를 밀어쳐 우월 3점 홈런을 쳐냈다.
결국 한국야구는 동메달에 머무르는 치욕을 겪었다. 아시안게임 야구 신설 후 메달권은 늘 한국, 대만, 일본만이었다. 한국야구에게 도하 아시안게임은 사실상 꼴찌나 다름없는 결과였다.
선수 기강과 더불어 코칭스테프에 대한 비난이 강했다. 특히 김재박 감독은 당시 트리플A와 메이저리그를 오가며 활약 중인 추신수 선발을 두고 “저런 선수는 국내에도 널렸다”라는 인터뷰를 하며 언론의 뭇매를 맞았다.
Did you know? 당시 인터넷상으로 ‘오뎅장수’라는 소문이 퍼진 초노히사요리는 요미우리자이언츠 입단만을 원해 드래프트 거부 후 도요다자동차에서 실업야구를 뛰고있었다. 뿐만 아니라 소문과 달리 당시 일본대표팀 중 노점상, 개인사업자는 없으며 22명의 선수 중 16명이 프로진출에 성공했다.
2009 WBC 아시아라운드 승자전 한국 vs 일본 (2:14)
일본의 넓은 선수층과 분석력을 망각한 대패였다. 과거 아시아시리즈와 베이징올림픽을 통해 일본에 강하다는 김광현 카드를 또 내민 것이 패인이었다. 일본은 김광현의 낙차 있는 구질은 모두 분석했다고 자신감에 넘쳤다.
일본 선발은 마쓰자카 다이스케였다. 당시 마쓰자카는 방어율 2.90과 메이저리그 18승을 기반으로 사이영상 4위까지 오르는 괴력을 뽐내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WBC 첫경기인 중국전에서 스즈키 이치로, 조지마 겐지,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등이 타격 대부진에 빠져있었다.
베이징올림픽으로 대일본전 공포증이 없던 한국은 일본의 상황까지 인지한 후 ‘일본불감증’에 걸려 한일전을 안일하게 생각했다.
경기는 시작부터 김광현이 무너졌다. 이치로, 나카지마 히로유키, 아오키가 연타석 안타로 누상을 채웠고 우치카와 세이이치가 2루타를 날리며 순식간에 3-0으로 달아났다. 한국은 이어진 공격에서 김태균의 2점 홈런으로 만회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이후 일본은 오가사와라를 제외한 선발타자 모두 안타를 기록했다. 무라타 슈이치, 아베 신노스케까지 거포라 불리는 일본 선수들은 홈런을 때려내며 한국 마운드를 무참히 짓밟았다.
당시 김인식 감독은 “패자전에서 올라가는 방법도 있다. 점수가 벌어졌을 때 경기를 내줬다”라며 이미 마음을 비우고 지켜봤다는 발언을 했다. 하지만 여론이 좋지 못했다. 상대가 숙적 일본이고 불과 반년전 올림픽서 모든 면에서 압도한 상대였기 때문이다.
일본은 “프로 대 프로 대결 이후 최고의 쾌거”라며 한일전 대승에 대한 보도를 했다. 한편 2009 WBC서 한국은 일본과 총 5번 격돌해 2승 3패를 기록했다.
Did you know? 2006, 2009 WBC를 거치며 한국의 통산 패배는 4패다. 4번의 패배는 모두 일본에게 진 경기들이다.
[사진 = WBC 공인구 ⓒ KBO 제공]
서영원 기자 schneider1904@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