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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e Of Ace' 이대진, 다시 일어난다

기사입력 2007.06.29 21:58 / 기사수정 2007.06.29 21:58

박현철 기자

[엑스포츠뉴스=박현철 기자] 93년 혜성처럼 나타나 해태 타이거즈(KIA의 전신)의 에이스로 자리매김했던 이대진(33. 사진)의 이름은 타이거즈 팬들에게 애틋한 이름이다.

20살 갓 지난 어린 나이에 엄청난 구위로 수많은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웠던 이대진은 99년 부상 이후 지긋지긋한 부상과 재활의 길을 걸었고 타자 전향도 노렸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포스트 선동렬(삼성 라이온즈 감독)'로 불렸던 에이스의 오랜 공백에 팬들은 많은 아쉬움을 토해냈다.

93년 입단하자마자 10승 5패 2세이브 3.11의 뛰어난 성적을 기록한 이대진은 94년 7승으로 '2년차 징크스'를 겪긴 했으나 이듬해 14승을 따내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이전의 에이스 선동렬이 마무리로 이동하면서 생긴 에이스의 자리를 20살의 청년이 꿰찬 것이다.

선동렬이 주니치 드래곤스로 이적 한 이후에도 이대진은 제 몫을 충실히 했다. 96년 16승, 97년 17승을 거두며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이때는 이대진의 진흥고 후배였던 故 김상진이 등장하며 이대진의 자리를 물려받는 듯 했다.

98년부터 이대진에게 어려움이 찾아왔다. 모기업 해태가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선수단 전체가 어려운 와중에도 그는 10타자 연속 탈삼진이라는 대기록을 세우는 등 '에이스' 다운 모습을 보이며 고군분투, 12승(11패)을 올리며 팀의 가을 잔치 행을 위해 자신을 불살랐다.

프로 6년간 76승을 기록하며 선동렬이 가지고 있던 통산 146승을 넘는 것이 시간문제로 보였으나 안타깝게도 부상의 악령이 찾아왔다. 어깨 연골, 회전근, 근육막 모두가 손상됐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절친한 후배 김상진은 위암 말기 판정을 받고 그라운드에서 사라졌다.

99년 6월 10일 이대진이 어깨수술을 위해 미국으로 떠나던 날 공교롭게도 김상진은 병실에서 눈을 감았다. 김상진을 살리기 위해 어깨가 아픈 와중에도 백방으로 뛰어다니던 이대진은 그렇게 김상진을 가슴에 묻었다. 몸과 마음에 크나큰 상처를 입었던 이대진의 99년이었다.

2000년 김상진의 11번을 달고 타이거즈에 돌아 온 이대진은 얄팍해진 타이거즈 투수진에서 만능 활약을 펼쳤다. 마무리면 마무리, 선발이면 선발, 전방위 활약을 펼치며 8승 6패 13세이브(평균자책점 3.17)의 활약을 펼쳤지만 극심한 통증과 함께 어깨 부상이 다시 찾아왔다.

길고 긴 재활 끝에 이대진은 2002년 타자로 전향해 LG 트윈스의 마무리 이상훈을 상대로 3루타를 뽑아냈다. 그러나 오랫동안 타석에 서지 못했던 공백은 부진으로 이어졌고 결국 그는 다시 공을 잡았다.

2003년 4년만에 1승을 거두는데 성공했지만 다시 부상으로 쓰러져 긴 재활에 들어갔다. 2001년 이후 올 시즌 전까지 이대진이 올린 승수는 단 1승. 잇달은 부상에 '신세대 닥터 K'로 불리며 삼진을 뽑아내게 했던 무지막지한 구위는 점점 사라졌다.

올 시즌 3승 4패 평균자책점 4.54를 기록 중인 이대진의 성적은 예전 활약을 비교해 볼 때 아쉬움이 큰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마운드에 서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프로 무대 입단 전 이대진의 아버지 이재열 씨는 '타자가 된다면 역대 최고의 타자가 될 것이고 투수가 된다면 선동렬을 뛰어넘진 못할 것이다.'라고 얘기했다. 아직 그는 선동렬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 가장 큰 이유가 부상 때문이라면 조금은 억울하고 안타깝다. 지금은 그저 그가 마운드에 설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할 따름이다. 기나긴 부상의 질곡에 포기하지 않는 그에게 박수를 보낸다.    

<사진=KIA 타이거즈>



박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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