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츠뉴스 김현기 기자) 코로나19가 끝난 뒤 국제무대로 돌아온 북한 여자축구가 연령별 월드컵에서 연달아 우승트로피를 들어올리며 존재감을 톡톡히 과시하고 있다.
북한은 전통적으로 여자축구가 강하다. 그 중에서도 연령별 대표팀이 세계적인 강호로 두각을 나타낸지 오래다. 반면 이들이 성인대표팀으로 가면 기량이 쇠퇴해 성인 월드컵에선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올해는 20세 이하(U-20) 월드컵에 이어 17세 이하(U-17) 월드컵까지, 중남미에서 열린 두 대회에서 모두 정상에 올라 화제가 되고 있다.
북한 U-17 여자축구대표팀은 4일 도미니카공화국 산토도밍고의 에스타디오 올림피코 펠릭스 산체스에서 열린 2024 국제축구연맹(FIFA) U-17 여자 월드컵 결승에서 유럽 대표인 스페인과 전·후반 90분을 1-1로 비긴 뒤 연장전 없이 곧장 진행된 승부차기에서 4-3으로 이기고 우승트로피를 품었다.
3위는 잉글랜드를 3-0으로 완파한 미국이 차지했다. 한국은 이번 대회 본선에 올랐으나 조별리그에서 콜롬비아와 1-1로 비기고 스페인, 미국에 연달아 0-5로 대패하면서 8강 토너먼트 진출에 실패했다.
북한이 지난 2008년 창설된 U-17 여자월드컵에서 정상에 오르기는 이번이 3번째다. 2008년 뉴질랜드에서 열린 초대 대회 결승에서 미국을 연장 혈투 끝에 2-1로 이기고 챔피언이 된 북한은 8년 뒤인 2016년 요르단 대회에선 일본과 0-0으로 비기고 승부차기에서 이겨 웃었다.
다시 8년 만인 이번 도미니카공화국 대회 결승에서 스페인을 승부차기 끝에 꺾고 패권을 차지했다. 참고로 한국은 2010년 트리니다드 도바고 대회에서 스페인과 일본을 준결승과 결승에서 각각 제압하고 우승한 적이 있다. 당시 북한은 4위에 그쳤다.
여자 성인대표팀이 지난해 호주-뉴질랜드 여자월드컵에서 우승하는 기염을 토했던 스페인은 U-17 여자월드컵에선 2018년 우루과이 대회, 2022년 인도 대회에서 연달아 정상에 올랐으나 이번엔 북한을 넘지 못하고 3연패에 실패했다.
결승전은 지난 두 대회에서 정상에 올랐던 스페인이 기술과 전술에서의 우위를 앞세워 주도권을 쥐는 양상으로 전개됐다.
전반을 0-0으로 마친 북한은 후반 16분 상대에 선제골을 내줬다. 왼쪽 측면에서 파우 코멘다도르가 낮게 깐 크로스를 찔러 넣자 반대쪽 골대로 쇄도한 세구라가 왼발로 가볍게 밀어 넣어 골망을 흔들었다.
북한은 곧장 만회골을 터트렸다. 후반 19분 로운향의 긴 패스로 한 번에 스페인 수비라인을 무너트린 뒤 왼쪽 측면에서 중앙으로 질주한 전일청이 골키퍼를 제치고는 오른발 슈팅으로 골망을 출렁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북한은 골 세리머니를 3번이나 하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전일청 득점 직후 심판진은 비디오판독(VAR)으로 그의 오프사이드 여부를 따져봤는데 전일청의 발끝이 미세한 차이로 스페인 수비보다 뒤에 위치한 것으로 판정돼 골로 인정됐다. 그러자 스페인 벤치가 이전 볼 경합 상황에서 북한의 파울 여부를 놓고 VAR을 신청했다.
올해 U-20 여자월드컵, U-17 여자월드컵에선 각 팀도 VAR을 요청할 수 있다. FIFA가 이를 시험 채택했다.
심판진은 이 장면에서도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보고 북한의 득점을 인정했다. 북한은 하이파이브하며 한 골을 놓고 3번째 세리머니를 했다.
이후 후반전 종료 휘슬을 맞은 두 팀은 승부차기에 돌입했다. 스페인 두 번째 키커인 이리스 산티아고, 북한 두 번째 키커인 정복영의 슛을 각 팀 골키퍼가 나란히 막아내 1-1이 유지된 가운데 스페인 3번 키커 코멘다도르의 슛이 골대 왼쪽으로 흘러 나간 반면, 로운향은 정확하게 차 넣어 희비가 엇갈렸다.
결승전 결승포를 터트린 전일청은 대회 최우수선수에게 주는 골든볼을 수상했다. 북한에선 전일청 외에 4골을 넣어 득점 공동 2위에 오른 최림정, 지난달 콜롬비아에서 막 내린 U-20 여자월드컵에서 골든볼과 득점왕을 모두 거머쥔 최일선(2골) 등이 분전했다.
북한은 이번 대회에서 내로라하는 여자축구 강국들을 모두 물리치며 미래를 밝혔다. 조별리그에서 멕시코를 4-1, 케냐를 3-0, 잉글랜드를 4-0으로 연달아 대파한 북한은 8강과 준결승에서 폴란드와 미국을 각각 1-0으로 이긴 뒤 결승전까지 따냈다.
이번 우승으로 북한은 지난달 U-20 여자월드컵에 이어 U-17 여자월드컵까지 석권하며 여자축구 만큼은 세계적인 수준임을 다시 한 번 알렸다.
북한은 지난달 콜롬비아 U-20 여자월드컵에서도 조별리그 3경기는 물론 16강과 8강, 준결승, 결승까지 토너먼트 4경기도 모두 이기며 7전 전승으로 우승했다. 토너먼트에서 오스트리아, 브라질, 미국 일본을 연달아 물리쳤다.
북한 여자축구가 U-17 월드컵과 U-20 월드컵을 같은 해에 모두 우승하기는 지난 2016년 이후 올해가 두 번째다.
한편, 이날 우승 뒤 골키퍼 박주경은 "경애하는 아버지 김정은 원수께 제일 먼저 기쁜 소식을 알려 드리고 싶다. 행복하고 기뻐서 눈물밖에 안 난다"고 말했다. 송성권 북한 대표팀 감독은 "유럽 최강팀 스페인을 통쾌하게 이겼다. 아시아 최강팀이 세계 최강팀이 된 걸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기뻐했다.
지난달 북한 U-20 여자대표팀은 월드컵 우승 뒤 평양 시내에서 카퍼레이드를 했다. 이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그들을 만나 격려하기까지 했다. U-17 여자대표팀의 월드컵 우승에도 똑같은 대접이 주어질지 주목된다.
사진=연합뉴스
김현기 기자 spitfire@xports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