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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뮤직] 노장 선수들과 노장 밴드들

기사입력 2005.11.11 11:24 / 기사수정 2005.11.11 11:24

김광수 기자
 

  프로야구의 대표적인 프렌차이즈 스타인 송진우(한화), 양준혁(삼성), 이종범(기아)이 결국 원 소속팀과 FA 다년계약을 맺었다. 우리 나이로 송진우는 마흔이고, 양준혁이 서른일곱, 이종범이 서른여섯인데, 프로 선수로서 환갑진갑 다 지났다는 서른 중반을 훌쩍 넘기고도 철저한 자기관리로 젊은 선수들 못지않은 체력과 아직까지 다년계약을 이끌어낼 정도의 활약을 한다는 것이 대단할 따름이다.


  대중음악계에도 10년을 훌쩍 넘어 20년이 넘게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가수 혹은 밴드들이 즐비하다. 그 중에서도 두드러진 활동을 보이고 있는 세 팀인 산울림, 사랑과 평화, 부활을 소개할까 한다. 산울림은 지난 7월 데뷔 29주년 기념으로 컨필레이션 형식의 베스트 음반을 발표했고, 사랑과 평화 11월 1일 개최된 제 12회 대한민국예술상에서 연주보컬 그룹상을 수상하면서 건재함을 과시했다. 그리고 부활은 얼마 전 타이틀곡 ‘추억이면’이 담긴 10집 앨범 [서정]으로 인기몰이중이다.


  바람의 아들과 국내 최장수 밴드


  이종범과 산울림 사이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엄청난 센세이션을 몰고 왔다는 점과 공백기를 가진 후 복귀한 것. ‘바람의 아들’ 이종범이 데뷔 초부터 호쾌한 타격과 뛰어난 수비 능력 그리고 정확한 타격을 앞세워 센세이션을 일으켰다면 산울림은 1977년 데뷔곡 ‘아니 벌써’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종범이 일본으로 진출했다 국내로 U턴 했던 것처럼 산울림 역시 각각의 일로 밴드를 잠시 떠나있다 재결합한 비슷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산울림은 김창완, 창훈, 창익의 세 형제가 의기투합하여 결성된 그룹이다. 보통 음악과 연을 맺게 된 사연에 형의 영향을 받아서 음악을 시작하는 동생들이 많은데 산울림의 경우 둘째인 창훈이 고등학교 때부터 음악에 두각을 나타내 형인 창완이 영향을 받아 대학에서 기타를 배우고 이러한 두 형의 영향을 받아 드럼을 배운 사람이 막내 창익이었다.


  1977년 데뷔곡 ‘아니 벌써’를 발표한 산울림은 이종범처럼 무서운 신인으로 각종 매체에 회자되었고 대학축제마다 그들을 앞 다투어 초빙할 정도로 많은 인기를 끌었다. 1978년 이들은 2집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를 발표하여 TBC 가요대상(후에 KBS로 흡수)에서 중창부분 상을 수상하고, 문화체육관에서 콘서트를 개최하면서 서서히 팬층을 흡수해 갔다.


  1979년 창훈과 창익의 군입대로 밴드의 활동이 중단되었지만 미리 취입한 3장의 앨범으로 공백기를 메웠고, 창완은 이 기간 DJ로 활동을 하면서 좋은 음악적 밑거름을 쌓았다. 이러한 밑거름은 1981년 7집 [가지 마오]로 또 다시 중창부분을 수상하면서 건재함을 과시했다. 1983년 창훈과 창익이 각각의 전공을 살려 일반 회사에 입사하면서 10집 앨범을 내고 사실상의 해체 수순을 밟는다. 

  1985년 호평을 받아 무려 100일 간이나 앙코르 공연을 펼친 ‘꾸러기들의 굴뚝여행’을 끝으로 산울림의 공식 활동이 끝나자 모든 팬들은 해체라고 못을 박았지만 창완은 유독 활동 중단임을 강조했었다. 그 가운데 창완 혼자 11집과 12집을 발표했고 이후 10년이 훌쩍 넘어 산울림의 모든 팬들이 산울림을 잊으려 할 때 무려 14년 만에 타이틀곡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가 수록된 13집 앨범 [무지개]를 발표, ‘해체’에서 재결성이 아닌 ‘컴백’을 만천하에 알렸다.  그리고 얼마 전 7월에는 데뷔 29주년 기념음반인 [산울림 다시 듣기]도 발표했다.


  1999년 봄, 산울림의 헌정음반이 발표 되었다. 락의 대부인 신중현에 이어 두 번째 헌정앨범이었는데 산울림이 신중현 못지않은 대중음악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점이 인정된 점이라 하겠다.


  영원한 3할 타자와 슈퍼 그룹


  산울림이 대중성에 기반을 둔 그룹이라고 한다면 동시대에 활약했던 사랑과 평화는 철저한 실험 정신으로 무장된 그룹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기본적인 타격 자세를 버리고 자신만의 타법으로 프로야구를 평정한 양준혁처럼.


  사랑과 평화는 1978년 최이철, 김명곤, 이근수, 김태홍 4인으로 결성된 락 그룹이었다. 데뷔곡인 ‘한동안 뜸했었지’는 와우와우 뮤즈박스를 사용한 파격적인 연주스타일을 앞세워 단기간에 그들을 단숨에 슈퍼 스타로 격상시켰다. 1979년 2집 때에도 ‘장미’ 등을 발표해 그들은 탄탄대로를 걸을 것으로 보였으나 1980년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어 활동을 중단했다. 밴드의 멤버들은 각자의 길을 걸었으나 리더인 최이철의 밴드에 대한 고집으로 신중현과 엽전들에서 베이시스로 활약했던 이남이와 의기투합 밴드를 재결성하게 된다. 당시 여러 곡이 금지곡에 묶이는 탄압을 받으면서도 전통 타악기와 락을 접목시키며 이른바 한국적 락을 보급하는데 앞장섰고, 타악기 봉에 스위치를 달아 리듬에 맞춰 조명이 켜지고 꺼지는 것을 시도하는 등 그들의 실험 정신은 멤버가 교체되었어도 변함이 없었다.


  그것도 잠시. 얼마 못가 그룹이 해산되자 이남이는 고향에서 농사를 지었고 1983년 드럼 주자였던 김태홍이 사망, 사랑과 평화는 역사 속에 묻어질 것만 같았다. 밴드를 고집했던 최이철은 1987년 다시 이남이를 불러들여 한정호, 최태일, 이병일을 영입 7년만에 재기에 나선다. 7년만에 나선 밴드의 재기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뚜껑을 열어보니 결과는 대박이었다. 벙거지 모자에 콧수염을 길러 ‘울고 싶어라’를 열창하는 이남이는 많은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다른 멤버에 비해 이남이가 너무나도 많은 주목을 받자 여타 밴드처럼 갈등은 심화되었고 결국엔 이남이를 방출하기에 이른다. 성공한 재기였지만 이남이만이 성공한 반쪽짜리 성공에 리더인 최이철은 이철호, 이승수, 이병일, 안정현의 나머지 멤버와 새 멤버를 규합해 1990년 <샴푸의 요정>으로 반쪽자리 재기가 아닌 완전 재기에 성공한다.


  이후에도 해산과 재결성을 거쳤지만 크리스마스 앨범과 컴백 앨범을 내고 홍대 앞 클럽에서 왕성한 활동을 인정받아 얼마 전 11월에는 제 12회 대한민국연예예술상 시상식에서 연주밴드 부분을 수상했다. 이름값으로도 다른 선수들에게 귀감이 되는 양준혁처럼 사랑과 평화 역시 그 이름값만으로 한국 대중음악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조용한 신화와 부활


  부활은 방송매체에 얼굴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히트곡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마치 조용하면서도 각종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는 송진우처럼.


  락 팬들이 부활이라고 하면 생각하는 것이 보컬리스트였던 이승철과 데뷔곡 ‘희야’를 떠올리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부활은 1985년 디 엔드(The End)라는 이름으로 콘서트 위주의 활동을 벌이며 이미지를 쌓아오며 리더인 김태원과 이태윤, 황태순, 이지웅으로 구성된 4인 밴드로 출발했다. 초기에는 보컬이 김재기였으나 1집 ‘희야’가 수록된 앨범에서는 다운타운에서 수준급 보컬이었던 이승철을 영입 팀명도 부활로 바꾸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오버 데뷔부터 메탈을 좋아하지 않는 팬들까지 흡수하면서 돌풍을 일으킨 부활은 보컬리스트 이승철의 인기를 바탕으로 당시 락의 선두주자였던 들국화의 아성을 위협하는 존재로 급부상하게 된다. 특히 1986년 발매한 2집 <인형의 부활>을 발표하면서 차이콥스크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삽입하여 1970년대 초반 영국 등지에서 퀸(Queen) 등에 의해 인기를 끈 클레시컬 락(Classical Rock)을 표방하며 인기몰이를 이끌어 갔다.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보컬 이승철이 2집 활동을 솔로로 독립하자 이번엔 디 엔드 시절 보컬이었던 김재기가 팀에 합류했다. 그러나 3집 발매를 목전에 두고 보컬이었던 김재기가 사망하였고 팀의 존속여부에 큰 위기가 닥쳤다. 다행히 김재기의 동생이었던 김재희가 형의 뜻을 이어 보컬에 가담 무사히 3집 녹음을 마칠 수 있었고 타이틀 곡이었던 ‘사랑할수록’은 당시 서태지와 아이들을 누르고 차트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이후에도 부활은 김재희가 본격적인 보컬에 가담한 4집 <기억이 부르는 날에>를 발표했고 5집에는 폭발적인 가창력의 보컬인 박완규와 <불의 발견>을 8집 때는 이승철이 부활에 재가담하여 히트곡인 ‘Never Ending Story'가 담긴 <새, 벽>을 발표했으며 9집에는 1,000여명이 넘는 오디션을 통해 선발한 정단이 보컬로 참여한 를 발표, 타이틀곡 ‘아름다운 사실’로 인기몰이를 했다. 지난 7월에는 부활의 결성 20주년을 기념하며 낸 10집 앨범 <서정(抒情)>을 발표 보컬 정동하의 매력이 돋보인 타이틀곡 ‘추억이면’으로 또 다시 부활의 진가를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있다.


  부활이라고 하면 서정적인 락 밴드로 유명하다. 이들의 히트곡도 데뷔곡인 ‘비와 당신의 이야기’처럼 메탈적인 분위기의 곡보다는 ‘희야’, ‘사랑할수록’, ‘Never Ending Story', '아름다운 사실’들 서정적인 락 발라드의 곡이 더더욱 인기를 끌었다는 것이 그런 사실을 증명해준다. 부활은 팀의 명칭처럼 보컬이 자주 바뀌면서도 항상 화려한 부활을 했다. 현재도 그렇고 앞으로도 리더 김태원을 주축으로 한 부활의 활동을 기대해 본다.

사진출처 - 삼성라이온즈 홈페이지, 사랑과 평화 홈페이지, CD 쟈켓 스캔



김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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