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9.09.03 01:04 / 기사수정 2009.09.03 01:04
[엑스포츠뉴스] [풋볼코리아닷컴=최영민] 나는 내셔널리거 조원광이다. 1985년 8월 23일생이다.
축구를 시작하기에는 이른 나이인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 축구공을 잡았다. 1남 5녀의 막내인 나는 태권도며 축구며 안 해본 운동이 없다. 누나가 많은 탓에 성격이 혹 여성스러워지지 않을까 해서다. 좀 남자다운 성격을 만들어보고자 3학년 때부터 축구를 시작했다. 어머니는 처음엔 무척 반대하셨지만, 축구선수 출신인 아버지께서는 나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셨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축구를 하는데 적극적 지지를 보내주셨던 아버지의 권유로 축구를 시작한 지 1년 만에 독일 유학길에 올랐다. 이때는 뭐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정신없이 독일로 갔었던 것 같다. 독일의 FC 쾰른에서 생활하면서 그 나이 또래에게선 경험하지 못했던 것을 자주 보고 배웠다.
16살이 되던 해인 2001년, 남들은 한참 중학교에 다닐 시기에 나는 프로축구선수가 됐다. 안양이라는 팀에서 나를 좋게 봐주었고 조광래 감독님이 있는 안양팀에 들어가게 되었다. 최용수, 이영표, 최태욱, 정광민 등 2000년~2001년 당시 K-리그 최고의 스타들이 즐비했던 안양에 들어가니 모든 것들이 마냥 신기했다. 텔레비전으로만 보던 선수들이 나와 같은 유니폼을 입고 훈련을 하고 있다니 꿈만 같았다.
2004년, 프로선수가 된 지 만 3년 만에 나는 프랑스 1부리그에 진출하며 ‘유럽파’가 되었다. 프랑스의 FC 소쇼와 3년 6개월간 계약을 했고, 감독은 나에게 ‘한국의 앙리’라는 별명을 지어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소쇼와 계약을 맺기 전에는 PSV에인트호벤, 보르도, 산프레체 히로시마 등의 팀에서 제의를 받았다. 그 중 소쇼의 제의가 가장 만족할만한 수준이어서 소쇼를 택했다. 정말 행복했던 순간이 아닐 수 없다.
2004년은 프랑스 진출뿐만 아니라 청소년 대표팀에도 발탁되었던 해였다. 2000년부터 15세팀, 16세팀에서 뛰긴 했었지만, 다시 청소년 대표팀에 발탁된 것이다. 당시 팀 동료는 지금 왕성한 활동을 보인 박주영, 김승용, 백지훈 등의 선수들이다. 부산컵에서 만족할만한 활약을 보였지만 결국 나는 네덜란드에서 열린 U-20 월드컵에 참여하지 못했다.
2007년 소쇼와의 계약을 끝내고 국내로 돌아왔다. 이때에는 성인이 된 나의 결정이 큰 역할을 했다. 아버지와도 많이 상의를 나누었지만 결국 최종 결정권은 나에게 있었다. 인천 쪽에서 나를 데려가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결국, 인천 유나이티드에 둥지를 틀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 난 몸 상태가 경기에 나설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고, 당시 박이천 감독님도 나를 2군으로 보내 몸을 만들도록 하셨다. 나는 2007년에는 몸만들기에 주력했고, 2008년에서야 비로소 출전기회를 줬다. 2008년에 K-리그 4게임에 출장했다. 하지만, 더는 인천에서 나의 자리는 없었다.
2008년 시즌을 마치고 나는 인천에서 나왔다. 그리고 잠시 운동을 쉬었다. 하지만, 나를 찾는 곳은 있었다. 바로 하재훈 감독님이 올 시즌부터 감독이 되신 천안시청팀이다. 그동안 하재훈 감독님에 대한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셔널리그라는 편견이 있었지만, 감독님을 믿고 내셔널리그행을 결정했다. 천안축구센터를 숙소로 쓰고 있어 프로에서보다 운동하기도 좋은 환경이고 동료 선수들도 아주 좋아서 난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
난 25살의 조원광이다. 난 아직 젊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아직 움츠린 단계다. 이 움츠림은 곧 끝날 것이다. 내 축구인생의 전환점이 될 이 천안시청팀에서 나는 온 힘을 다해 나는 물론 소속팀에게도 좋은 결과를 안겨주고 싶다. 이제 ‘코리안 앙리’ 조원광은 없다. 단지 축구선수 조원광만이 있을 뿐이다.
최영민(ymchoi@footballcorea.com) / 사진 제공 = 내셔널리그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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