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9.04.05 19:59 / 기사수정 2009.04.05 19:59
[엑스포츠뉴스=전성호 기자] 4월 4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는 K-리그가 자랑하는 '빅매치'인 FC서울과 수원 삼성의 경기가 열렸다.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날 경기에는 3만 2천여 명이 경기장을 찾았고, 라이벌 팀 간의 경기답게 치열한 승부와 뜨거운 응원전이 펼쳐지며 축구팬들에게 기쁨을 줬다.
문제는 그 다음주에 있을 두 팀의 AFC 챔피언스리그 (이하 ACL) 일정이다. 수원은 4월 7일에 상하이 선화와, 서울은 4월 8일에 산둥 루넝과 경기가 있다. 전부 중국 원정경기다.
일단 양팀 모두 다음 일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과 수원 모두 무리할 수 없었고 전력도 낭비해선 안되었다. 그러나 패하기라도 하면 리그 최하위권으로 떨어지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라이벌전을 무승부로 만족할만한 두 팀이 아니었다. 양 팀은 총력전을 펼치며 승리를 향해 일촉즉발의 혈투를 벌였다.
이렇게 힘든 경기를 치른 두 팀이 과연 중국에서의 ACL 경기에 온전한 전력으로 임할 수 있을까? 차라리 두 팀의 경기를 ACL 일정의 영향이 비교적 작은 다른 날로 잡았으면 어땠을까? 연맹으로서는 늘 그랬듯이 이 두 팀의 '빅뱅'을 리그 초반에 잡아두어 K-리그 전체의 흥행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싶은 마음이었겠지만 그리 현명해 보이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4월 1일에는 북한과의 2010 남아공월드컵 예선까지 열렸다. 이 날 수원과 서울의 주전급 선수들이 각각 4명씩 대표팀에 선발되었고, 이중 4명이 북한전에 뛰었다. 나머지 4명도 이라크와의 평가전에서 뛰었다. 특히 기성용, 이청용은 20여일 동안 대표팀과 서울에서 무려 6경기를 뛰었다. 혹사 논란까지 피할 수 없을 지경이다. 최고의 경기가 양 팀 선수들의 최상의 몸 상태에서 이루어지지 못하는 건 본래의 취지를 상당 부분 깎아먹는다.
ACL 참가팀에 대한 배려가 필요한 K-리그
현재 K-리그 정규리그와 리그컵 대회의 일정은 연초 프로축구연맹이 주관하는 실무위원회에서 추첨 등의 방식으로 결정된다. 프로축구연맹은 ACL 조편성과 경기 일정이 나온 뒤 지난 1월 올 시즌 K-리그 및 컵대회 대진을 추첨을 통해 결정했다. 2009시즌 스케줄이 발표된 후, ACL에 출전하는 네 팀 관계자들은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특히 서울은 원정경기와 해외원정 경기가 뒤섞여 버리며 험난한 여정이 예상됐다. 수원, 울산 현대, 포항 스틸러스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지 어려운 일정임은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서울은 개막전 광양 원정에 이어 ACL 첫 경기를 인도네시아까지 다녀온 뒤 충격의 3연패를 당했다. 앞으로도 서울은 4월 4일에 치른 라이벌 수원과의 경기 뒤 4일 만에 중국 원정을 다녀오고 곧바로 4일 뒤에 경남 원정이 이어져 다시 한번 장거리 원정을 소화해야 한다. 5월에는 강팀 포항을 상대로 홈에서 경기를 갖고 곧바로 4일 뒤에 일본 원정을 떠난다. 그리고 곧바로 4일 뒤에 대전 원정이 있다. 체력 관리에 어려움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울산은 4월에 제주로의 원정경기 후 4일 뒤에 베이징 원정, 또 4일 뒤에 울산으로 내려와 홈경기가 있다. 5월에는 부산 원정 뒤 일본 원정을 치르고 다시 홈경기를 위해 울산으로 내려와야 한다.
수원과 포항은 비교적 좋은 일정표를 받아들었다. 그렇다고 무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포항은 3월 초에는 수원-호주-포항을 오가는 강행군을 거쳐야 했다. 특히 포항은 ACL 경기를 앞두고 수원, 울산, 서울을 모두 만나는 일정이다. 수원 역시 5월에 3일 간격을 놓고 강릉과 일본을 넘나드는 지옥의 원정길에 올라야 한다.
선수들은 컨디션 조절에 어려움이 많은 해외원정을 힘들어 한다. 일본이나 중국도 힘겨운 마당에 기후까지 다른 동남아시아나 호주 같은 장거리 원정은 모든 선수들의 기피 대상. 이런 와중에 지방 구단의 경우 홈경기를 치른 뒤 해외 원정을 다녀오고 곧바로 다시 홈경기를 치러야 할 경우 선수들의 체력이 당연히 바닥을 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수도권 구단도 지방 원정과 해외 원정이 겹칠 경우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는 곧바로 경기력에도 영향을 미쳐 ACL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고 국내리그에서도 부진하는 등의 악순환을 일으킬 수 있다. 경기장을 찾은 팬들에게 제대로 된 기량을 선보일 수 없게 되는 것 역시 프로스포츠로서의 큰 문제다.
인천공항 외에 해외로 나가는 다른 길 찾기가 쉽지 않은 국내 현실을 고려할 때 해외원정을 떠나는 구단은 해당 경기를 전후로 하는 일정에 대해 수도권에서 경기를 가질 수 있게 해주거나 휴식을 주었어야 한다. 그리고 가급적이면 ACL 진출팀 간의 경기를 해외 원정 직전에 잡는 것은 피하는 것 역시 좋았을 것이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 역시 지난해 2008/2009 프리미어리그 일정에 강한 불만을 나타낸 적이 있었다. 올 시즌 챔피언스리그 조별 리그 여섯 경기 후 모두 리그 원정 경기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이에 대해 맨유의 레전드 플레이어였던 패디 크레런드는 "다른 나라들은 유럽무대에 나가는 자국팀의 국내 리그 일정을 최선을 다해 배려해준다. 그러나 맨유는 잉글랜드를 대표해 해외 경기에 출전함에도 불구하고 리그 일정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 있다."라며 퍼거슨을 옹호했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수원, 서울, 울산, 포항은 K-리그를 대표해서 ACL에 출전하는 팀들이다. 최근 2년간 J리그의 ACL 2연패와 K-리그 팀들의 조기 예선 탈락을 통해 우리는 ACL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인식하고 있다. 또한 감바 오사카가 FIFA 클럽월드컵에서 맨유를 상대로 선전을 펼치던 것을 보며 우리가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ACL 진출권을 따내는 데 실패한 팀들은 그동안 국내에서 리그컵을 치른다. 그 애매한 성격 때문에 리그컵 대회는 진작부터 대부분의 팀이 1.5군을 투입하는 2류 대회로 전락했다. 유망주를 시험하거나 부상에서 돌아온 선수들의 컨디션을 조절할 수도 있다.
그러나 ACL에서는 그런 여유를 부리기 힘들다. 아시아 무대에 한국프로축구를 대표해 나간 팀들이기 때문이다. 했다가는 팬들의 거센 반발과 초라한 성적이 돌아올 수 있다. 최근 뉴캐슬 제츠와의 호주 원정에 1.5군을 투입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은 울산의 김호곤 감독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그렇게 ACL을 치르고 다른 K-리그 팀들을 원정경기 등에서 바로 상대하게 되면 제대로 된 경기를 펼치기도 쉽지 않다.
강원FC의 창단으로 15개 구단이 된 현 상황에서 한 팀은 무조건 해당 라운드 경기에서 휴식을 취해야 한다. 이런 혜택을 ACL에 참가하는 팀들에게 우선적으로 부여했다면 어땠을까? 리그컵도 개막하지 않은 때부터 강팀들은 지나친 혹사를 당하고 있었다.
다른 팀들과 형평성이 없는 너무 무리한 요구가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이는 전년도 상위팀에 대한 예우가 될 수 있다. 이 정도 '어드밴티지'도 없다면 'ACL 진출권 획득'이란 건 정말 말 그대로 진출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리그의 질적 향상을 위해서라도 각 팀들이 정규리그 상위권이나 FA컵 우승에 도전하려는 동기부여는 확실해야 한다.
ACL은 재정적으로나 인지도면으로나 K-리그 구단들이 욕심을 낼만한 대회다. 그러나 국내리그와 ACL을 동시에 제패하는 것이 어려운 상황을 만들어준다면 그 어느 팀도 선뜻 ACL에 동기를 부여하고 집중하기 힘들 것이다. 어차피 우승하기 어렵다면 괜히 나갔다가 손해만 보고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ACL 진출팀들이 좋은 성적을 거둘 리 만무하고 덩달아 K-리그의 위상까지 떨어지게 될 것이다.
리그 일정은 단순한 스케줄이 아닌 '마케팅의 도구'
월드컵 최종예선에서의 남북 대표팀 간의 빅매치 바로 뒤에 잇달아 서울-수원의 라이벌전이 열린 것도 문제다. 귀네슈 서울 감독 역시 "이처럼 열정적인 경기가 연속적으로 펼쳐지는 것은 한국 축구에 그다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대표팀 경기 직후 리그 팀들의 라이벌전은 팬들이 열정을 쏟아 붓는 데에도 힘이 부친다."라며 걱정스런 충고를 했다.
축구 경기 사이의 문제뿐 아니다. 4월 4일은 한국대표팀의 WBC 준우승으로 한껏 열기가 달아오른 프로야구의 개막일이었다. 프로야구와 대체제 관계에 있는 프로축구로서는 별로 달갑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이날은 서울-수원전을 비롯해 전북-성남, 울산-포항 등 지난 시즌 6강 진출팀 간의 맞대결로 일정이 꾸려졌다. 만약 프로축구연맹이 프로야구에 맞서 강팀들이 대격돌하는 것을 기획한 것이라면 차라리 프로야구 개막을 피해 다음주나 그 다음주를 노려봄직 했다.
결과적으로 이날 프로야구는 4개 구장이 동시 매진되는 기록적인 인기를 누렸지만, 같은 시간대에 열린 프로축구 5경기 중 서울과 전북의 홈경기를 제외하고는 기대보다 낮은 관중이 입장했다. 결국 '슈퍼 토요일'로까지 불릴 수 있던 강팀 간의 매치업은 프로야구 인기에 밀려 시들한 관심 속에 치러지고 말았다.
추석과 같은 명절을 즈음하여 열리는 경기 일정도 불만이 있기는 마찬가지다. 많은 이들이 고향으로 떠나는 이 시점에 다른 팀과의 대결보다는 지역 더비나 라이벌 팀간의 경기들을 성사시킨다면 흥행에서도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이는 유럽리그에서도 크리스마스 같은 명절을 전후해 주로 사용하는 방법이다. 4월 4일과 같은 정도의 대진이 추석 때쯤 벌어졌으면 어땠을까? 훨씬 주목도가 높았을 것이다.
올 시즌 초 전북 현대와 전남 드래곤즈의 '호남 더비'가 별도로 열렸는데, 차라리 추석마다 전북-전남, 대구-부산, 포항-울산, 서울-인천, 성남-수원 같은 지역 더비전이 열리는 것을 정례화한다면 더 자연스럽고 흥미로운 대결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이외에도 유연한 일정의 조절이 리그를 흥미롭게 할 수 있는 아이디어는 무궁무진할 것이다.
리그 일정을 짜는 작업은 신중해야 한다. 공정성을 위해 '추첨'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충분한 논의를 통해 경영전략적인 '배치'도 고려가 돼야 한다. ACL 참가팀이 좀 더 좋은 조건에서 리그와 ACL을 동시에 치르게 해주어 양쪽에서 모두 좋은 결과를 도출해내고, 덩달아 K-리그의 위상을 높일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
또한, 선수들이 경기장을 찾는 팬들에게 최상의 컨디션을 갖추고 최고의 축구를 보여줄 수 있게끔 해줘야 한다. 마케팅 면에서도 흥미를 유발시키고 극대화할 수 있는 일정을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듯 K-리그가 높은 경기력을 유지하고 그에 따른 상품성을 가지기 위해선 좀 더 세심하고 깊은 고찰을 수반한 작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전성호의 스카이박스] 대한민국 축구를 가장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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