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9.02.13 13:13 / 기사수정 2009.02.13 13:13
[엑스포츠뉴스=유진 기자] 칼 메이스의 저주, 블랙삭스 스캔들과 이에 대한 연장선상으로 볼 수 있는 피트 로즈의 도박사건 등은 메이저리그의 침체를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자성의 목소리가 일기에 충분했다.
특히, 도덕성에 큰 흠집을 받았다는 비판은 메이저리그로 하여금 판사출신을 커미셔너로 임명하는 등 자구책을 마련하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한다. 이러한 눈물겨운 노력 끝에 야구는 1927년 베이브 루스의 홈런 잔치 등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다시 한 번 더 흥행의 바람을 타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오랜 기간 사랑을 받아 왔던 메이저리그는 다시 한 번 더 불행한 결말을 맺는 사건으로 인하여 침체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렇다. 바로 '월드시리즈 개최'까지 취소되었던 메이저리그 총파업이 그러했다.
1994년 메이저리그 총파업
1994년,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높아진 선수들의 몸값을 억제하기 위한 고육책을 내놓는다. 이른바 샐러리캡(연봉 상한선)의 도입이 그것인데, 이는 NFL(미식축구리그)이 수익 구조를 총괄한다는 데에 착안한 것이었다. 메이저리그 선수협의회가 가만히 있지 않았던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구단은 구단대로 애로사항이 있었다. 구단 측은 천정부지로 치솟은 선수들의 연봉액수에 감당하기 힘들어 하고 있었고, 이로 인하여 샐러리캡 도입을 주장했던 것이다. 또한, 이는 특정 팀의 스타선수 싹쓸이를 방지하자는 의도도 있었다(예 : 뉴욕 양키스). 그러나 선수들 입장에선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할 것을 우려했다.
어찌되었건 최악의 상황을 막아보기 위해 미국의회와 클린턴 당시 대통령까지 중재에 나섰으나, 샐러리캡 도입의 절대 반대를 기조로 내 건 선수노조의 뜻을 꺾지는 못했다. 양측의 팽팽한 대립 끝에 선수노조는 파업을 결정했고 메이저리그 역대 최장기간인 232일간의 파업에 90년 만의 월드시리즈 무산이란 결과로 이어졌다. 이에 따른 피해가치는 현재 한화가치로 대략 30억 달러로 추산된다고 한다.
일부에서는 샐러리캡 도입을 반대한 선수노조 측에서 그 뜻을 끝까지 굽히지 않고 고집을 부린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샐러리캡 반대론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신의 가치를 돈으로 대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사용자 입장에서는 싼값으로 양질의 대어를 잡고자 하는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그것도 경쟁자가 있으면 해당 선수의 몸값이 올라가는 것은 자본주의의 당연한 순리라고도 이야기한다.
어쨌든 노-사 양측은 1981년에 선수노조 파업으로 한 차례 몸살을 앓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실수를 저지른 셈이었다. 1981년도에도 연봉상한선 제도가/부를 놓고 50일간의 줄다리기가 이어졌지만, 결국 양측 모두 2,400만 달러의 손해를 보고 나서야 ‘없었던 일’로 했던 전례가 있었다.
결국, 양측의 대립으로 인한 피해가치가 수십억 달러에 이르자 이번에도 1981년도와 마찬가지로 연봉 상한선제도에 대해 ‘없던 일’로 하기로 합의를 했다. 그러나 양자가 합의를 했건 안 했건 간에 이 사건을 계기로 메이저리그는 팬들의 신임을 잃어버렸고, 급기야는 미국인들이 선호하는 스포츠 설문조사에서 NBA에 밀려 3위에 머무르는 최악의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 때문인지, 최저 연봉 상한선 상승(30만 달러)을 골자로 했던 2003년 노-사 협상은 한때 파업 위기에도 몰렸지만, 양 측 모두 원만한 합의를 이루어내며 '유연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마이클 조던과 훌리오 프랑코
1994년 메이저리그 파업은 화재의 한 선수를 두 번 은퇴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바로 마이클 조던이다. 1993년, 아버지가 갱스터에 의해 어이없는 죽음을 맞자 그는 농구코트를 떠나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야구선수가 되었다. NBA 시카고 불스에서 뛰었던 그였던 만큼, 마이너 계약을 한 곳도 시카고였는데, 화이트삭스 산하 더블 A 버밍햄이 바로 그곳이었다.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조던은 화려한 농구코트에서와는 달리 초라한 성적표를 안게 되었고(0.202 AVG, 51 RBI, 30 SB, 114 SO), 때마침 파업이 발발하자 야구에 정이 떨어진 그는 다시 한 번 은퇴를 선언했다. 마이너의 눈물 젖은 햄버거를 몸소 먹었던 그는 버스로 구장을 이동하는 것이 불편하여 스스로 A급 관광버스 두 대를 구입하였는데, 한 대는 자신이 몸소 타고 다녔고 다른 한 대는 선수들에게 기증했다고 한다. 이후 1년 만에 구단을 떠난 마이클은 나머지 한 대의 버스마저 기증하며, 자신을 1년 동안 써 준데 대한 시카고에 감사인사를 표했다.
노장 선수의 대표주자로 불리는 훌리오 프랑코 역시 1994년 메이저리그 파업과 더불어서 미국땅을 떠났다. 선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자신이 머물 곳을 찾던 프랑코는 때마침 일본 롯데 마린스 감독으로 있던 바비 밸런타인의 부름을 받게 된다. 자신을 불러 준 일본 프로야구에 감사인사를 보낸 프랑코는 그 재주를 드러내어 골든 글러브까지 수상하는 영광을 안게 된다.
이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프랑코는 1996~1999년까지 ‘저니맨’으로 여러 구단을 전전하다 더 이상 받아주는 팀이 없자 한국야구에까지 문을 두드리게 된다. 삼성은 1991년 타격왕을 지낸 바 있던 42세의 노장 선수에게 섭섭지 않은 대우를 해 주었고, 그 재주에 보답이라도 하듯 프랑코는 0.327 AVG, 22HR, 110RBI를 기록하며 삼성맨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김재하 단장은 마흔셋을 맞이하는 이 노장 선수에 대한 믿음을 끝내 지켜낼 수 없었고, 시즌 종료와 더불어서 재계약을 못 한 프랑코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애틀랜타 등지에서 빼어난 대타실력을 과시했다.
어쨌든 메이저리그 파업으로 인하여 냉정해진 팬심을 돌려놓은 것이 바로 마크 맥과이어와 새미 소사의 홈런 레이스였다. 50~60개에 해당하는 홈런이 터지자 사람들은 환호했고, 이에 맥과이어는 시즌 70홈런으로 화답했다. 그러나 이러한 둘의 홈런 레이스는 또 다른 비극의 전초전이 된다는 사실을 인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랬다. 바로 최근에도 이슈가 되고 있는 약물 사건 때문이었다.
- 4부, '약물사건' 편에서 계속 -
[사진 = 버드 셀릭, 훌리오 프랑코 (C) 메이저리그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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