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최종편집일 2024-10-03 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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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인시대] 인천야구의 영원한 에이스, 인호봉을 만나다

기사입력 2009.01.07 09:38 / 기사수정 2009.01.07 09:38

유진 기자

[엑스포츠뉴스=유진 기자] “요즘 그분 뭐하면서 지내시지?”

오랜 기간 스포츠를 즐겨 보던 팬들은 은퇴한 선수들에 대해 위와 같은 궁금증을 가져봄직 하다. 특히, 프로야구 원년(1982년)부터 야구를 지켜본 팬들은 원년 멤버들에 대한 향수가 적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코칭스태프로서 현장을 지키지 못하고 다른 곳에서 완전히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선수들에 대한 궁금증은 한층 커질 수밖에 없다.

이에 ‘야인(野人 : 야구인) 시대’는 이러한 궁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하고자 프로야구계를 떠나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선수들을 찾아보는 데에 목적을 두었다. 물론 여기에는 프로야구 원년멤버를 포함하여 ‘짧지만 굵게’ 선수생활을 했던 ‘안타까웠던 야인’들도 포함했다.

그 첫 번째로 ‘인천야구의 영원한 에이스’인 前 삼미 슈퍼스타즈의 인호봉 선수를 만났다. 앞으로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 [편집자주]

▲ 인호봉 선수가 근무하는 인천 제일유리 제3공장. 유망 중소기업으로도 유명하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원년 에이스 인호봉. 이제는 선수가 아닌 ‘사장님’으로 한 중소기업체를 이끄는 중견인이 되어 있었다. 바쁜 시간 내어달라고 요청했을 때에는 미안한 마음이 컸지만, 인호봉 선수는 “오히려 찾아와줘서 고맙다”는 말로 대신했다.

Q : 왕년의 야구팬들은 인호봉 선수를 여전히 ‘인천의 에이스’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호봉(이하, '인'으로 표기) : 에이스는 에이스였죠. 그런데 프로 원년멤버들이 프로라기보다는 ‘세미프로’에 가까웠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당시 에이스에 대한 큰 의미는 없었다고 생각해요. 선수가 부족해서 제가 선발, 중간계투, 마무리를 모두 맡기도 했었죠. 당시에는 부족한 것이 정말 많았어요. 그래서 많은 것을 보여드리지 못해서 안타까운 마음도 있죠.

도깨비팀 삼미, 그리고 장명부

Q : 당시 삼미 슈퍼스타즈는 인천을 대표하는 팀으로 야심 차게 프로무대에 뛰어들었습니다. ‘내가 바라본 삼미’, 어떤 팀이었습니까?

인 : 한마디로 도깨비 팀이죠(웃음). 도깨비! 언론에서도 아마 그렇게 묘사가 됐을 거예요. 내가 봐도 도깨비 팀이었던걸요. 뭘. 하지만, 이기고자 하는 투지만큼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박현식 당시 감독님도 현역시절에 보이지 않는 실력자였기 때문에 출발은 상당히 야심 차게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Q : 1982년도까지 인호봉 선수 혼자 역투하다가 이듬해에는 ‘너구리’ 장명부 선수가 영입되었어요.

인 : 맞아요. 장명부 선수는 팀에서 단연 독보적인 존재였죠. 훌륭한 야구실력에 앞서 한국야구에 보이지 않는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장명부에 앞서 백인천/김영덕 두 감독께서 일본야구를 경험하셨지만, 현역 선수로써 활약하며 동료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재일교포 선수는 장명부가 유일하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 뒷이야기

Q : ‘삼미 슈퍼스타즈’와 빼놓을 수 없는 영화가 바로 ‘슈퍼스타 감사용’입니다. 이 영화 보신 이후의 감회가 남다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인 : 그 영화가 만들어지기 전에 먼저 스태프들을 만났었습니다. 그 분들이 이야기하시길 ‘인호봉씨를 주연(극중 류승수 분)으로 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제 생각에 저는 특별하게 잘한 것도 없고, 못한 것도 없었기 때문에 ‘나를 주연으로 놓으면 실패할 것’이라고 조언을 해 주었습니다. 조금 다른 방향으로 잡아가라고 했죠. 그리고 나서 두 번 정도 더 만났는데, 그때야 ‘슈퍼스타 감사용’으로 제목이 정해졌더군요. 그런데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슈퍼스타즈 감사용’ 으로 제목을 정했으면 했어요. 원래 삼미의 정식 팀명이 ‘슈퍼스타즈’ 였으니까요. 더욱 바람직하고 진솔하지 않겠느냐 싶었죠. 인천 야구팬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죠.

Q : 극중 나오는 ‘징크스’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속옷 징크스가 실제로도 있었습니까?

인 : 에이, 그건 과장된 거예요(웃음). 그런데 실제로 징크스가 몇 개 있기는 했죠. 그 중 하나가 선발 등판하는 날에는 절대로 계란을 먹지 않았어요. 또 손톱을 깎고 나가면 이상하게 좋지 않더라고요. 또 이건 다들 마찬가지겠지만, 장례차를 보고 나면 또 운이 좋아져서 그날 경기는 잘 풀렸어요. 

▲ 인호봉 선수는 인터뷰 내내 진솔하고도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속의 이야기를 꺼냈다.

현역시절의 추억

Q : 인호봉 선수는 프로에서도 독보적이었지만, 아마시절에도 만만치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를 뽑는다면요?

인 : 제가 원년에 참 힘들었던 것이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선발 - 중간계투 - 마무리까지 1인 3~4역을 하다보니까 체력에 한계가 왔었습니다. 제가 원년에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던 것도 이런 체력 문제에 기인한 바가 컸습니다. 부산 구덕구장에서 선발로 등판했는데도 불구하고 다음날 또 등판하고……. 그렇게 강행군을 하다 보니 다음날에는 기상을 못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제 머릿속에 생생하게 기억이 남는 경기는 삼성 라이온즈와의 원정에서 5:3 완투로 승리했던 경기였습니다. 당시 삼성은 투 - 타에서 초호화 맴버를 자랑하던 강팀 아니었습니까? 그런 팀을 상대로 완투했다는 것 자체가 영광이었습니다.

아마시절에는 봉황대기 선수권 대회(1976년)에서 40이닝 연속 무실점 기록을 세웠던 매 경기가 기억에 남습니다. 그런데 당시 4강전에서 연속이닝 무실점 기록이 깨졌습니다. 그때 상대가 선린 상고(현 선린 인터넷 고교)였거든요. 9이닝까지는 완봉으로 잘 막았습니다. 그런데 연장 10회에서 신군식(당시 7번 타자) 선수에게 솔로홈런을 맞았어요. 그때 그 순간이 절대 잊히지 않습니다. 그래도 40이닝 무실점이라는 기록을 세운 것에 만족해야 했죠.

은퇴, 그리고 제2의 인생

Q : 은퇴를 결심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면요?

인 : 지금도 후회하고 있는 부분이지만, 야구만 했지 정신적인 지주가 없었어요. 정신적으로 의지할 만한 선배가 계셨다면 아마 양승관 선수(인호봉 선수와는 동기)처럼 90년까지는 야구하지 않았나 싶어요. 실제로 빙그레(現 한화 이글스)나 OB(現 두산 베어스)로 이적해서 새로운 인생을 찾을까도 싶었지만, 그냥 미련없이 떠났습니다.

Q : 그런데 어떤 계기로 유리업계로 진출하게 되셨어요?

인 : 같은 원년멤버이었던 친구 장정기(前 삼미 내야수)의 소개로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친구 따라 강남간다고 하잖아요? (웃음) 현재 제일유리 전무로 저와 한솥밥을 먹고 있습니다.

Q : 그렇다면 회사 자랑을 간단하게 해주십시오

인 : 제일유리는 40년 역사를 자랑하는 우량 중소기업입니다. 거래처 역시 대기업들을 대상으로 하다 보니 기반이 탄탄하죠. 최근에는 경제 한파로 인하여 수주가 다소 떨어진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어려움 없이 잘 운영되고 있습니다.

Q : 아들(인진교 선수)도 야구를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내년부터 인천고교 소속으로 활약한다고 하는데, ‘야구동문선배 인호봉’의 눈으로 바라본 아들의 장/단점을 언급해 주신다면?

인 : 일단 열심히 하고 성실하다는 장점은 높이 사 주고 싶습니다. 그런데 근성이 약하다는 점은 다소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중학교 시절에는 내야수였는데, 내년부터는 감독 지도에 따라 투수로 활약할 것 같습니다. 뭐든지 근성만 가지고 한다면 훌륭한 선수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Q : 아들이 어떠한 선수로 성장하길 바라십니까?

인 : 일단 1차 목표를 프로구단 입문에 두고 열심히 했으면 좋겠어요. 아들이 투수로써 컨트롤 능력도 좋고, 훈련만 착실히 받는다면 빠른볼 구속도 140km/h 이상은 나오리라 보거든요. 사실 프로 스카우터들은 고교선수를 2학년 때부터 유심히 지켜봐요. 그래서 프로 입문 여부가 3학년이 아닌 2학년때 이미 판가름이 나죠. 그러니까 올해 1학년 때부터 열심히 해서 서서히 두각을 나타냈으면 해요.

▲ 인호봉 선수는 인천에서 뼈를 묻기를 바라는, 진정한 이 시대의 프랜차이즈 스타다.

내 사랑, 인천

Q : 미국에서도 거주하셨다는 소문이 있던데?

인 : (고개를 저으며) 사실이 아닙니다. 저도 그 소문을 들었는데, 알고 보니까 제 이름이 동료였던 임호균(前 삼미, 롯데)선배와 비슷해서 생긴 오해인 듯싶어요. 임호균 선배가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거든요. 그러다 보니 소문이 와전된 것 같아요.

Q : 인호봉 선수에게 ‘인천’이란 무엇입니까?

인 : 저는 정말로 인천을 좋아해요. 좋아하기 때문에 지금도 못 떠나고 있는 거죠. 또 제가 현역에 있었을 때에는 인천을 떠나서 야구 경기를 한다는 것을 생각지도 못했던 시절이었어요. 앞서 제가 빙그레나 OB에 입단할 마음이 있었음에도 차마 가지 못했던 것은 인천을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죠. 최근에는 트레이드나 FA시장을 통해서 많은 선수가 소속팀을 바꾸게 되는데, 그게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프로니까요. 프로에서는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이죠. 하지만, 저도 인천사람인지라 SK 프랜차이즈 스타가 다른 팀으로 이적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참 아쉬워요.

Q : 원년맴버로써 후배 야구선수들에게 한 말씀 해 주신다면요?

인 : 누구를 막론하고 선수들이 슬럼프나 딜레마에 빠졌을 때 자책하지 말고 최선을 다했으면 좋겠어요. 누구나 다! 최선을 다한 이후에 명예롭게 유니폼을 벗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해요. 저는 야구는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재능보다는 노력’이라는 말이 참 맞는 것 같아요. 그리고 끈기 있는 선수가 예쁘게 야구를 할 줄 아는 선수라고 생각해요.

[정리=엑스포츠뉴스 유진 기자]

※ 인호봉은 누구?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에서 주인공 감사용의 절친한 동료로 등장하여 일반인들에게도 친근한 존재였던 인호봉은 원년 삼미 슈퍼스타즈 부동의 에이스였다. 1976년 봉황대기 고교야구선수권 대회에서 40이닝 무실점 기록을 세운 것을 비롯하여(당시 우수투수상 수상) 같은 해 한일고교초청대회에 한국대표로 뽑히기도 했다.

프로 원년 38경기에 등판하여 무려 133이닝을 던졌던 인호봉은 1985년 은퇴 전까지 통산 방어율 6.03, 6승 12패 2세이브를 기록하였다. 팀 성적은 좋지 않았지만 항상 밝은 얼굴로 마운드에 올라 열심히 공을 던졌던 ‘프로 중의 프로’ 였다. 인천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야구생활의 시작과 끝을 맞았던 그는 진정한 인천의 프랜차이즈 스타이기도 하다. 아들(인진교)도 야구를 하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올해부터 인천고교 재학 예정이다.

'야인시대'는 독자 여러분과 함께 만들어가는 코너입니다. '은퇴한 야구선수의 근황'이 궁금하시다면 제보 부탁드립니다. 문의는 readers@xportsnews.com으로 [야인시대 제보]라는 제목으로 메일을 보내주시면 됩니다.



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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