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9.01.04 05:02 / 기사수정 2009.01.04 05:02
안녕하세요. 남기엽입니다. 새해 연초이지만, 주제는 최근 동향상 다소 무겁게 다룰 수밖에 없겠습니다.
'Smile Mask Syndrom'(스마일 마스크 증후군)
바로 현 K-1의 상황을 가장 잘 나타내는 병명입니다. 스마일 마스크 증후군은 겉으로는 웃지만 속으로는 울고 있고 심지어 우울해하며 상황이 매우 좋지 않을 때 발생하는 병입니다.
1. K-1 겉으로는 '대체로 만족'
얼마 전 일본에서 열린 'K-1 Dynamite!! 2008'이 성황리에 막을 내렸습니다. 이웃나라인 우리나라에서도 최홍만 선수가 출전하고 인기 선수인 크로캅, 마크 헌트, 바다 하리 등이 대거 출전해 많은 관심을 모았죠.
하지만, 평소에는 관심을 갖지 않다가 굵직한 이벤트가 있을 때만 챙겨보는 라이트(Light)팬들에게는 의문이 가는 점이 있습니다. 바로 메인 이벤트에 '사쿠라바 카즈시 vs 타무라 키요시'라는 잘 모르는 선수 둘이 붙는 카드가 배치돼 있기 때문이죠. 아니면 '둘 다 알긴 알겠는데 대체 이 선수들이왜 메인 카드냐'며 의문투성이인 분들도 있을 겁니다.
이건 순전히 시청률 때문입니다.
사쿠라바와 타무라는 예전 프로레슬링 U시절부터 끈끈한 라이벌 관계였습니다. 이 둘의 대전은 단순한 기량 이상의 스토리와 어떤 역사성을 내포하고 있었죠. 때문에 훌륭한 시청률 컨텐츠가 될 수 있었고 그래서 일본에서는 선수 소개 영상만 무려 9분에 달했습니다.
지금 이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닙니다. 요는 전성기를 훌쩍 지난 두 선수의 대전을 메인 카드로 배치할 만큼 K-1 측은 시청률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성적표를 받아들였습니다. 연말 이벤트 'K-1 Dynamite!! 2008'은 1부 시청률 민영 방송사 중 1위(11.8%), 2부 시청률 민영 방송사 중 2위(12.9%)를 기록했습니다. 타니가와 K-1 프로듀서는 "많은 선수들이 좋은 시합을 해줘 건투할 수 있었다고 본다"고 말했습니다.
주최 측은 '이 정도로 선전한 것은 선수들이 용기의 힘을 보여준 덕분'이라고 자평했습니다. 글쎄, 한 번 더 들여다 볼까요?
2 . 무리한 매치 메이킹, 도덕성 논란
이번 'K-1 Dynamite!! 2008'은 여러 면에서 숱한 화제를 뿌렸습니다. 그 중 단연 화제가 됐던 것은 바로 K-1의 신흥스타 바다 하리(네덜란드)가 알리스타 오브레임(네덜란드)과 입식 룰로 맞붙는다는 것이었지요. 이 소식은 격투 관련 웹을 뜨겁게 달구었습니다.
왜 이만큼 화제가 됐는가. 주지하다시피 하리는 12월 6일 열린 'K-1 월드 그랑프리 결승전'에서 본야스키에게 반칙을 범해 파이트 머니를 몰수당하고 타이틀을 박탈당했습니다. 그런 파이터가 한 달도 안 돼 복귀전을 치른다니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됐던 것이죠. 그럼에도, K-1 측은 강하게 밀어붙였습니다. 왜? 아까 말했다시피 '시청률'에 도움이 되니까. 그렇습니다. 연말 이벤트의 핵심은 오직 '시청률'입니다.
그런데 아직 문제가 남았습니다. 왜 하필 종합격투기 선수인 오브레임을 데려다 '입식룰'로 경기하게 하느냐는 말이죠. 그래도 세계 최고의 입식 무대라는 K-1에서 준우승을 거둔 자가 (나중에 상징적으로 박탈되긴 했습니다만) 종합격투기에서도 정상급 강자는 아닌 이와 입식 룰로 붙는다는 건 뻔한 게 아니냐는 겁니다. 솔직히 그렇습니다. 그 전에도 K-1은 '무사시 vs 무사시' '다케다 코조 vs 카와지리 타츠야' 등의 매치업으로 종합격투기 선수들을 데려다 입식 룰로 붙게 한다고 비판을 많이 받았죠.
그러나 여기까지 기자는 이해했습니다. 이건 연말 이벤트이고, 엔터테인먼트적 요소도 필요하니까.. 그렇다고 하리의 참전은 상식에 맞지 않았습니다. 이건 단체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덕률 위반'입니다.
차라리 타니가와 프로듀서가 '바다 하리에게 커다란 실망을 도저히 금할 수 없다. 그렇게 스탬핑 킥을 차며 종합격투기를 하고 싶다면 하게 해 주겠다. 오브레임과 MMA룰로 붙어라!' 고 쿨하게 말했다면 오히려 나았을 겁니다. 비판은 훨씬 더 사그러들었을 테고 하리의 반칙에 분노했던 팬들은 '기분 좋게' 그가 어떻게 당하는지 감상했을 수도 있습니다.
3 . 나와서는 안 될 결과, 위험으로 변한 기회
그렇습니다. 이미 인기스타 반열에 오른 하리에게 자신있는 입식 룰로 승부를 보게 해 자신감을 심어주고 시청률도 잡는다는 거죠. K-1은 이를 통해 하리와 자신들에게 닥친 Risk(위험)를 극복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중립적 의미의 Risk는 결국 부정적 의미의 Crisis(위기)로 변하고 맙니다. 하리가 무참히 패했던 것이죠. 그것도 오브레임에게 판정도 아닌 연속 다운으로 KO패합니다. 몸은 위축돼 있었고 첫 번째 다운을 당했을 때부터 리듬을 잃었습니다. 아니 압도당했다고 표현하는 게 올바르겠죠.
이 사실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리는 이미 K-1의 수많은 강자들을 제압한, 명실상부 '차세대 챔피언'입니다. 이미 K-1 헤비급 챔피언에 올라있기도 했고 루슬란 카라예프, 레이 세포, 글라우베 페이토자, 에롤 짐머맨을 전부 KO패 시켰죠. 가장 그가 빛났던 것은 '괴물' 세미 슐츠를 판정으로 꺾고 올라온 '레젼드' 피터 아츠를 KO패 시킨 일입니다. 이는 K-1에 있어 세대 교체를 알린 청신호탄이었고 그에게 K-1의 아이콘이라는 상징성이 녹아 들은 것도 바로 그 시점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종합격투기 선수에게 무참히 패했다는 것은 결코 개인 대 개인의 결과로 끝날 수 없습니다. 오브레임이 물론 종합격투기에서 타격으로 강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입식룰과 종합룰은 '이종'이기 때문이죠. 더군다나 비교 우위로 봐도 하리가 명백히 오브레임에 앞서는 것으로 이해됐습니다. 격투기 선수들이 어느 시점을 계기로 실력이 월등히 좋아진 것을 소위 '각성했다'고 부르는 데 바로 각성 전의 페이토자에게 오브레임은 입식 룰로 깨졌지만 각성 후의 페이토자를 하리는 여유있게 격파했기 때문입니다.
4 . K-1, 단체의 한계성이 도전받다
기자는 이 사건을 바다 하리 개인이 아닌 K-1 단체의 상징적 한계와 과제로 이해합니다. 이미 K-1에는 너무도 오랜 선수들이 아직도 자리를 굳건히 하고 있습니다. 십수 년 전에도 챔피언이었던 이들이 지금도 정상급에서 군림한다는 것은 스포츠계에서, 특히나 가장 격렬한 '투기' 종목에서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적어도 제대로 된 시스템을 갖추었다면 말이죠. '한두 명'이면 모르겠는데 너무도 많습니다.
피터 아츠, 제롬 르 밴너, 레이 세포 등의 선수들은 너무도 오래 K-1 결선 무대에 있어 왔습니다. 세포의 경우 요즘 하락세라고는 하지만 아츠와 밴너를 손쉽게 꺾을 수 있는 이는 별로 없습니다. 이번에 챔피언이 된 레미 본야스키 또한 이제 어느덧 중견 선수가 되었습니다. 은퇴한 어네스트 후스트는 한 번 은퇴했다가 다시 복귀했음에도 세계 4강에 진출했습니다. 엄청나게 빠르게 진화한 종합격투기와 달리 K-1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에롤 짐머맨, 구칸 사키, 루슬란 카라예프 등의 신인이 많이 발굴되었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보여준 실력은 예전 후스트나 아츠, 베르나르도가 신인으로 나왔을 때의 파급력에 한참, 정말 한참 못 미칩니다. 그런 신인들 중에 그나마 파괴력을 보여준 것이 바로 바다 하리였죠. 세미 슐츠라는 괴물이 등장해서 3년간 독식했는데 K-1은 간신히 이를 내쫓았습니다. 그를 내쫓은 것도 신진 세력이 아니라 K-1 원년멤버인 피터 아츠입니다. 누가 독식한다 싶으면 룰을 바꿉니다.
무엇 무엇은 못 하게 막아버리죠. 결국, 스타일은 바뀝니다. 누가 또 독주하면 또 룰을 바꾸고요. 결국 할 수 있는 선택지가 줄어들다 보니 스타일은 단조로워집니다. 때문에 과거 팬들이 열광했던 하이킥, 엑스킥, 일격 단발이 난무했던 K-1의 모습은 사라졌습니다. 지금은 대부분의 선수들이 일단
가드를 굳히고 기회를 노리다 펀치 연발로 KO를 노리는 모습이 잦습니다. 물론 화끈한 경기도 꽤 많이 있습니다만 전체로 놓고 보면 '이야기'는 대동소이합니다. 이러다 보니 팬들은 '이제 각 무도(Karate,Kickboxing, Kungfu) 중 최고를 가리는 K-1이 아니라 그냥 킥복싱 대회'라고 조소하고 어떤 팬은 'K-1의 실력이 예전만 못 하다'고 조심스레 비판의 목소리를 냅니다.
이런 타이밍에 강자들을 깨고 올라간 하리가 오브레임에게 KO패했습니다. 하리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 "연습도 별로 못 했고 동기부여도 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사실 이건 정말 웃긴 변명입니다. 오브레임 또한 오퍼를 받은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종합격투기 선수인 그가 입식 룰로 훈련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더군다나 후에 박탈되었지만 어찌되었건 간에 하리는 K-1 2008 월드그랑프리 준우승자이며 헤비급 챔피언입니다. 물이 오를 대로 오른 파이터라는 말입니다. 그런 그가 입식 룰로 오브레임에게 졌다는 것은 그 어떤 변명으로도 이해될 수 없습니다. 이건 마치 '쥬짓수 최강자' 호저 그레이시가 노게이라에게 쥬짓수로 지고 "훈련 별로 못 해서 졌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5 . K-1, 앞으로가 가장 문제
K-1은 앞으로가 가장 큰 문제입니다. 연말 이벤트에서 하리가 이렇게 무너진 이상 아무리 다른 K-1의 강자들을 제압해도 단체에 대한 신뢰는 쉽게 회복되지 않을 겁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명색이 K-1 월드 그랑프리 챔피언인 마크 헌트마저 자신보다 40kg 이상 가벼운 멜빈 마누프에게 18초 초살 KO패를 당했습니다. 비록 이 경기의 경우 헌트가 종합격투기로 전향했다거나 멜빈을 쉽게 보고 너무 들이댔다는 말들이 나올 수 있겠지만 결코 영향이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 역시 K-1 전 챔프라는 상징성이 있습니다. K-1 월드 그랑프리
2타임 준우승자인 무사시가 종합격투기 선수인 게가드 무사시에게 초살 KO패 당한 것도 마찬가지 맥락입니다.
이미 많은 격투 팬들은 PRIDE와 UFC 선수들의 대결 구도를 만들고 상징성 있는 선수가 타 단체 선수에게 패할 경우 그 단체 자체에 대한 불신을 보내왔습니다. 이건 어쩔 수 없습니다.
PRIDE가 무너진 뒤 UFC에 건너가 많은 선수가 패퇴했을 때 PRIDE 단체에 대한 많은 불신이 쏟아져 나왔죠. 반대의 경우도 물론 있었고요. 하지만, 지금은 이것과도 경우가 다릅니다. K-1이 '자신들이 입식에서만큼은 최강이다'라는 명제를 증명하지 못 하면 그들은 설 자리를 잃습니다. 기반이 없습니다. 종합격투기 선수들이 가끔씩 나와 K-1의 선수들을 격파하고 또 돌아가면 이게 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하리의 패배는 단순한 개인의 패배를 넘어 K-1이라는 단체에 대한 도전이자 그들이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
따라서 수년간, K-1을 아껴온 입장에서 애정어린 마음으로 제언(提言)합니다.
지금부터라도 선수 수급 시스템을 전면 개혁해 변화의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K-1의 길은 더 이상 그려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아울러 그 길이 지금이 몇몇 스타 선수에 대한 의존 행태와 불균형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K-1이 결코 웃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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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포츠뉴스 브랜드테마] '남기엽의 격투사담' / '순수, 열정, 자유로운 저널리즘' 랜디저널 남기엽 편집장이 풀어놓는 격투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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