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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제

[엑츠 모닝와이드] 돼지껍데기 굽는 '옛 파이터'의 이야기

기사입력 2008.06.30 04:05 / 기사수정 2008.06.30 04:05

조영준 기자

 Monday Sports Essay - 돼지껍데기 굽는 '옛 파이터'의 이야기

상대방을 직접 주먹과 발 등으로 가격하거나 관절을 꺾어서 제압하는 격투기야말로 가장 원시적이며 본능적인 스포츠 종목입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대중들은 보다 자극적이고 지루하지 않게 진행되는 스포츠 종목에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인간들의 본능적인 욕망을 자극시키며 한층 자극적인 느낌으로 빠른 시간 안에 승부를 결정짓는 이종격투기는 현시대를 대표하는 격투종목으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70년대와 80년대에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던 프로복싱은 박물관의 유물처럼 점점 대중들의 관심에서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10라운드, 혹은 12라운드동안 셀 수 없이 날아오는 펀치들을 피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상체를 움직이고 스텝으로 피해가면서 오직 두 주먹으로만 상대방을 가격하는 복싱은 이종격투기 비해 마라톤과 같은 종목입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만든 복싱영화의 걸작 ‘밀리언달러 베이비’를 보면 인생에 대한 엄숙과 애찬을 사각의 링에 고스란히 옮겨놓았습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서른이 넘은 늦깎이 여성복서는 시종일관 펀치를 허용하거나 상대방을 가격하면서 진행되는 복싱을 너무나도 사랑했고 링 위에서 당한 사고로 인해 목숨을 잃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선택 한 삶에 대해 일말의 후회를 남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린시절부터 천부적인 싸움꾼으로 성장한 왕년의 챔피언이 영화가 아닌 현실 속에 있었습니다. 강원도의 한 시골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시절부터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갔습니다. 어렵고 힘든 환경 속에서 성장한 그는 사각의 링을 만나면서부터 비로소 자신이 살아갈 삶을 찾게 되었습니다.

한국프로복싱 역사상 가장 터프한 인파이터라고 불려진 전 WBA 플라이급 챔피언 김태식(50)은 비록 짧은 기간동안 선수로 활약했지만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저돌적인 인파이팅으로 왕년의 팬들에게 가장 기억에 남고 있는 복서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복싱도 테크니션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어지는 경기인 만큼 수많은 기교파 복서들은 빠른 스텝과 적절한 아웃복싱을 구사해 되도록 펀치를 허용하지 않고 경기를 풀어갑니다. 그러나 김태식은 이러한 선수들과는 전혀 다른 선수였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후퇴란 존재치 않았습니다. 시종일관 상대를 몰아붙이며 끝장을 보고야 마는 경기스타일을 지닌 김태식은 자신의 주무기인 왼손 훅 한방을 치기위해 무수한 펀치를 허용했습니다.

차라리 강펀치 한방에 쓰러져 몇 초 동안 정신을 잃는 것이 고통이 덜합니다. 그러나 복싱을 보는 이들에게 잔인함과 카타르시스를 동시에 안겨다주는 장면은 수많은 펀치를 허용해 유혈이 낭자하고 얼굴이 부어오른 복서가 끝까지 쓰러지지 않고 상대방을 향해 돌진해 나가는 모습입니다.

김태식도 상대방을 쓰러트리기 위해서 수많은 펀치를 허용하며 상대방을 파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진 그의 삶 역시 언제나 이러한 방식이었습니다. 혹자들은 단순무식하다고 폄하할지 모르지만 계속 맞으면서도 끝끝내 왼손 훅 한방을 날리는데 성공한 근성은 결국 김태식을 ‘링 밖의 챔피언’으로 완성시켰습니다.

어릴 때부터 주먹 쓰는 것밖에 모르던 그는 은퇴 후, 연이어 이어진 사업 실패로 인해 왕년에 이룩한 챔피언의 영광은 바닥까지 추락했습니다. 너무나 단순하고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권투선수 출신인 김태식은 링 안에서 수많은 매를 허용한 것처럼 인생에서도 혹독한 쓴맛에 좌절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잘하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잔뜩 벼르고 있다가 순식간에 역전승을 위한 주무기인 왼손 훅이었습니다. 링 위에서 이 한방을 날리기 위해 그는 끝까지 좌절하지 않는 근성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인생의 종착역까지 다다른 그는 삶의 쾌쾌한 탄내가 나는 연기를 지속적으로 타오르게 했습니다. 돼지껍데기가 연탄불에 타는 냄새는 그가 링 위와 밖에서 겪은 쓰디쓴 탄내였을지도 모릅니다.

9년 동안 꾸준하게 돼지껍데기를 구우면서 그는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김태식 자신이 결코 떠날 수 없었던 사각의 링을 다시 찾았습니다. 오랜 시간동안 연탄불로 구운 돼지껍데기로 벌어들인 수입을 그는 권투를 위해 스스럼없이 투자했습니다.

링 위에서 갖은 고초를 경험한 전직 권투선수들은 자신들이 걸어온 삶과 복싱의 선택에 대해 후회하지 않고 있습니다. 왕년에 세계챔피언으로 이름을 날린 선수들 중, 비극적인 자살로 자신의 생을 스스로 마감한 김성준(전 WBC 라이트플라이급챔피언)을 비롯한 많은 전 챔피언들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세계챔피언으로 거둔 성공조차 탕진한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세살 물정을 모르고 단순했던 그들은 오히려 정글 같은 사회에서 좋은 먹잇감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장장 12라운드란 장거리 코스를 끈질기게 완주해온 잡초적인 근성과 인내심은 그들을 다시 링 위로 귀환하게 만들었습니다.

9년 동안 잠을 아끼면서 돼지껍데기를 구운 김태식은 작년 5월 달에 자신의 고향인 링으로 돌아왔습니다. 작년 경기도 부천에서 복싱체육관을 개관한 그는 이곳에서 미래의 챔피언들을 발굴하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링을 떠나 이것저것 해봤지만 정작 자신이 아는 거라곤 ‘복싱’밖에 없었다는 그의 사연은 스포츠가 일깨워주는 진정성과 치열한 경기를 통해 얻어지는 참맛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조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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