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8.05.22 17:11 / 기사수정 2008.05.22 17:11
[엑스포츠뉴스=장준영 기자] 22일 새벽(이하 한국시간) 모스크바에서 열린 ‘07-08 챔피언스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와 첼시의 결승전은 승부차기 끝에 맨유가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경기 종료 시각이 새벽 1시(현지시각)에 천연 잔디를 설치한 것은 불과 15일 전이었을 정도로 악조건이었던 이 날의 경기는 치열한 미드필더 싸움이 전개되었다.
양 팀 공격수들까지 적극적으로 수비에 가담해서 볼을 따냈고 역습 시에는 무섭게 몰아붙였다. 맨유 팬들에겐 믿었던 호나우도의 실축이 믿기지 않았을 것이고, 첼시 팬들에겐 믿었던 존 테리의 실축에 망연자실했을 것이다.
과정이야 어찌되었든 승부는 반 데사르의 선방에 힘입어 맨유의 승리로 끝났고, 맨유는 시즌 더블을 달성했다. 맨유의 많은 팬과 한국 사람들은 박지성의 결장이 못내 아쉽고 씁쓸한 승리였지만, 퍼거슨 감독의 입장에서는 맨유를 20년간 이끌며 쌓인 경기를 보는 혜안에 따른 조치였을 것이다.
강팀만 만나면 얌전했던 공격진
장기적인 리그에서는 공격력이 강한 팀이 우승컵을 안을 확률이 높지만 토너먼트에서는 단단한 수비력을 가진 팀이 우승할 확률이 높다는 것은 축구계의 정설이다. 올 시즌 맨유는 리그에서 가공할만한 득점력을 선보이며 2연패를 달성했다. 챔피언스리그 본선 토너먼트에서는 막강한 수비력을 선보이며 우승의 영광을 안았다.
그러나 주의 깊게 살피면 토너먼트에서만 수비를 강하게 한 것이 아니라 소위 EPL의 다른 빅4(아스날, 첼시, 리버풀)와 경기를 할 때도 수비를 강하게 하고 한 번에 역습을 성공시키는 공격을 선보이며 재미를 봤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호나우도는 올 시즌 최고의 선수라는 찬사가 무색할 만큼 침묵을 지켰다. 게다가 AS로마와의 챔피언스리그 8강전과 바르셀로나와의 4강전에서는 리그에서의 강력함을 보여주지 못했다.
퍼거슨 감독의 고심과 선택
호나우도가 여타 강팀과의 경기에서 자신의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점은 누구보다 퍼거슨 감독 본인이 더욱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는 호나우도의 실력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강팀일수록 상대에 대해서 더욱 철저히 연구해서 약점을 파고들게 마련이다. 그 과정에서 호나우도를 상대하는 수비수들에게 철저하게 그의 약점을 찾도록 했고 강팀들에 속해있는 세계 정상급 수비수들은 그것을 착실하게 이행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강팀을 상대하는 맨유는 다른 공격스타일을 찾아야 했고, 그때 꺼내들 수 있는 카드가 박지성이었다. 맨유의 어떤 누구보다 많이 뛰어다니며 볼을 따내고 공급하는 박지성의 플레이 스타일은 공격수라 하기에는 볼 배급력이 매우 뛰어나고 공격을 주도하는 미드필더라 하기에는 결정력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역으로 두 가지 역할을 다 해낼 수 있던 것이 사실이다.
AS로마와 바르셀로나는 박지성이라는 조커에 당했고, 박지성은 공격수로 상대방의 공격수를 막으면서 볼을 따내는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그러나 이것은 잉글랜드 외 팀에 해당하는 것이었고 맨유와 박지성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아는 첼시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조커가 필요했던 것이다.
하그리브스와 테베즈의 동시 선발 출전
리그는 꾸준하게 로테이션 시스템으로 돌아갔고 박지성 또한 그 로테이션 속에서 출전을 했다. 때문에 리그를 논외로 하고 챔피언스리그에만 초점을 맞추자면 박지성의 조커 기용은 대성공이었고 박지성은 팀을 결승으로 인도했다. 그러나 결승에서 맞붙는 첼시라는 상대는 분명 버겁고 껄끄러운 상대였고, 모스크바 경기장은 설상가상으로 첼시에 좋으면 좋은 환경이었지 맨유에는 결코 좋지 못한 환경이었다.
설치 한지 15일밖에 되지 않은 천연 잔디와 비가 내리는 경기장 상황은 선수들을 금방 지치게 하는 것이었고 상대적으로 첼시보다 파워가 떨어지는 맨유 미드필더진과 공격진은 어떻게든 파워를 끌어올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를 위해 준비한 카드가 테베즈와 하그리브스의 동시 선발 출전이었다. 이 카드는 전반전에 너무나 주효했다. 키는 작지만 발락(첼시)과 몸싸움을 벌여도 밀리지 않는 테베즈의 홀딩 능력과 미드필더로서의 몸싸움 능력을 뮌핸 시절 증명한 하그리브스는 첼시의 파워에 대항하기 위한 최적의 카드였다. 승부차기에서 남아 있던 선수가 키플레이어인 호나우도를 제외하고 테베즈와 하그리브스였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 한다.
명장이 알아챈 승부차기의 냄새
맨유와 첼시는 올 시즌을 승부차기로 열었다. 결과는 맨유의 승리였고 두 팀이 리그에서 맞붙었던 전례를 보더라도 점수가 많이 나는 경기는 없었다. 서로서로 너무나 잘 아는 이상 퍼거슨 감독은 승부차기에 갈 것을 예상하고 선발 라인업과 엔트리를 준비했을 것이다. 힘이 좋은 테베즈와 하그리브스가 미드필더 승부와 골문 앞에서 공간을 만들 동안 루니와 호나우도가 득점을 노리고 그것이 주요하면 오셔를 투입해 미드필더 압박을 강화하고 더 필요할 경우 대런 플레처까지 투입해서 미드필더 싸움을 붙일 심산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점이거나 실점을 할 경우 나니와 긱스를 투입해서 상황을 단번에 반전시키지는 못하더라도 박지성보다는 높은 득점력을 가진 그들에게 혹시나 하는 득점을 기대하면서 승부차기까지 갈 경우 키커로 사용하기 위한 준비를 했을 수도 있다. 또한, 안데르손은 스콜스를 대신해 공격형 미드필더나 루니를 대신해 쉐도우 스트라이커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챔피언스리그 8강전과 4강전을 상기해 보라고 한다면 그래서 박지성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에서라도 엔트리에 넣어야 한다고 했다면 플레처와 긱스를 기용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 둘은 모두 맨유 유스팀 출신으로 ‘퍼거슨의 아이들’이다. 예우와 정으로 따지자면 박지성보다 그들이 훨씬 더 후한 점수를 받을 수밖에 없다.
축구는 내용도 중요하지만 결과는 더 중요
2002년 한일 월드컵 16강전 한국과 이탈리아의 경기. 한국은 초반에 골을 허용하고 이를 따라잡기 위해 수비수들의 체력이 눈에 띄게 떨어졌었다. 게다가 공격을 주도하는 모습보다는 상대의 공격을 놓치며 득점 기회를 많이 허용했었다. 경기 종료를 앞둔 히딩크의 선택은 세 명의 교체카드를 모두 공격수 혹은 공격 성향의 선수로 쓰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한국에 승리라는 결과를 안겨다 주었고 무모해 보였던 경기 내용은 히딩크의 과감한 용병술로 탈바꿈했다. 필자는 오늘 MBC ESPN 생중계 현장에서 취재를 하면서 경기를 관전하였고 퍼거슨 감독의 선택에 대한 아쉬움의 기사도 작성했다. 하지만, 조금 더 냉정하게 본다면 퍼거슨 감독의 선택은 나름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물론 전반 이후 맨유가 보여준 경기력은 매우 좋지 못한 모습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승리를 했고 승부차기에서 교체해 들어간 선수들이 모두 성공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국인 축구 팬으로서는 박지성의 결정이 못내 아쉽지만 축구 팬으로서 퍼거슨 감독의 냉철함은 과연 명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부분이었다.
[사진=알렉스 퍼거슨 (C)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공식 홈페이지 (manut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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