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8.05.06 12:20 / 기사수정 2008.05.06 12:20
이들의 공통점은 성적과 개성 면에서 뚜렷한 인상을 남겼던 선수들이라는 점이다. 외국인 선수는 일단 외국인들이기 때문에 뚜렷한 성적이나 개성을 보이지 않으면 쉬이 기억되지 않기 때문에 기억에 남는 외국인 선수들은 그만큼 뚜렷한 족적을 남겨 놓은 선수들이라 할 수 있겠다. 이 말은 성적이 고만고만하거나 개성이 없는 선수들은 기억에 남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게다가 외국인 선수들은 성격도 좋아야 한다. 적극적으로 파이팅을 외치는 것은 좋지만 사고를 치고 다닌다면 안될 말이다. 때문에 감독들은 좋은 성적을 내주면서도 좋은 성격을 가진 반듯한 모범생 같은 외국인 선수들을 선호할 것이 분명하다.
서두가 길었다. 현재 한국에서 뛰는 외국인 선수 중 실력과 성격 면에서 검증된 선수가 있다. 그것도 4년째 마운드에 서고 있다. 두산베어스 맷 랜들이 그 주인공이다.
통산 41승 평균 자책점 3.13 (2008년 5월 3일까지 기록) - 역대 외국인 선수 투수 다승 2위
2004년 두산 레스가 17승으로 다승왕을 차지했다. 대다수의 외국인 선수들이 한국에서 성공하면 일본에 진출하는 전례를 지키기라도 하듯 한번 실패했던 레스는 다시 일본 무대에 진출했다. 하지만, 레스는 그냥 떠나지 않았다. 본인과 절친하다는 랜들을 소개해 주고 떠났다. 당시 두산에는 에이스 박명환이 있었지만 그 뒤를 받쳐줄 투수진이 강한 편은 아니었다. 여기에 가세한 랜들은 2선발로 첫 시즌 12승 7패 방어율 3.25를 기록하며 준수한 성적을 남겼다.
그해 전반기 종료 후 기아에서 퇴출 위기에 있던 리오스를 트레이드 해 오면서 두산은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두산은 비록 한국 시리즈에서 4전 전패를 당하면서 2위에 머물기는 했지만 내년시즌을 함께할 최고의 투수들을 갖춘 한해였다. 리오스와 랜들은 재계약을 맺었고 이듬해도 랜들은 리오스에 이어 2선발로 시즌을 맞았다. 기존의 에이스 박명환이 3선발로 시즌을 맞이했던 해였다.
랜들은 두산이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던 2006시즌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다. 16승 8패 방어율 2.95를 기록하며 한국 무대에 완전히 적응한 모습을 보였다. '두점 베어스'라는 오명 속에서 에이스 리오스가 방어율 2.90을 기록하고도 12승밖에 챙기지 못한 해였었음을 감안한다면, 행운도 랜들과 함께한 해라 할 수 있겠다. '괴물' 류현진의 등장으로 야구계가 술렁였던 해였지만 그해 랜들은 어느 팀 에이스도 부럽지 않을 성적을 남겼다.
리오스가 22승으로 한국 무대를 평정했던 2007시즌도 랜들은 12승 8패 방어율 3.12를 기록했다. 부상으로 시즌 중반 2군에 가기도 했고, 리오스의 선전으로 빛바랜 기록이긴 하지만 한국 진출 후 3년 연속 10승 이상을 기록한 해였다. 이처럼 매해 준수한 활약을 보여준 랜들은 리오스(통산 90승 방어율 3.01)에 이어 통산 용병투수 성적 2위를 기록하고 있다.
조용한 성격이지만 굴곡 있는 야구 인생-락밴드 했던 이력. 취미는 기타연주와 그림 그리기
1977년 미국 워싱턴주 뱅쿠버에서 출생한 랜들은 6세 때 야구를 시작했다. 대학리그 결승에서 9이닝 완봉승을 거두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지만 대학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랜들은 글러브를 벗었다. 이후 2년간 랙밴드 멤버로 활동하기도 했었지만 일본 스카우터의 권유로 일본무대에서 다시 공을 던지기 시작했다.
랜들은 일본에서는 주로 2군에서 활동했다. 일본 2군은 엄격한 합숙과 규율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에 자유로운 스케줄과 사생활을 중요시하는 랜들은 그것을 견디지 못했다. 다시 야구를 그만두고 미국에서 기타를 치고 그림을 그리며 여행하러 다녔다. 그리고 다시 찾아온 일본 스카우터에 의해 요미우리에 입단하게 된다. 요미우리 1군에서 평범한 성적을 기록했던 랜들이지만 요미우리는 평범한 선수는 필요 없던 팀이었던 터라 재계약 하지 못했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랜들은 당시 오프시즌에 미국으로 돌아가 있던 절친한 레스에게 두산을 소개받고 2005년 입단했다.
자유분방한 팀 분위기와 '외국인 선수도 한 식구'라는 두산이 맘에 들었던 랜들은 매해 호성적을 기록했고 올 시즌도 두산 마운드를 지키고 있다. 이렇게 자유분방하지만 차분한 성격의 랜들은 마운드 위에서도 빛을 발한다. 외국인 선수와 국내 투수를 통틀어 위기관리 능력이 가장 돋보이는 투수로 꼽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총 38차례의 실점 위기에서 안타와 볼넷을 각각 두 개밖에 허용하지 않았다. 또한, 올 시즌 득점권 피안타율이 1할3푼으로 규정 이닝을 소화한 투수들 중 3위에 올라있다. 랜들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 하나 더 있다. 홈 경기 방어율 3.57과 원정 경기 방어율 3.77이다. 차분한 성격을 가진 만큼 분위기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좌우 컨트롤과 의외성 투구 즐기는 컨트롤 투수. 주무기는 슬라이더
야구에서 투수가 기억에 남으려면 시즌 최고의 활약을 보이거나 파이어볼러여야 한다. 좋은 투수의 조건 중 첫째로 꼽히는 것이 제구력이지만 사람들의 뇌리에는 불 같은 강속구로 삼진을 잡아내는 장면이 더 강하게 기억된다. 랜들은 이런 점에서 재미는 없는 투수다. 랜들의 공은 여타 외국인 선수들과 비교해 빠르지 않다. 한국 투수들과 비교해도 그렇게 빠른 볼은 아니다. 마음먹고 직구를 뿌리면 150km를 가볍게 찍어 내지만 평균 구속은 140km 중반을 오간다.
대신 제구력에 좋고 변화구 구사능력이 뛰어나다. 네 가지 종류의 슬라이더를 구사하며 커브와 체인지업도 간간이 던진다. 주자가 없을 때는 마음 놓고 변화구를 구사하지만 주자가 루상에 있을 때에는 직구와 변화구로 아웃카운트를 잡고 좌우 스트라이크존에 살짝 걸치는 직구로 삼진을 잡아낸다.
랜들의 단점은 변화구 구사율이 높은 만큼 많은 이닝을 소화하지 못한다. 2006시즌 리오스가 99개의 공으로 9이닝을 마친 것과 비교해 랜들은 100개의 공을 던지고도 6이닝을 못 마친 경우가 많았다. 통산 완봉(완투)도 두 번밖에 없다. 하지만, 랜들의 투구는 언제나 의외성이 있었다. 직구의 구속 컨트롤과 좋은 변화구에 항상 달라지는 볼 배합은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고는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랜들 투구의 매력이다.
2005시즌 삼성과의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 랜들은 뇌리에 남을만한 투구를 선보였다. 비록 수비 실책으로 점수를 내주면서 무너지기는 했지만 삼성 타선을 상대로 매우 공격적인 피칭을 보여줬다. 기존과는 다르게 볼 카운트가 유리할 때에도 변화구로 유인해서 내야 땅볼이나 헛스윙을 유도하지 않고 좌우 직구로 코너워크를 구사하며 타자들을 돌려세웠다. 경기 결과만 보면 재미없는 투수지만 투수전을 즐기는 팬들이라면 진정 보는 맛이 있는 투수가 랜들이다.
기억에 오래 남으려면
랜들은 은퇴 후 스카우터나 코치, 감독이 되고픈 생각이 없다고 한다. 은퇴 후 음악을 하고 그림을 그리면서 살고 싶다고 할 정도로 자신이 즐기는 취미를 좋아한다. 20대 후반에 한국에 진출했던 랜들은 어느덧 30대 초반이다. 랜들의 성격을 고려해 본다면 한국에서 야구 생활을 끝내게 될 가능성이 농후해 보인다.
올 시즌 절친한 레스와 함께 두산 마운드를 지키고 있는 랜들이만 현재 한 달가량 진행된 패넌트 레이스 성적은 6경기 등판해서 1승 2패 방어율 3.66이다. 타선의 지원이 따라주지 못한 점도 있지만 한번 점수를 내주기 시작하면 계속해서 내주는 모습을 보였었다. 물론 랜들은 주간 경기 방어율 2.08과 야간 경기 방어율 5.52로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게다가 페넌트 레이스 특성상 주간 경기가 많지 않았음을 감안한다면 납득할 만한 성적이다.
매 시즌 랜들의 앞에는 에이스가 있었다. 그래도 랜들은 2선발로서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다했고 매년 10승 이상에 3점대 방어율을 기록한 준수한 투수다. 한국 역대 용병 투수 다승 2위 랜들이 좀 더 오래 기억에 남으려면 2등 하는 평범한 우등생보다 눈에 띄는 1등이 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2008시즌 두산의 에이스로 기대를 모았던 레스가 개인 가정사로 임의 탈퇴 되면서 기회는 왔다.
하지만, 끈질기고 길게 가는 것이 소리없이 강한 투수 랜들이 사는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올 시즌 랜들의 활약을 기대해 본다.
[사진=랜들 (두산 베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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