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5.10.31 08:00 / 기사수정 2015.10.31 01:13
(※ 아래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들이 밝혀져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영화감독 함춘수(정재영)와 화가 윤희정(김민희)은 화성행궁 복내당에서 처음 만난다. ‘복은 안으로부터 생겨난다’는 뜻의 복내(福內). 두 사람 다 이곳이 예뻐서 잠시 머물던 참이다. 다른 관광객들은 사진을 찍고 금세 발길을 옮기는 곳에서, 둘은 툇마루에 앉아 나른하게 볕을 음미한다.
어찌 보면 함춘수는 마치 고궁이나 유원지와 비슷한 인물이다. 사람들이 수원화성에 가보지 않아도 수원화성을 이미 아는 것처럼, 함춘수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감독이다. 박물관에서 열릴 특별전에서 낯모르는 여러 사람들과 포즈를 취하며 사진에 찍힐 가능성도 높다. 함춘수는 지금 ‘보여 지는 사람’이다.
반면에 윤희정은 그때 ‘보여 지던 사람’이다. 자신과 이미지 사이의 불일치에 공허함을 느껴 모델 일을 그만두고, 지금은 그림을 그린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작업을 하지 않으면 왠지 자신이 무너질 것 같다며, 삶의 뼈대를 세우는 일에 골몰한다. 윤희정은 ‘있는 그대로’ 세상과 자신을 보려고 노력중이다.
함춘수와 윤희정은 타인이 바라보는 자신의 이미지에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하지만 둘 사이엔 차이점이 있다. 첫째로는 ‘그때’와 ‘지금’으로 시간의 간격이 존재한다. 함춘수는 지금, 윤희정은 그때. 둘째로는 덧입혀진 이미지가 한쪽은 의미의 과잉(명성, 루머)으로, 한쪽은 의미의 과소(사진이라는 표면)로 대비된다. 함춘수는 깎여나가야 하고, 윤희정은 채워나가야 한다.
그래서 두 사람이 ‘복은 안으로부터 생겨난다’는 복내당(福內堂)에서 만난 건 우연이 아니다. ‘안으로부터’는 두 사람의 예술적 모토다. 함춘수는 관광객을 피해 행궁 안을 떠돌다가 다시 복내당으로 ‘돌아와서’, 자신의 그때와 비슷한 외로운 예술가 윤희정을 만나게 된다. 복내당은 1부와 2부가 회귀하는 지점이면서, 동시에 함춘수가 자신의 ‘안으로 돌아가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함춘수에게 윤희정은 매력적인 거울이다.
상투성과 용기
윤희정의 화실은 1부와 2부의 다름이 뚜렷하게 체감되는 분기점이다. 함춘수는 윤희정의 그림을 보고 두 번의 평가를 한다. 1부에서는 예민한 지각과 감각으로 ‘어려운 길’을 가는 용기를 칭찬하고, 2부에서는 자기연민에 빠져 ‘상투적인 길’을 가는 용기 없음을 지적한다. 엉뚱하리만치 상반된 평가다.
표면적으로 1부의 칭찬이 윤희정의 환심을 사려는 상투적 표현이라면, 2부의 지적은 함춘수의 솔직함을 보여주는 용감한 표현이다. 용기와 상투성의 이상한 자리바꿈. 1부의 상투적인 함춘수가 윤희정의 그림에서 용기를 볼 때, 2부의 솔직한 함춘수는 윤희정의 그림에서 상투성을 본다. 어떤 면에서 윤희정의 캔버스는 서로 다른 세계의 함춘수를 비추는 거울의 역할을 한다. 1부의 칭찬은 2부의 함춘수에게, 2부의 지적은 1부의 함춘수에게 가 닿는다. 두 세계를 잇는 캔버스라는 스크린.
관객은 용기와 상투성이라는 두 기둥을 맴돌면서 1부와 2부를 비교하게 된다. 1부의 상대적으로 상투적인 함춘수는 ‘자기 영화에 대한 평가’를 윤희정의 그림에 그대로 반복한다. 복사해서 옮겨 붙이기.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자주 남의 말을 자기 말인 냥 가져다 쓴다. <우리 선희>에서 ‘파고, 파고, 또 파고, 끝까지 파다보면...’이 인물들 사이에서 반복되던 걸 떠올려보라. 특정한 단어나 문장들이 ‘관계의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거의 ‘화폐’처럼 쓰인다. 의미가 누락된 형식. 이렇게 형식만 남은 것을 우리는 ‘상투적’이라고 부른다.
‘상투적인 것에 대한 저항’은 홍상수 감독의 인터뷰에서 자주 거론된다. 그렇지만 정작 홍상수의 영화 속 인물들은 상투적이라기 보단 특이한 부류로 느껴진다는 아이러니가 있다. 이들의 대사와 행동이 너무 생생해서 전혀 상투적으로 보이질 않는 다. 게다가 우리가 가진 상투성의 기준이 상당히 낮은 편이어서, 정치인이나 종교지도자 같은 판에 박힌 말을 거듭하는 소수의 앵무새들에게만 ‘상투적’이라는 표현을 아껴 쓴다. 그래서 관객은 홍상수가 싸워나가는 상투성의 전선(戰線)이 어디인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는 이런 상투성의 면모들을 좀 더 밝혀준다. 함춘수는 지금 자기복제에 빠져 있다. 어떤 말과 행동이 상대방에게 얼마나 힘을 발휘하는지를 자각하면서, 그 행위를 의도적으로 반복한다. 감정의 급소를 기계적으로 공략하는 것. 바람둥이는 대상과 무관하게 동일한 연애수법을 반복하는 족속이다.
함춘수가 바람둥이라는 소문은 진위여부와 상관없이 그가 상투성의 경계위에서 위태로운 상태임을 말해준다. 때문에 함춘수가 관객과의 대화에서 평론가에게 ‘말의 힘’을 부정하며 ‘중요한 말’ 같은 건 없다고 소리 지를 때, 이보다 더한 자기부정은 없다. 1부에서의 윤희정에 대한 칭찬이나, 염보라(고아성)에게 작별인사를 하며 건넨 말(매 순간순간 매일매일 발견하려고 한 번 해보세요)은 자기복제에 근거한 레퍼토리에 불과하다.
시인과 농부
2부에서 좀 더 솔직해진 함춘수가 겪는 상황은 홍상수의 영화에서 이례적인 순간들이다. 특히 2부의 끝에서 윤희정과 함춘수가 느끼는 감정의 충만함은 다소 놀랍기까지 하다. 말과 행동이 어긋나고, 주어를 잃은 문장들이 사람들 사이를 떠도는 부정합의 세계야 말로 ‘홍상수적인’ 것인데, 두 인물은 감정을 완전연소 시키면서 색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 솔직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인간은 ‘오늘부터 솔직해지겠다’라는 각오나 다짐만으로는 솔직해지지 않는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는 ‘시인과 농부’라는 구체성을 띈 두 가지 길을 통해 솔직함에 다가선다.
1부의 끝에서 함춘수는 주영실(서영화)에게 시집을 선물 받는다. 그 속지에는 ‘우리의 삶의 표면에 숨겨진 것들의 발견만이 우리의 두려움을 이겨내는 길’이라고 적혀 있다. 이 문장을 편의적으로 나눠서 따져보면, ‘삶의 표면’은 상투성에 연결하고 ‘두려움을 이겨내는 길’은 용기에 연결해 볼 수 있다. 그러면 ‘숨겨진 것들의 발견’이란 매개항이 남는데, 이것은 시인의 자질을 이해하는 키워드로 손색이 없다.
여기서 함춘수와 이름이 같은 김춘수의 시를 예로 들어보자. ‘꽃’의 유명한 구절.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바로 앞 구절에는 꽃이 된 그가 원래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음이 밝혀져 있다. 간략히 말하자면 시인은 ‘몸짓’에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꽃’이라는 존재로 활짝 피워낸다. 이름을 부여하기. 시인들은 미지의 감정들을 탐험하면서 시어들로 그것들을 잠시 붙들어 놓는다. 이제까지 설명된 적 없는 감정들의 ‘그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주는 것. 알맞게, 최대한 근사치로.
그래서 솔직함이란 시인의 태도로 자신의 감정에 ‘알맞은’ 단어들을 찾아내려는 노력이 된다. 이제 여기에 ‘농부’의 겹이 추가된다. 농부의 성실성. 윤희정은 모델 일을 그만 둔 경위를 설명하면서, 자기 삶에서 루틴(routine)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녀에게 루틴은 일상의 반복이라기보다 ‘살면서 느끼는 것들을 매일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데서 오는 쾌감’에 가깝다. 마치 농부가 그의 작물들의 생육을 매일 확인하는 데서 오는 기쁨처럼. 이렇듯 솔직함은 자기감정의 면밀한 관찰자와 기록자가 될 때 얻어진다. 그래서 루틴이라는 이 반복은 함춘수의 ‘자기복제’와 반대편에 서 게 된다. 복제의 반복과 성실성의 반복.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그런데 이 솔직함의 두 경로는 다분히 자기 충족적이다. 시인과 농부의 자질로 우리의 솔직함이 충전되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술집 ‘시인과 농부’에서 함춘수는 느닷없이 홀딱 발가벗는다. 이 기행(奇行)은 안으로부터의 솔직함이 타인들의 상투성과 부딪치는 장면이다. 자신의 상투성을 겨우 다스리더라도 세상의 상투성은 온전히 남아 있다. 방수영(최화정)은 소문의 틀로 함춘수를 보고, 주영실은 명성의 틀로 본다. 이 틀에 답답함을 느낀 함춘수의 응답, 벌거숭이 되기.
벌거숭이 되기는 ‘미치광이’라는 후폭풍을 몰고 온다. 솔직해진다는 것의 위험성. 하지만 이 위험성의 길이 뚫리지 않으면, ‘안으로부터’ 자기를 채워나가는 이 루틴은 ‘자기연민’과 ‘자기위안’으로 물러나기 십상이다. 함춘수의 말대로 우리는 상투적인 것으로부터 위안을 받는다. 게다가 상투적인 것은 편하기까지 하다. 예술가들이 곧잘 매너리즘에 빠지듯이. 그러면 위험을 감수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1부의 화실에서 함춘수는 ‘모르고 나아가는 것. 순수하게 자기의 지각과 감각에 의존해서 나아가는 것. 예민하고 용기 있게’ 라며 이 위험한 길의 세부를 밝힌다.
위 문장은 우리에게 홍상수 감독의 작업방식을 떠올리게 만든다. 당일 촬영분에 대한 시나리오를 그날 아침에 쓰는 것. ‘우연성에 몸을 내맡기는 이 모험’은 거의 만용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저런 틀의 압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이 예술가의 책략은 17개의 영화를, 성실함과 솔직함을 갖춘 이 영화들을 만들어낸다. 만드는 방식과 만들어진 것 사이의 이음매 없는 일관성. 우연한 것들의 침범을 향해 활짝 열려 있는 홍상수의 영화들은, 덕분에 무엇으로 규정될 수 없는 무정형의 힘을 보유한다.
2부의 끝. 윤희정은 함춘수의 영화를 보기 위해 박물관에 온다. 이쯤에 이르면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는 서로에게 관객이 되어주는 두 예술가의 이야기가 된다. 캔버스와 스크린은 서로에게 떠나는 먼 여행의 입구다. 두 사람은 그 안에서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지만 결국에는 하나인 보물을 발견할 것이다. 무명의 화가에게 과감해질 것을 조언하는 영화감독, 유명세에 휘둘린 영화감독에게 루틴의 힘을 보여주는 화가. 단 하루의 만남에서 둘은 서로에게 선물이 된다. 물론 이 선물은 하루로부터 오지 않는다. 가려 뽑아진 이 특별한 두 하루는,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이 합쳐질 때 ‘시야’가 완성되는 것처럼 그렇게 존재한다. 어쩌면 이 목적은 단순하다. 그저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서니까.
nivrit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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