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츠뉴스=나유리 기자] 김원섭(37,KIA)은 감초 같은 선수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했다. '슈퍼 스타'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없으면 섭섭한, 있으면 귀중한 그의 역할을 정확히 짚어내는 바람이기도 하다.
프로 15년차. 입단 동기 중에서도 대부분의 숫자가 야구를 스스로 포기했거나 더이상 현역 생활을 할 수 없는 연차다. 하지만 김원섭은 여전히 팀이 가장 필요로하는 그 위치에서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김원섭'이라는 이름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6년부터다.
"전환점이었다. 기회를 못 받다가 2006년부터 본격적으로 1군 경기를 뛰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나는 성적을 내는게 목표가 아니었다. 그냥 1군에 붙어있는게 목표였다. 대주자든, 대수비든 1군에 있을 수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다행히도 전반기 내내 2군에 가지 않았다. 후반기부터 본격적인 기회가 찾아왔다. 이종범 선배가 엔트리에서 빠졌고, (심)재학이형도 코뼈가 부러져서 엔트리에서 빠졌다. 내게 기회가 드디어 왔다. 4타수 4안타. 3타수 3안타. 7~8연타석 안타를 쳤다. 처음에는 우완 투수가 나올 때만 출전했다가 그 다음부터는 왼손, 오른손 구분 없이 나갔다. 그게 시작이었다."
-하지만 2007년에는 114경기 2할4푼3리로 성적이 좋지 못했다.
"허접질(웃음)을 한 것 같다. 경기를 많이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타율이 좋지 못했다. 그러던 중 조범현 감독님이 취임한 후 박흥식 코치님과 궁합이 잘 맞았다. 코치님과 마무리 캠프부터 미친듯이 연습을 했다. 개인적으로도 남아서 밤까지 연습을 했다. 어느날 박 코치님이 내게 언질을 주셨다. '감독님이 널 2번 타자로 생각하고 계신다. 열심히 해라.' 정말 미친듯이 열심히 준비했다."
-일생일대의 기회를 눈 앞에 둔 상황에서 어떤 준비를 했나.
"2007년에. 마무리 캠프때 열심히 운동을한게 너무나 아까웠다. 12월이 휴식기인데 그 시간이 가는 것조차도 아까웠다. 타격 페이스가 좋았던 것을 잊고 싶지 않은데 방법이 없더라. 불안했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는데 광주 용봉동에 가면 500원짜리 야구 배팅 연습장이 있다(웃음). 그때 기계가 좋았다. 고수가 치는 칸이 있는데 왠만큼 칠만 하더라(웃음). 그래서 매일 2만원씩 잔돈을 들고 그곳에 갔다. 목장갑을 끼고 알류미늄 배트로 계속 공을 쳤다. 땀이 바가지로 흐른다. 그냥 자세와 감을 잃지 않으려고 쳤다. 우연치 않게 그게 더 큰 기회로 연결 됐다."
-어떤 기회?
"내가 공을 치고 있던 때였다. 백인호 코치님이 술 한잔 드시고 지나가다가 나를 보셨다. 자기 딴에는 '일반인이 왜 저렇게 잘치지?' 싶어서 유심히 봤더니 나였던거다. 다음날부터 구단에 소문이 퍼졌다. 원섭이가 그 겨울에 연습장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배팅을 하고있더라면서(웃음). 사실 잘보이려고 했던 것은 아닌데 그렇게 됐다(웃음)."
-결국 기회를 스스로 잡은 셈이다.
"연습을 열심히 한 덕분인지 그 해에 잘 풀렸다. 2008년에 처음으로 타율 3할을 쳤다. 한번 치니까 2009년에도 잘 풀렸고, 팀도 잘 나갔다. 분위기에 휩쓸려서 우승도 했고, 나의 페이스도 좋았다. 하지만 모든 일이 잘 풀리지는 않더라. 2009년부터 잔부상이 찾아왔다."
-간염 진단을 처음 받은 것도 2009년인데.
"처음에는 햄스트링이 원인이었다. 허벅지 부근이 좋지 않아서 병원에서 검사를 했는데 간수치가 올라갔다고 하더라. 전혀 문제가 없다가 갑자기 진단을 받아서 입원을 했다. 잘됐다. 차라리 쉬자 싶었다. 그랬더니 허리가 아프기 시작하더라. MRI를 찍어보니 허리 디스크였다. 절망스러웠다. 그런 와중에 암 투병 중이셨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정말 힘들었다. 어떤 일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마음을 다잡게 된 계기가 있었나.
"의욕을 잃고 있었는데, 우리팀 경기를 텔레비전으로 봤다. 당시 황병일 수석코치님이 '지금 우리팀에서는 용규보다 원섭이가 빨리 돌아와줬으면 한다'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러면 안되겠다 싶어서 최대한 빨리 감각을 끌어올리려고 했다."
-지난 2012년 겨울. 3년 총액 14억원에 FA 계약을 맺었다. 잰다는 느낌도 없이 굉장히 빠른 시일내에 잔류를 결정했다.
"사실 나는 다른팀에 가고싶은 생각이 별로 없었다. 다른 팀 분위기에 적응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게 불편했다. 광주가 좋다. 이미 우리 가족들은 광주에 정착했다. 나는 서울 출신이지만, 나의 아이들이 이곳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고, 아는 사람들도 다 광주에 있다. 그래서 광주가 좋다."
-최근 2년 연속 KIA는 8위에 머물렀다. 팀 성적이 좋지 않았던 것은 분명 신경이 쓰이는 부분일 것 같다.
"그래도 지난 2년에 비하면 올해는 괜찮은 편인가? 여기서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데 참 안된다(웃음). 나는 솔직히 팀 타율이 중요하진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경기를 안뛰고 벤치에서 보는 날에 후배들을 유심히 관찰한다. 그러면 '정말 우리 선수들이 방망이를 못치나?'하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물론, 걔네들도 나를 볼 때 답답하겠지(웃음). 그래도 우리가 타율 꼴찌를 하면서도 여기까지 온 것은 중요할때 저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베테랑으로서 김기태 감독은 어떤 리더인가.
"최고다. 더이상 말할게 없다. 선수가 이상한 짓(웃음)만 안하면 된다. 아주 기본적인 예의만 지키면 된다. 스프링캠프에서 이틀 연속 쉰 것은 프로에서 15년을 하면서 처음이다. 내가 찬스에서 안타를 못치면 스스로 열받는 것보다 감독님에게 미안한게 더 크다. 내가 팀에 도움이 됐어야 하는데, 이러면 안되는데 이런 생각이 많다."
-그런 스타일이 처음에는 적응하기 어려웠을 것 같은데.
"올해 스프링캠프에서 느꼈다. 갑자기 오후에 고참들은 모두 들어가라는 이야기를 하셨다. 이게 진심인가, 정말 들어가도 되는건가 싶어서 눈치를 봤다. 그랬더니 '훈련이 끝났으면 들어가서 놀고 싶으면 놀고, 훈련하고 싶으면 하라'고 하시더라. 자유를 줬다. 그러다보니 내가 찾아서 하게 된다. 또다른 효과도 있다. 사실 어린 선수들은 선배들이 있으면 훈련할 때도 주눅이 들게 돼있다. 고참들을 제외하면 어린 선수들끼리 바짝 경쟁을 붙일 수 있다. 스프링캠프가 끝날 때 쯤 보니까 어린 친구들이 많이 성장해있어서 깜짝 놀랐다."
-마흔까지 야구를 한다고 가정했을때, 많은 시간이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KIA에서 현역 생활을 마감하고 싶은 생각도 있나.
"당연하다. 작년에 이성우가 내게 그런 질문을 하더라. '형님. 만약에 KIA에서 형님에게 지금 당장 은퇴하고 코치를 하라고 해요. 아직 1000경기를 달성하지 못했어. 그런데 다른 팀에서 감독이 직접 전화를 걸어서 오라고 하면 어떻게 하실거에요?'라고. 그 질문을 받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성우도 웃더라. 내가 그렇게 진지한 모습을 처음 봤다고(웃음). 고심 끝에 결론은 일단 '밥이 되든, 죽이 되든 1000경기는 채운다'다. 다음 생각은 다음에 하고 싶다. 그만큼 1000경기는 내게 중요한 기록이다."
-외국인 선수 브렛 필을 참 예뻐하는 것 같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꾸준히 대화를 하고, 스킨쉽을 하던데.
"필은 너무 예쁘다. 그런 외국인 선수가 없다. 성실하고, 야구도 잘하고, 성격도 좋고 정말 완벽하다. 나는 내가 은퇴할 때까지 필과 함께 하고 싶다. 다행히 필이 우리팀과 광주를 좋아하는 것 같다. 사실 작년에도 재계약을 하기 전에 필이 미리 귀띔을 해줬다. 계속 함께하고 싶은 선수다."
-앞으로 어린 선수들, 팬들에게 어떤 선수로 기억되고 싶나.
"사실 나를 오래 기억할 것 같지 않다(웃음). 그래도 그냥 특출나지는 않지만 없어서는 안되는 사람. 소금같은 느낌? 영화 배우로 따지면 유해진 같은, 감초 같은 선수가 되고 싶다(웃음). 뛰어나지는 않았어도 빠지면 허전하고, 있으면 안정감 있는 그런 선수로 기억해주시길 바란다. 그게 내 유일한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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