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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진의 '시네리뷰'] '한여름의 판타지아' 쓸쓸함에서 피어난 찬란한 불꽃놀이

기사입력 2015.07.04 08:00 / 기사수정 2015.07.03 21:55

이영기 기자


[엑스포츠뉴스=김동진 대중문화평론가]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두 개의 챕터로 나뉜 일종의 옴니버스 영화다. 1부 ‘첫사랑, 요시코’는 일본의 소도시 고조(gojo)를 현지 답사하는 이야기로, 2부에서 만들어질 이야기의 ‘재료’가 된다. 관객은 거의 다큐멘터리처럼 보이는 1부에서, 고조시의 공무원과 현지인을 만나 취재하는 감독 태훈과 조감독 미정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 1부에서 등장하는 현지인들의 고조에 대한 추억과 연애담이 2부 ‘벚꽃우물’에서 미묘하게 변형되어 극영화로 태어난다.



여행과 연애의 공통분모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여행과 연애가 얼마나 닮았는지를 새삼 생각하게 하는 영화다. 우리는 낯선 이국에서 불안과 설렘의 감정을 동시에 겪고, 어느 때보다도 자신의 오감이 깨어나는 것을 느낀다. 이것은 사랑에 빠지는 순간에 느끼는 오감의 확장과 닮아있다. 여행과 연애는 인간을 섬세하게 만든다. 여행자와 연인은 전심전력으로 그 순간에 열중한다.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이런 섬세한 열중을 체험하게 한다.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여행경험이 많은 친구를 따라 나선 느낌을 준다. 통역 역할을 하는 미정과 가이드 역할을 해주는 현지인들 덕택이다. 관객은 자막 없는 일본어를 들으면서 당황하다가 이어지는 통역을 듣고 안심하게 된다. 별것 아닌 이 설정은 영화 전체에 부드러운 완충작용을 부여한다. 이방인과 토착민, 현실과 영화, 과거와 현재, 재료와 결과물 등 영화 안에서 비교되는 대립 쌍들이 어느새 스르륵 경계를 넘어 이어진다.

여행로맨스를 다룬 영화들에서 풍경은 무대배경으로 소비되곤 한다. 로맨스가 진척될수록 공간은 의미를 잃는다. 하지만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여행자가 공간과 장소에서 느끼는 생경함의 감각을 끝까지 잡아낸다. 살아있는 풍경. 인물들이 추억에 젖어 과거에 떠밀려갈 때도, 그들이 무릎을 괴고 앉아 있는 테이블과 폐교에 걸려있는 액자 하나까지도 굳건히 현실적이다. 더구나 2부에서 혜정과 유스케가 걷는 골목길의 세부들은 거의 화면에서 튀어나올 정도로 생생하다.



떠난 사람과 남은 사람
여행과 연애는 삶의 예외적 순간이다. 영원한 여행은 유랑자의 것이고 형벌에 가깝다. 그리고 연애는 어느 순간 끝이 난다. 1부 ‘첫사랑, 요시코’는 고조의 풍경과 사람들을 넘나들면서 이 자명한 쓸쓸함을 확인시킨다. 유령처럼 등장하는 소녀 요시코는 떠나있지만 남은 것, 되살아나는 추억처럼 밤거리와 폐교를 맴돈다. 노인들만 남은, 그들의 표현대로 ‘아무 것도 없는’ 시골마을. 그들은 좋은 시절이라면서 50~60년대의 일들을 술회한다.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떠났는데도 ‘무슨 인연 때문인지’ 고향에 남았다면서.

고조에 여행 온 혜정과 동네농부 유스케의 풋풋한 로맨스를 다룬 2부도 마냥 싱그러운 것만은 아니다. 1부에 등장한 공무원 유스케의 사연은 2부에 등장하는 혜정에게 옮겨진다. 유스케는 배우가 되고 싶어 극단에 들어갔지만 자신에게 재능이 없음을 깨닫고, 도쿄에서 고조로 떠나왔다. 혜정 역시 배우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자신을 리셋하기 위해 고조에 여행을 왔다. 이렇게 보면 혜정은 유스케의 분신이다. 또한 유스케가 도시를 떠나 3년 전에 시골로 내려온 농부라는 설정까지 고려하면, 이 둘은 거의 소울메이트에 가깝다.



어딘가를 떠나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 떠나와서 정착한 남자와 곧 떠나야 할 여자는 ‘시간차를 두고’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속을 방황하는 인물들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떠나간 고조라는 도시. 이 배경과 캐릭터 사이의 대비는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마치 고조라는 쓸쓸함의 깊은 뿌리에서 불꽃놀이 같은 이들의 짧은 로맨스가 꽃피는 광경이다. 대본조차 없이 즉흥적으로 찍혔다는 혜정과 유스케의 로맨스가 아련한 깊이를 갖는 것은 정말로 놀랍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곳에서 불꽃놀이를 바라본다.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찬란함은 혜정과 유스케의 얼굴 위에서 빛난다. 모든 떠난 사람과 남은 사람의 얼굴 위로 빛의 잔영이 공평하게 분배라도 되는 것처럼. 있을 수 없는 일처럼. 한여름의 판타지아처럼.

김동진 대중문화평론가 (nivriti@naver.com)

[사진=한여름의 판타지아 ⓒ 영화 스틸컷]

이영기 기자 leyoki@xport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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