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츠뉴스=나유리 기자] "내가 이 재능을 가지고 러시아에서 태어난 것은 악마의 저주다."
러시아의 저명한 시인 알렉산드르 푸슈킨이 죽기 몇 달전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쓴 편지에서 남긴 말이다. 시대와 환경을 비관하던 그의 시선이 고스란히 담겨있는듯 하다.
지난 7일(이하 한국시각) 러시아 소치동계올림픽이 개막했다. 동계올림픽은 눈 위, 얼음 위에 선 선수들이 그동안 갈고 닦아온 실력을 스포츠정신 아래 마음껏 펼치는 진정한 겨울 축제의 장이다.
그러나 소치올림픽 개막전부터 국내외를 가장 뜨겁게 달군 소식은 한국 선수가 아닌 러시아 쇼트트랙 대표팀의 빅토르 안, 안현수였다.
우리는 아직도 2006 토리노동계올림픽, 세계선수권, 쇼트트랙 월드컵에서 활약하던 안현수를 기억한다. 김기훈과 김동성의 계보를 잇는 '쇼트트랙 천재'이자 '한국의 자랑'으로 불렸던 선수다.
천재의 비극이었을까. 안현수는 연맹과의 문제와 소속팀 해체 등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직면하며 몇 년간 표류했다. 한없이 어려운 상황에서 안현수에게 손을 내민 곳은 고국이 아닌 러시아였다. 그는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러시아 국적을 선택했다.
이번 올림픽에 참가한 또다른 선수의 예를 살펴보자. 지난 11일 스노우보드 하프파이프 결선에서 숀 화이트(미국)를 꺾는 이변을 연출하며 새로운 황제 탄생을 알린 스위스의 유리 포드라드치코프. 그는 원래 러시아 출신이다.
포드라드치코프는 모스크바 남쪽에 위치한 포돌리스크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는 저명한 물리학자고, 어머니는 수학박사다. 포드라드치코프 가족은 아버지를 따라 스웨덴에서 네덜란드로, 또 다시 스위스로 거주지를 옮겼다. 그러나 늘 러시아 국적은 유지했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스노우보드 선수를 선택한 포드라드치코프는 2004년 러시아 대표팀에 발탁된 후 토리노올림픽에도 참가했지만 성적이 썩 좋지 못했다.
이후 국적을 포기하고 스위스 대표팀을 선택한 포드라드치코프는 "러시아의 훈련 시스템이 잘 맞지 않았다"고 털어 놓았다. 그는 지난 11일 '스포츠러시아'와의 인터뷰에서 "스포츠는 다른 사람에게 명령한다고 해서 되는게 아니다. 모든 게 감각적이고 심리적이다. 러시아 대표팀은 정말 이상했다. 예를 들어 코치들은 모든 선수들이 밤 11시까지 잠들어야 한다고 강요한다. 이게 어떻게 되겠는가? 고위 관계자들이 아직도 내가 러시아를 위해서 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포드라드치코프의 불평도 일리가 있다. 러시아 스포츠는 과거 사회주의 연방 국가 시절의 관습을 버리지 못한 채 전체주의적 성향을 이어왔다. 때문에 육상, 체조 등 기초 체육 이외의 종목에서는 훈련 방법에 있어 세계적인 흐름에 뒤처져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포드라드치코프 같은 유망주들을 제대로 길러내지 못하고 타국 대표팀에 내주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러시아는 변화하고 있다. 소련의 영광을 뒤로 하고 최근 국제 대회에서 하향세를 기록하던 러시아는 국가 이미지를 제고하기 위해 대형 스포츠 이벤트 개최에 열을 올렸다. 이번 올림픽과 2018년에 치러질 FIFA(국제축구연맹) 월드컵이 좋은 예다. 또 지난 밴쿠버올림픽에서 종합 순위 11위로 최악의 성적을 기록한 후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직접 나서 선수단 기량 발전에 힘썼다.
안현수의 귀화 역시 전통적으로 쇼트트랙에 약했던 러시아가 택한 변화의 방법 중 하나다. 유망주들의 성장이 더딘 종목은 다른 나라에서 검증된 실력의 선수를 영입함으로써 부족함을 메울 수 있다. 동시에 귀화한 선수가 본보기로 남아 후진 양성에 도움을 줄 수도 있다는 계산이다. 러시아는 안현수의 귀화를 추진할 당시 컬링 선수층을 보완하기 위해 캐나다 남자 선수 2명의 귀화를 함께 추진했고(두 사람은 이중국적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귀화를 포기했다), 스키선수 알렉스 글레보프도 고국 슬로베니아 대신 러시아를 택했다.
물론 스포츠 선수들이 개인적인 이유로 국적을 바꾸는 것은 흔한 일이다. 포드라드치코프와 아나스타샤 쿠즈미나(슬로바키아·바이애슬런), 다르야 돔라체바(벨라루스·바이애슬런) 등 더 나은 환경과 조건을 찾아 러시아를 떠난 선수들처럼 여러 나라에서 많은 사례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경우와 안현수는 분명 다르다. 그 어떤 나라도 이미 최고의 자리에 오른 선수를 빼앗긴 사례는 없다. 스타플레이어에 밀려 기회를 얻지 못한 유망주가 새로운 고국에서 재능을 꽃피운 경우는 많아도 안현수처럼 올림픽 무대에서까지 검증을 마친 선수가 원치않는 파문에 휩싸여 귀화한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다.
안현수의 손을 잡은 러시아 쇼트트랙 대표팀은 소치올림픽에서 빠르게 성과를 내고 있다. 안현수는 남자부 1500m 레이스에서 동메달을 획득하며 러시아 쇼트트랙 사상 첫 올림픽 메달을 안겼으며 13일 단체 계주 준결승에서 조 1위 결승 진출을 이끌었다. 안현수를 얼싸안은 채 환호하는 세바스티앙 크로스 코치의 얼굴이 이 모든 것을 증명하고 있다.
변화를 선택한 러시아를 인정하고, 이제라도 썩고 고인 물을 닦아내야 한다. 안현수의 귀화 이후 러시아 언론은 일제히 "한국이 올림픽 영웅을 우리에게 보냈다"며 놀라워 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면, 우리는 설령 안현수가 푸슈킨과 같은 마음으로 모국을 떠올린다고 해도 반박할 수 없는 현실을 앞으로도 씁쓸하게 곱씹어야 할 것 같다.
나유리 기자 NYR@xportsnews.com
[사진=러시아 국기를 들고 세리머니하는 빅토르안(위), 레이스를 펼치는 빅토르안(아래) ⓒ Gettyimages/멀티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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