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츠뉴스=장원재 칼럼니스트] “그리스 전에서 박지성(朴智星)이 뛸 수도 있다.”
홍명보(洪明甫) 감독이 이렇게 말했다. 17일 전지훈련장인 브라질에서 나온 일성(一聲)이다. 지난 8일 “박지성을 만나 복귀 의사를 묻겠다. 박지성의 최종결정을 내 귀로 듣고 싶다”고 말한지 열흘 만에 다시 나온 ‘박지성 관련발언’이다. 3월 5일 유럽에서 열리는 그리스와의 평가전은 월드컵 최종명단이 확정되기 이전에 치르는 마지막 A매치다. 그래서 중요하다. 박지성은 다시 태극마크를 달고 우리에게 돌아올 수 있을 것인가.
월드컵 본선에 처음 참가하는 모든 선수들이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다. ‘어렸을 때부터 늘 꿈꿔오던 월드컵에 내가 실제로 출전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브라질이난 독일, 이탈리아나 아르헨티나 같은 단골출전국 선수로부터 월드컵에 첫 출전하는 아프리카 소국(小國)의 선수들에게 이르기까지, 단 한 선수의 예외도 없다. 팬들은, 눈보라와 폭우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이마와 입술이 찢어지고 흐르는 피를 붕대로 싸맨 가운데서도 처절하게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는 ‘진짜 남자’의 이미지로 축구선수들을 추억한다. 하지만 저 강인한 전사(戰士)들의 마음 안에는, 꿈을 이루기 위해 어둑어둑한 마당에서 홀로 낡고 바람빠진 공을 다루던 소년(少年)이 살고 있다. 그래서 선수들은, 생각보다 자주 눈물을 흘린다.
본명 에드손 아란테스 도 나시멘토. 별명 펠레. 1956년, 15세 11개월의 나이로 성인축구계에 데뷔한 이래 4회 월드컵 출전에 3회 우승을 달성한 아직까지는 유일한 선수. 펠레의 국가대표 데뷔는 16세 9개월이던 1957년 7월 7일(리우 데 자네이루. 1-2패), 10일(상 파울루, 2-0승)에 펼쳐진 아르헨티나와의 2연전이다. 그는 두 경기 모두 한 골씩 득점했다. 1958년 월드컵 전까지 국가대표 8경기 출전에 5골을 기록 중이던 이 소년의 월드컵 본선데뷔는 브라질의 4조 마지막 경기, 1958년 6월 15일 궤텐버그에서 열린 대 소련 전이다. 오스트리아(2-0승), 잉글랜드(0-0), 소련(2-0승)에 이어 6월 19일 브라질이 8강에서 맞이한 상대는 월드컵 첫 출전, 그리고 아직까지는 본선에 복귀하지 못하고 있는 웨일즈. 1-0으로 끝난 이 경기의 득점자가 바로 펠레다.
6월24일, 브라질은 준결승에서 프랑스를 5-2로 격파했다. 경기 개시 후 1분만에 1-0으로 앞서던 브라질은 8분 프랑스에 동점골을 내주는데, 이 골은 이 대회에서 브라질이 허용한 첫 실점이다. 이 골의 득점자가 저스트 퐁테인. 단일월드컵 개인최다 득점기록인 13골로 득점왕에 오른 전설의 골잡이, 바로 그 사람이다. 전반전 스코어는 39분에 터진 디디의 골로 브라질 2-1 리드. 후반 시작부터 20분 사이에 혼자 세 골을 몰아치며 브라질 승리의 디디돌을 놓은 선수가 바로 펠레다. 29일 홈 팀 스웨덴과의 결승전. 펠레는 팀의 3호, 5호골을 몰아치며 팀의 5-2 승리에 기여한다. ‘3호골’이 바로 달려오는 수비를 보고 공을 공중으로 2미터 수직상승시켜 태클을 따돌린 뒤 땅볼에 가까운 빠르고 낮은 오른발 슛으로 마무리한 ‘전설의 발리킥’이다. 가린샤의 우측 돌파에 이은 패스를 받아 거의 비슷한 패턴으로 기록한 바바의 두 골, 그리고 ‘선수와 감독’으로 월드컵을 제패한 첫 지구인 자갈로가 터뜨린 4호골이 브라질 5득점의 세부내역이다.
축구왕국 브라질의 사상 첫 월드컵 우승. 경기 종료 휘슬과 동시에, ‘17세 소년’ 펠레는 ‘형들’의 품에 안겨 엉엉 울었다. 감격에 겨워, 수줍어서,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는 소년을 형들이 달래는데 소년의 울음은 멈추지 않았다. 고국으로 돌아오는 개선비행기, 쥴리메 컵을 소중히 품에 안고 비행기 트렙을 가장 먼저 내려온 선수가 바로 펠레다. 공항에서 보여준 소년의 해맑은 미소와 경기장에서 흩날린 소년의 눈물은 지금도 올드팬 사이에서 회자(膾炙)되는 추억의 이미지다.
70년 멕시코 대회를 끝으로 월드컵 은퇴를 선언한 펠레는 1971년 7월 11일 상 파울루에서 열린 오스트리아와의 친선경기를 끝으로 ‘대표팀 영구은퇴’를 선언했다. 1-1로 끝난 이 경기의 득점은 펠레의 대표팀 97호골(111회 출장)이다. 펠레의 대표팀 복귀문제가 불거진 것은 1974년 서독 월드컵이다. 클로도알도, 토스타오, 펠레, 게르손이 다 은퇴한 브라질은 예전의 브라질이 아니었다. 언제나 압도적인 공격력으로 상대를 압도하던 브라질이 열 명, 심지어는 열 한 명의 선수가 모두 볼 뒤 쪽에서 경기를 하는 ‘수비형’ 팀으로 변해 있었다. 그래서 생긴 74년 브라질 팀의 별칭이 ‘겁장이들’이다.
팬들은 펠레의 복귀를 원했다. 협회장도, 대통령도 메시지를 보냈다. 74년 월드컵 당시 펠레는 여전히 현역이었다. 그가 처음 몸담았던 산토스 FC의 주전 공격수. 빗발치는 요청에도 펠레의 대답은 여전히 ‘노.’ 월드컵이 주는 긴장감을 더 이상 이겨낼 자신이 없다고 했다. 62년, 66년 월드컵에서 상대의 표적태클에 당해 두 번이나 ‘심각한 부상’으로 끝까지 대회를 마칠 수 없었던 사정을 모르지 않았기에, 브라질 국민들은 펠레의 은퇴결정을 받아들였다.
브라질은 본선 첫 두 경기 대 유고슬라비아 전과 스코틀랜드 전을 0-0으로 비겼다. 아프리카 대표 자이르를 3-0으로 이기고 가까스로 2차리그 진출. 동독을 1-0, 숙적 아르헨티나를 2-1로 꺾으며 위태로운 항해를 이어갔지만 크루이프의 저 유명한 ‘크루이프 턴’에 이은 패스로 네스켄스(50분)가, 크롤의 크로스를 발을 쭉 뻗은 자세로 앞 쪽으로 날아오르며 크루이프(65분)가 골 안으로 차넣은 ‘롱 점프 발리’를 성공시키며 브라질의 꿈은 사라졌다. 펠레의 저택 유리창이 처음 돌맹이의 공격을 받은 건 바로 이 순간이다. 결승전 진출팀은 네덜란드였다. 브라질 팬들은 분노했다. ‘전혀 브라질답지 않은 축구’를 하다 처참하게 무너졌기 때문이다. 팬들은 그 서러움을 펠레에게 쏟아냈다. 그로부터 두 어 달 간, 펠레 저택의 유리창은 성할 날이 없었다고 한다.
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이번에는 펠레가 먼저 대표팀 복귀 의사를 밝혔다. ‘NASL의 뉴욕코스모스에서 77년 연말까지 현역으로 뛰었으니, 조금만 더 몸을 만들면 경기당 15분 정도는 최고의 컨디션으로 뛸 수 있다, 결정적일 때 교체맴버로 출전하는 역할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브라질대표팀의 반응은 ‘고맙지만 사양하겠다’였다. 팀의 구성이 모두 마무리된 뒤라 새 맴버를 들을 여유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펠레는 ‘브라질의 영원한 라이벌 아르헨티나에서 열리는 월드컵대회에서 나의 골로 아르헨티나를 결승에서 물리치고 우승하는 건 소년시절부터 그려왔던 나만의 판타지였다. 대표팀 복귀 이야기를 꺼냈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라며 브라질의 장도를 축복했다. 그리고 살짝 눈물을 비쳤다. 그것은 혹시 ‘소년 펠레’의 마지막 눈물은 아니었을지.
논어에 보인다.
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군자지어천하야 무적야 무모야 의지여비(4/10)
해석) 군자가 천하를 대함에 있어서는 절대적으로 긍정하는 것도 없고 절대적으로 부정하는 것도 없다. 오직 옳음(義)에 견줄 따름이다.
박지성은 한국축구에 크게 공헌했다. 어떤 경우든, 그의 결정을 존중하는 것이 성숙한 축구팬의 태도라는 사실에도 변함이 없다. 다만 이것 하나는 바라고 싶다. 홍명보 감독과 만나 최종결정을 내리기 전까지는 ‘절대불가’라는 말을 하지 말았으면. ‘절대적으로 긍정하는 것도 없고 절대적으로 부정하는 것도 없이, 오직 옳음(義)에 견주어’ 결정을 내려 주었으면. 참고로 덧붙인다. 역대 한국인 월드컵 본선 최다출전 기록은 1990년 이탈리아 대회부터 2002년 한일 월드컵까지 배번 20번을 달고 한국 수비진을 이끌었던 홍명보가 기록한 16경기다. 배번이 21번에서 7번으로 바뀌기는 했지만, 역대 2위 기록이 바로 2002년부터 2010년까지 ‘캡틴 박’이 기록한 14경기다. 브라질 월드컵에서 이 기록의 보유자가 바뀌기를 기대하는 건 필자만의 과욕일까? 그래서 홍명보 감독께 조심스레 부탁한다. ‘홍감독, 캡틴 박 마음 속의 소년(少年)을 깨워주세요!’
장원재 칼럼니스트 sports@xportsnews.com
[사진=홍명보, 박지성 ⓒ 엑스포츠뉴스DB]
김덕중 기자 djkim@xports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