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최종편집일 2024-11-10 22:12
스포츠

[장원재의 논어와 스포츠] '측백나무' 박지성의 복귀 1호골

기사입력 2013.08.26 12:17

김덕중 기자


[엑스포츠뉴스=장원재 칼럼니스트] 드디어 터졌다. 박지성의 PSV 아인트호벤 복귀 1호골. 네덜란드 리그 헤라클라스 알메로와의 어웨이 경기 후반 86분에.

교체출장, 정규시간 종료 4분을 남기고 우겨넣은 극적인 동점골. 페널티 박스 안에서 수비수를 등지고 스테인 샤르스의 패스를 받아 오른발로 볼 컨트롤. 왼발을 회전축으로 180도 도는 순간 상대 수비수의 좌우협공으로 녹다운. 그렇게 넘어진 상태에서 왼팔의 근력과 왼발 무릎 이하 정강이를 쿠션 삼아 딱 0.1초 동안 지면에서 5cm 정도 몸을 띄우고, 저 혼자 흘러가는 공을 기어이 오른발 끝으로 건드리며 마치 농구의 탭 슛처럼 터치에 성공. 공은 몇 번의 바운드를 퉁기며, 마치 계곡물이 바위틈을 흘러내리는 듯한 유려한 움직임을 보이며, 골키퍼의 다이빙을 피해 오른쪽 골문 구석을 출렁였다. 순간 스피드로 보자면, 슛의 진행 속도보다 골키퍼의 다이빙 몸동작의 움직임이 더 빨랐던 희귀한 샘플이다.

빠르고 힘차다는 것이 축구라는 스포츠가 가지는 특성이다. 그런데 가끔, 느리고 부드러운 동작으로 빠르고 힘차게 다가오는 저지선을 유유히 통과하는 사람들이 있다. 골키퍼의 머리를 부드럽게 넘기는 칩슛, 수비수의 동작을 빼앗고 느리게 굴려보내는 연타(軟打). 느림이 빠름을 이기는 건 역설의 미학이다. 발상의 전환이다. 오직 몇몇의 선택받은 고수(高手)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정점의 신기(神技)다.

박지성의 이번 골을 보고 2006년 6월 19일 그가 득점했던 또다른 골을 떠올린다. 독일월드컵, 라이프치히에서 열렸던 태극전사의 조별리그 두 번째 경기 대 프랑스 전에서 나온 동점골을 기억하시는지.

경기 초반, 한국은 초라하게 밀렸다. 전반 9분 윌토르의 빗맞은 슛이 김남일의 발에 걸려 진로를 바꾼 뒤 최진철과 김영철의 사이를 지나며 절묘한 패스처럼 골문 중앙에 서있던 티에리 앙리에게 전달. 앙리는 오른발로 공을 받은 뒤 넉넉한 시간을 가지고 짧고 강한 왼발강타로 득점했다. 이 골은 프랑스가 1998년 결승 대 브라질 전 3-0 승리 이후 월드컵에서 기록한 첫 번째 골이다. 프랑스는 2006년 본선 첫 경기를 스위스와 0-0으로 비겼다. 네 경기 연속 무득점. 2002년 한국-일본 월드컵, 디펜딩 챔피언 프랑스는 세 경기 무득점으로 짐을 쌌고, 공격진이 노쇠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어쩌면 볼리비아가 보유한 월드컵 본선 다섯경기 연속 무득점 기록을 갈아치울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받는 중이었다. 볼리비아의 기록 중에는 1994년 미국 월드컵 조별리그 2차전, 보스톤 폭스보로 경기장에서 한국과 무득점으로 비긴 경기도 포함되어 있다.

32분 코너킥에 이은 패트릭 비에라의 헤딩슛은 어쩌면 골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운재가 골라인 안쪽으로 넘어지며 가까스로 밀어낸, 보기에 따라서는 공이 골라인을 완전히 넘어선 것처럼 보였던 가슴 철렁한 순간. 전반전 내내 한국은 무력했다. 유효슈팅은 고사하고, 보기에 따라서 슛을 하나도 날리지 못한, 슛 비슷한 것을 겨우 하나 만들어냈을 뿐인 일방적인 열세. 박지성의 부친 박성종 선생이 “하늘이 도왔다. 한국이 0-5로 끌려갔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논평했을 정도였다.

전번보다는 조금 나아졌으되, 전체적으로는 답답한 흐름이 이어지던 후반전 종반. 마침내 한국이 동점골을 터뜨린다. 81분 설기현이 오른쪽 측면 돌파에 성공했고, 빠르게 날아가며 알맞게 휘어지는 크로스를 쏘아 올렸다. 페널티박스 중앙을 지나 골문 오른쪽까지 날아간 공을 조재진이 수비수보다 머리 하나 높이로 풀쩍 뛰어오르며 원바운드로 중앙으로 연결, 뛰어들던 박지성이 이 공을. 설기현이 크로스를 올릴 때 박지성은 문전으로 쇄도했다. ‘2차 연결’을 노리고 좀 길게 공을 올린 설기현의 의도에 맞춰 순간적으로 전진속도를 살짝 늦추며 수비진 사이를 돌파. 조재진의 헤딩패스가 노바운드로 올 것을 예상하고 낮고 빠르게 침투하다 원바운드로 구질이 바뀌자 다시 스피드기어를 조정해서 물고기가 수초(水草) 사이를 헤치며 유영하듯 수비수 셋 사이를, 등 뒤를 돌고 무릎 앞을 지나 골키퍼와 마주보는 지점까지 전진. 그리고, 골키퍼 바로 앞에서 논스톱으로 공을 터치. 패스가 전달되는 속도와 본인의 뛰어드는 속도 사이의 미세한 차이는 발목을 살짝 비트는 것으로 해결하고, 각도를 좁히며 뛰쳐나온 골키퍼가 슛이 지나갈 좌우 공간을 거의 다 봉쇄한 위기상황은 머리 위를 넘겨 득점을 노리는 전략으로 순간대치. 공은, 박지성의 오른발 인사이드와 엄지 발가락 안쪽의 불룩한 부분이 만나는 지점에 맞고 골키퍼 머리 위를 부드럽게 넘어갔다. 슛하는 지점과 고대 사이의 공간적 여유가 많지 않았음으로, 키퍼의 쭉 뻗은 손 위를 딱 종이 한 장 차이로만 넘기지 않고서는 볼이 크로스바를 지나 허공을 가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만큼, 기술적으로 고난도의 판단력을 요구하는 상황이었다. 세계적인 수문장 파비엥 바르테즈도 순간적으로 몸을 비틀며 허공으로 솟구치는 아름다운 역동작을 선보이며 공에 손을 대는데 까지는 성공했으나, 공은 비행각도를 살짝 바꿨으되 프랑스 골대 왼쪽 하단 옆그물을 아슬아슬하게 출렁이며 안착에 성공했다. 월드컵 본선에서 대한민국이 보여준 골 가운데 아직까지는 가장 감각적인 것으로 꼽히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다른 선수들과 공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추적하며, 집념과 센스의 극한을 보여준 끝에 만들어낸, 오직 박지성만이 보여줄 수 있는 작품. 대한민국 쇼트트랙 비장의 필살기를 축구에 원용한 '뛰어오르며 날내밀기'.

논어 자한(子罕)편에 나온다.

歲寒然後知松柏之節(세한연후지송백지절).

해석)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

마음이 단단하고 의지가 굳센 사람들의 훌륭한 뜻과 꼿꼿한 기상은, 어려움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알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저 유명한 <세한도>는 이 구절을 형상화한 그림이고, 안중근(安重根) 의사도 옥중에서 이 구절을 유묵(遺墨)으로 남겼다. 지난 1년 간 QPR에서 보낸 세월이 박지성이 겪은 ‘세한’이다. 감독의 몰이해와 동료들 사이의 불협화음, 자신의 자잘한 부상과 경기에 나서지 못하는 울분을 다 이기고 그가 다시 피치에 나타났다. 동토(凍土)와 사막(沙漠)을 맨 몸으로 건너 우리에게 돌아온 사나이. 박지성의 진가(眞價)는 이제부터 드러날 터이다. 박지성의 이번 시즌은 그가 축구로 보여주는 <세한도>일 것은 혹시 아닌가. 박지성은 측백나무다. 시들지 않는 ‘남산 위의 저 소나무’다.



장원재 칼럼니스트 sports@xportsnews.com

[사진=박지성 ⓒ 게티이미지 코리아]



김덕중 기자 djkim@xportsnews.com

ⓒ 엑스포츠뉴스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실시간 인기 기사

연예
스포츠
게임

주간 인기 기사

연예
스포츠
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