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츠뉴스=김승현 기자] 배우 안재모는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김두한 역을 소화하며 2002년 23세의 나이로 연기 대상을 거머쥐었다. 전국의 남성들은 마초 매력을 발산한 안재모가 소화한 김두한에 열광했고 드라마 OST 강성의 '야인'을 들으며 야인을 꿈꾸기도 했다.
'야인시대' 이전에 안재모는 2000년에 종영된 KBS 대하사극 '왕과 비'에서 연산군 역을 맡았다. 연산군은 온갖 기행으로 유명해 사극의 단골 소재이지만, 그만큼 섬세한 내면을 잘 포착해야 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안재모는 변덕스러운 감정의 소유자인 '폭군' 연산군의 광기를 제대로 소화해냈다는 평을 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 20세였다.
안재모를 떠올리게 된 것은 최근 안방극장에 20대 배우 기근이 심각하다는 말이 떠돌기 때문이었다. 특히 여배우의 경우 손에 꼽을 정도라고 한다. 실력을 갖춘 배우를 찾기는 어려워진 대신 아이돌 출신의 연기자는 눈에 띄게 늘었다. 연기력을 갖춘 20대 배우의 기근 현상을 모두 아이돌 탓으로 돌릴 수는 없지만 그들이 배역을 다수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손현주는 지난해 말 SBS 연기대상 시상식에서 대상을 받은 뒤 "촬영하는 내내 우리 드라마에는 없는 게 많다는 얘길 많이 들었다. 아이돌이 없고 스타가 없다고. 그래서 죽기 살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요즘 방송계는 아이돌과 스타 연기자가 없으면 드라마 제작과 시청률 확보에 어려움을 호소할 정도로 그들에 대한 의존도가 점점 커지고 있다.
아이돌을 선호하는 까닭은 분명 장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고정팬을 시청자로 확보할 수 있고, 드라마에 붙는 광고를 유치하기도 수월하며, 해외에 높은 가격으로 판권을 파는 데도 유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가요계뿐만 아니라 연예계 전체에 아이돌 파워가 미치는 영향력은 상당하다. 그래서 이제 아이돌을 캐스팅하는 것은 거역할 수 없는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소위 '연기돌'로 불리며 입지를 다져가는 아이돌이 많지만, 연기력적인 측면에서 볼 때 대다수가 아쉬움을 남긴 것도 사실이다.
가수로서도, 연기자로서도 충분히 기량을 갖추고 드라마에 등장한다면 잡음이 나올 까닭이 없다. 문제는 준비되지 않은 배우들의 출연이 비일비재하다는 점이다. 극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지 못하고, 대사 발성이나 표정 연기가 어색해 보는 사람조차 민망하게 만드는 '연기돌'이 너무 많다. 이에 밀물처럼 몰려왔던 고정팬들도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썰물처럼 떠나가기도 한다.
파워 게임의 승자인 '연기돌'은 초고속으로 승진하며 며 드라마의 주연을 꿰찬다. 하지만 드라마 흥행의 일등공신이 되어야할 이들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엉거주춤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예사다.
다양한 감정 연기를 맛깔나게 소화하는 것은 엄청난 내공이 필요하며 노련한 배우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 연기 경력이 일천한 아이돌 배우에게는 벅차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아이돌의 부자연스러운 연기가 그들만의 책임일까. 사실은 소속 기획사들이 덜 익은 아이돌을 드라마의 주연으로 '꽂아 넣는' 관행이 문제의 본질이다.
새로운 분야를 접했을 때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드물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올라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아이돌이 뛰어난 연기자로 발돋움하려면 단역이나 조연에서 출발해 연기가 무엇인지를 기초부터 알아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무리하게 욕심을 내다 '단명'하는 것보다는, 스포트라이트는 덜 받겠지만 작은 배역부터 시작하다보면 명실상부한 '멀티테이너'로 성장해 있을 것이다. '느림의 미학'이 필요한 이유다.
우리는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에 감정을 이입하면서 삶의 희노애락을 대리 체험한다. 그런데 마음 편하게 울고 웃고 싶은데 배우의 연기를 걱정해야 할 판이라면 문제가 심각하다. 드라마에 얼굴을 내민다고 다 연기자라는 타이틀을 붙여줄 수는 없을 것이다. 내실을 다지는 과정을 통해 기량을 꽃피우는 대기만성형 아이돌을 더 자주 만나고 싶다.
김승현 기자 drogba@xportsnews.com
[사진 = 안재모 ⓒ KBS 프라임 방송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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