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최종편집일 2024-11-20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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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미우리 특집③] 요미우리가 日야구에 끼친 영향

기사입력 2012.11.06 16:16 / 기사수정 2012.11.06 16:47

김덕중 기자


[엑스포츠뉴스=서영원 기자] 1915년 일본 아사히 신문은 학생야구, 지역적 특성을 활용한 대회를 개최해 인기몰이에 성공했다. 바로 ‘코시엔’이라 불리는 현재의 전일본고교야구선수권대회다. 아사히 신문의 성공에 자극을 받은 요미우리 신문 역시 야구를 활용한 콘텐츠 강화를 시작했다. 학생야구는 아사히 신문이 선수를 쳤기 때문에 다른 것을 찾아야만 했다.

요미우리의 사장 쇼리키 마스타로는 대학생을 중심으로 콘텐츠를 만들 것을 주문했다. 요미우리는 제국주의 물결이 일던 1931년 일본 6개 대학 선발팀과 메이저리그 선발팀의 경기를 추진했다. 아사히 신문이 지역주의를 활용했다면 요미우리는 ‘일본 대표’라는 이름을 활용했다. 군국주의와 중일 전쟁 발발을 기점으로 ‘일본 대표’ 이미지는 큰 성공을 거뒀다.

베이브 루스, 루 게릭 등 메이저리그 선발팀과 맞서는 일본 대표는 애국심은 물론 요미우리 신문의 한 단계 발전을 이뤘다. 아사히 신문의 ‘코시엔’과 별개로 인기를 얻은 요미우리 신문은 직업 야구단의 필요성을 느껴 '동경거인군(東京巨人軍 )'이라는 팀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현재의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팀명에 '거인'이라는 이름을 삽입한 것도 메이저리그에 맞서는 일본 거인들이라는 별칭에 따라 정해졌다. '거인'은 현재까지도 요미우리를 칭하는 애칭. 고교 야구와 메이저리그 선발팀 경기가 흥행하면서 폭발적인 선수 수급이 이어졌다. 이에 힘입어 마이니치, 주니치 신문 등 여러 신문사들이 야구단을 창단했다. 요미우리의 움직임은 일본프로야구 시작의 원동력이 됐다.

인기와 발전을 거듭하던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로 야구가 일시적으로 중단됐다. 하지만 요미우리는 야구 선수들의 참전과 전사를 각색해 프로야구 활성화 콘텐츠로 활용했다. 대표적으로 탄생한 스타가 사와무라 에이지. 메이저리그 선발팀을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한 사와무라를 영웅으로 치켜세웠고 이는 한 시즌 최고 투수에게 주어지는 사와무라상 제정(1950년)으로 이어졌다.

‘전쟁에서 패전했으나 야구로 시련을 이겨내자’라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이로 인해 다수의 프로야구 구단이 생겨났고 오늘날과 같은 양대 리그 체제로 이어졌다. 요미우리가 만들어낸 일본 대표가 메이저리그와 맞선다는 이미지는 현재까지도 활용되고 있다. 미-일 슈퍼게임, 미-일 프로야구 교류전 등으로 발전하게 됐다.

[사진 = 요미우리 유니폼 ⓒ 엑스포츠뉴스DB]

김덕중 기자 djkim@xport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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