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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제

해동전설(海東傳說)4(2) 사랑하지않아서

기사입력 2004.11.05 20:57 / 기사수정 2004.11.05 20:57

김종수 기자
[농구무협소설]  해동전설(海東傳說)4(2) 사랑하지않아서





“헉헉…”

전반전이 끝나고 대기실에 들어와 앉은 해동국 선수들은 온몸이 땀으로 젖은 채 녹초가 되어있었다. 최선을 다하고 있음에도 일방적으로 밀리는 경기내용에 더욱더 힘이 빠지는 그들이었다.

오십 삼 대 십 팔.

참담한 점수 차였다.

“자자…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자.”

감독인 최성진이 손뼉을 치며 선수들을 독려했다. 그러나 그 역시도 말에 힘이 없는 것이 이미 자신감을 상실한 듯 했다. 하물며 경기장에서 뛰고있는 선수들은 어떤 심정이겠는가.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어…)

백동호는 으스러져라 이를 악다물었다. 경기에 지고 이기고가 문제가 아니었다. 아무리 친선시합이라고 하지만 이런 식으로 경기가 끝나면 조롱거리밖에 안되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계속 때리고 있는 것이었다.

우호의 암강마공과 부딪힌 가슴과 어깨부위가 소리를 지르고 싶을 만큼 욱신거리고 아팠다. 아마도 옷을 벗어서 확인해보면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으리라. 아니 어쩌면 근육이나 뼈를 다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처받은 자존심에 비하면 그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뛰다가 의원(醫院)으로 실려나가는 일이 있더라도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보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는 백동호였다.

(재승아. 형이 약속했지. 나를 믿으라고 말이야. 부끄러운 형의 모습은 보여주지 않으마.)

관중석에서 지켜보고 있을 동생 백재승을 생각하며 백동호는 다시 경기장으로 나섰다.

파파팟.

경기시작과 동시에 백동호는 공을 몰아 기습적으로 중화국의 진영으로 달려갔다. 그물 주머니 밑은 우호와 영환사가 지키고있었다. 덩치들이 장난이 아닌지라 꽉 차 보이는 모습이었다.

“차앗!”

옆으로 슬쩍 공을 주는척하며 속임수동작을 써 보인 백동호는 이내 그대로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다. 주춤하던 우호와 영환사가 뒤늦게 공중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워낙 체구들이 좋은지라 백동호의 앞은 그대로 막히고 말았다.



(에라! 될 대로 되라.)

백동호는 멈추지 않고 앞으로 부딪혀갔다. 그냥 멈추고 반칙만 유도해도 될 수 있으련만 왠지 그러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한번, 단 한번만이라도 중화국의 덩치들을 부수고 힘으로 그물주머니에 공을 쳐 넣고 싶은 것이 백동호의 절실한 심정이었다.

우호의 암강마공이 또다시 펼쳐졌고, 영환사는 무엇이라 계속해서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퍽!

세 사람이 한꺼번에 부딪히자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크윽…”

온몸의 뼈마디들이 한꺼번에 흔들리는 듯한 충격을 느끼며 백동호는 그대로 공중에서 중심을 잃었다.

쿵…

안타깝게도 백동호는 머리부터 바닥에 떨어졌다.

바닥으로 시뻘건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어…어떻게 된 것이지…?)

손가락 하나도 꼼짝할 수 없는 것은 둘째치고 앞이 점점 흐려짐에 백동호는 멍한 기분이었다. 별반 고통도 없는 것 같은데 자꾸만 의식이 가물가물해지는 것이었다.

“크…큰일났다.”

“의원…어서 의원을 불러!”

경기장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

귓전으로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백동호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보름 후…

찬바람이 휘몰아져오는 갈대밭의 한 귀퉁이로 백재승은 양 무릎을 가슴에 묻고 앉아 있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앉아 있었는지 백재승은 조금의 미동(微動)도 보이지 않고 있는 모습이었다.

한참 후 백재승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멍한 시선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뚝.

무엇인가가 백재승의 조그마한 손등 위에 떨어졌다. 물기였다.

“흑흑…”

백재승의 입에서 나직한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이를 악다물고 있는 표정이었지만 흘러나오는 눈물까지 참을 수는 없었다. 결국 백재승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쉼 없이 울음을 터트려 댔다.

요사이 보름동안은 이제 겨우 열살 먹은 백재승에게 견디기 어려운 일들의 연속이었다.

형인 백동호의 죽음.

중화국 선수들과의 충돌로 경기장 밖으로 실려나갔던 백동호는 결국 죽음을 맞고 말았다. 의원으로 갔을 때는 이미 숨이 멎은 상태였다. 언제나 자신의 우상이었고 유일한 형제였던 그의 죽음은 어린 백재승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제 유일하게 남은 가족인 어머니의 태도도 백재승에게 절망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백재승의 어머니, 임재령.

분명히 둘 다다 자신이 낳은 피붙이임에도 임재령은 이상하리 만치 백동호와 백재승을 차별했다. 맛있는 음식과 따뜻한 옷가지를 먼저 챙겨주는 것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환한 웃음이나 정감이 가는 포옹도 언제나 백동호의 차지였으며 백재승과는 제대로 앉아서 얘기를 나눈 것조차 별로 없었다.

어머니와 가까워져보려고 어리광도 피우고 이것저것 열심히 해보았지만 그럴 때마다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눈빛뿐이었다.

백재승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형이 큰아들이라 듬직한 느낌이 든다 치더라도 자신도 아들인진데 몸과 마음으로 느끼는 편애(偏愛)의 깊이는 너무나도 컸다. 그나마 백동호가 애써서 챙겨주고 보살펴주지 않았다면 백재승은 고아나 다름없는 생활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형이 죽었다.

부안현의 격포 채석강에서 화장한 뼛가루를 날릴 때도 임재령은 백재승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저 이것으로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하는 표정이었다.

형의 죽음도 죽음이지만 어머니의 자신에 대한 태도는 백재승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있었다.

(그래. 어머니는 농구를 좋아하시잖아. 형도 농구를 잘해서 사랑을 받았을 거야. 나도 형 몫까지 열심히 할거야. 그럼 언젠가 어머니도…)

어린 나이에 자신에게 다가온 큰 시련을 대하는 백재승의 태도는 대견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백재승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터벅터벅 집으로 걸어갔다. 임재령은 여전히 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고 그녀의 친구들인 조현정과 엄은정, 박선자가 자리를 지키고있을 뿐이었다.

“재…재승이 왔니? 밥 먹어야지.”

백재승을 보기 무섭게 조현정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어린아이지만 워낙에 시무룩하게 쳐져있는지라 말을 걸기가 쉽지 않은 것이었다.

“예. 현정아줌마. 밥 주세요.”

씩 웃는 얼굴로 백재승이 대답했다.

“……!”

예상치 못한 백재승의 반응에 오히려 조현정이 주춤한 표정을 지었다. 엄은정과 박선자도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의아한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몇 시진 전까지만 해도 죽을상을 한 채 눈물만 찔끔거리던 백재승이었기 때문이었다.

“배고팠나보구나?”

씩씩하게 밥을 퍽퍽 떠먹고있는 백재승을 쳐다보며 조현정이 물었다.

“예. 엄마도 힘들어하시는데 저라도 기운을 차려야지요.”

“어이구…이 녀석 말하는 것 좀 보게? 어른 다되었네.”

너무나도 의젓한 백재승의 대꾸에 세 여인의 얼굴 가득 흐뭇한 표정이 그려졌다.

(이제 더 이상 울지 않을 거야. 이렇게 계속 약한 모습을 보이면 하늘나라에 계신 형도 무척이나 가슴이 아플 것이니까 말이야.)

잠자리에 누워서도 백재승은 계속해서 마음속으로 다짐을 하고 또 했다. 하도 머릿속이 어지러워서일까? 한 시진 이상이 지났음에도 백재승은 좀처럼 잠이 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조용히 눈만 감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저 녀석 잠들었겠지?”

“그럼, 잠자리에 든 지가 언젠데…”

옆방으로부터 세 여인의 도란거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아무리 그렇다손 치더라도 너무한 것 아니야? 죽은 큰아들만 아들인가, 남아있는 작은아들도 생각해야지.”

“그러게 말이야. 저 어린것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백재승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그녀들이 그런 소리를 아무리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나 이어서 들려오는 얘기들은 백재승의 눈을 퍼뜩 뜨여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너무들 그러지 말아. 재령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잖아.”

“무슨 소리를 꺼내려는 것이야? 그럼 재령이가 잘 하고있다는 거야?”

“어머니로서 재령이는 큰 잘못을 범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한 여자로서 본다면 불쌍하기도 하잖아.”

“하기야, 어찌 보면 그렇네.”

“그렇기는 뭐가 그래?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만 중요하고, 자신을 사랑해주었던 사람들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야?”

“누가 그렇데…? 왜 이렇게 흥분을 하고 그래.”

“재령이가 큰 충격을 받고있는 것은 이해가 된다만 그래도 그러면 안 되는 것이라고.”

여인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언성을 높혀가고 있었다.

여인들의 말인즉슨 다음과 같았다.

임재령은 원래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

함열현에서 작은 포목점(布木店)을 운영하는 원성묵이라는 젊은이로 사내다운 외모에 성격까지 서글서글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집안에서 정해준 백승기라는 약혼자가 있었다.

거듭된 집안의 반대는 임재령을 쉴새없이 괴롭혔고, 결국 그녀는 사랑을 쫓아 야반도주를 하고 만다. 여기에서 낳은 아이가 백동호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원동호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행복한 생활도 잠시…

천축국(天竺國)으로 장삿길을 떠났던 원성묵은 그만 비적떼를 만나 죽임을 당하고 만다.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에 임재령은 당장이라도 따라 죽을 결심을 한다. 그러나 그렇게 죽을 수는 없었다. 자신에게는 사랑하는 원성묵의 핏줄인 동호가 있지 않은가?

결국 임재령은 마음을 다잡고 저잣거리에서 떡장수를 하며 어렵사리 아들을 키워나간다.

그때 임재령의 앞으로 약혼자인 백승기가 나타난다.

당신에 대한 내 사랑은 그대로요. 괜찮다면 나에게도 기회를 주시오. 당신의 아들까지 잘 키워 주리다.’

임재령은 한사코 거부했지만 그녀에 대한 백승기의 사랑은 식을 줄을 몰랐다.

임재령은 못 이기는 척 백승기를 받아준다. 그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아들인 동호를 고생시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결국은 죽은 원성묵에 대한 사랑의 연장선상에서 내려진 결정이었던 것이었다.

백승기도 이를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임재령에 대한 그의 사랑은 모든 것을 상쇄시키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리고 몇 년 후 백재승이 태어났다.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도 어머니는 냉정하기만 했구나…?)

임재령은 백승기에게 그 흔한 미소한번 지어주지 않았고 그가 죽는 순간에도 죽은 후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임재령에게 두 아들은 원성묵과 백승기의 차이였던 것이었다.

그제 서야 백재승은 모든 것을 일목요연하게 깨달을 수가 있었다.

주르르.

누워있는 백재승의 얼굴위로 다시금 굵은 눈물방울이 소리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계속)

김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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