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민 전 IOC 위원 겸 전 대한탁구협회장이 지난 26일 서울 서초구 개인 사무실에 놓은 탁구대 앞에서 라켓을 잡은 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양재동, 고아라 기자
(엑스포츠뉴스 양재동, 김현기 기자) '아테네 신화', '리우의 기적' 유승민(42) 전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이 다시 출발선 앞에 섰다.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난공불락' 중국 탁구의 간판 왕하오를 누르며 금메달 획득 쾌거를 일궈내고, 8년 전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IOC 선수위원 선거에서 당선돼 내리막길 걷던 한국 스포츠 외교에 희망을 던졌던 유승민이 이젠 한국 스포츠 새 전성기의 밀알이 되고자 세 번째 도전을 결심했다.
내년 1월 열리는 대한체육회장 선거 출마 선언을 한 것이다. 지난 8월 파리 올림픽을 통해 IOC 선수위원 임기를 마친 유승민은 자신이 함께 맡고 있던 대한탁구협회장에서도 물러나 단기필마로 선거에 뛰어든다.
지난 26일 서울 서초구 RSM빌딩 개인 사무실에서 만난 유승만은 "갈수록 국내외 스포츠 환경이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거기에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이 나 아닐까란 생각에 결단을 내렸다"며 "글로벌 측면까지 적지 않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들까지 포함, 한국 스포츠에 보탬이 될 시점이란 생각에 도전하게 됐다"고 밝혔다.
유승민 전 IOC 위원 겸 전 대한탁구협회장이 지난 26일 서울 서초구 개인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양재동, 고아라 기자
◆"나중에 해도 되는데"…지금이 타이밍이라 생각한 이유
유승민은 1982년생이다. 손흥민보다 어린 프리미어리그 감독이 나오고, 30~40대 젊은 체육행정가들도 적지 않은 시대지만 한국에서 만큼은 그에게 "아직 어린 것 아니냐"는 견해가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 그에게 "좀 더 있다가 해도 되지 않겠냐"는 조언을 건네는 인사들도 적지 않았다.
유승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난 저 자리(대한체육회장)를 내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길게 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면서 "내가 하다가 능력이 다하거나 쓰임이 다하거나 한계가 느껴지면 그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한체육회장은 한 사람의 욕심으로 갈 수 있는 자리는 아니"라고 했다. 지금이 도전을 할 최적 타이밍이고, 그래서 초연하게 뛰어든다는 뜻이다.
이어 "정말 무거운 자리, 책임감이 큰 자리 아닌가. 그런데 '내가 하고 싶다? 이제 할 때가 됐다? 다음 스텝은 이거다?'라고 계획하고 가는 것은 아니라고 봤다"고 덧붙였다.
유승민 전 IOC 위원 겸 전 대한탁구협회장이 지난 26일 서울 서초구 개인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양재동, 고아라 기자
현역 시절 중국 선수들처럼 타깃이 몇 명으로 압축된 경쟁도 아니다. IOC 선수위원 선거처럼 10~20대 또래 선수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도 아니다. 선거인단은 2000여명(예상) 정도지만 10대부터 70대까지, 또 서울부터 제주까지 한국 체육에 연관된 모든 이들을 모두 설득하는, 결코 쉽지 않은 자리다. 3선 도전을 공식 선언하진 않았으나 이기흥 현 대한체육회장 등 만만치 않은 경쟁자들도 여럿 될 것으로 보인다.
유승민은 "어려우니까 더 재밌다"며 미소 지었다.
그는 "내가 마음이 섰고 헌신할 준비가 됐다면 어떤 길이라도 가야 한다고 보고 있다"며 "그런데 그 때가 지금인 것 같다. 아테네 올림픽을 위해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을 나간 것은 아니지 않나. 시드니 대회를 다녀오면서 아테네 대회도 도전하게 된 것이다. IOC 선수위원도, 대한탁구협회장도 '지금이 시기'라고 생각해 출마했다. 대한체육회장도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유승민(가운데)이 지난 2004년 8월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린 아테네 하계올림픽 탁구 남자단식에서 우승한 뒤 시상식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고 왕하오(왼쪽), 왕리친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선수들에 감동하고 국민들에 감동받고…이제 행정이 감동 줄 차례"
지난달 끝난 파리 올림픽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출국 전만 해도 금메달 5~6개를 기록, 도쿄 올림픽과 비슷한 성적을 내 한국 엘리트 체육의 내리막길을 재확인하는 무대가 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금13 은9 동10을 획득하며 역대 올림픽 최다 메달 쾌거를 달성했다. 순위도 세계 8위를 차지하며 톱10 안에 들었다. 선수들이 대한민국의 여름 밤을 환하게 만들었다.
유승민은 어려운 가운데 당차게 도전해 성취한 후배 선수들의 노력에 박수를 보냈다. 그들의 피와 땀이 대반전의 원동력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감동한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새벽까지 선수들의 몸짓 하나에 울고 웃었던 국민들의 응원 열기에도 놀랐고 감탄했다.
"우리 선수들 대단했다"는 유승민은 "대한민국에서 TV를 시청하고 응원한 국민들도 정말 대단했다"고 했다. "새벽에도 잠 안 자고 선수들 지지하는 모습을 보면서 시대가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선수들이 승패에 상관 없이, 오히려 승패보다 더 멋진 모습을 필드 안에서는 물론 밖에서도 보여주지 않았나. 성숙한 선수들과 지도자들의 모습이 국민들에게 벅찬 감동을 선물했다"고 평가했다.
전 탁구 국가대표 유승민이 지난 2016년 8월 브라질 리우에서 열린 IOC 선수위원 선거에 당선된 뒤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 앞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최고 수준의 선수와 지도자들, 아낌 없이 성원한 국민들의 모습이 모두 훌륭했다. 여기에 '체육 행정'까지 보조를 맞춘다면 한국 스포츠에 새 기회가 열릴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유승민은 "체육이 변하고 있다. 행정도 변해야 한다. 에너지 넘치는, 또 투명한 행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활, 총, 칼 3종목에서 파리 올림픽 금메달 13개 중 10개가 나오지 않았나. 그래서 이번 올림픽 성적 갖고 낙관해서도 안 되고 비관해서도 안 된다. 4년 뒤 2028 올림픽도 준비해야 하지만, 8년, 12년 뒤 올림픽도 대비해야하지 않을까란 판단도 했다"고 밝혔다.
엘리트와 생활체육의 선순환, 어느 나라를 롤모델로 삼기보단 한국적 특성에 맞는 'K-스포츠 모델'을 그가 주창하는 이유다.
그는 "출생률 줄어들고 운동할 만한 학생들 부족한 현실을 고려하면 결국 생활체육 혹은 클럽에서 선수들을 뽑아낼 수 있는 선순환 구조가 필요한데, 지금은 이 것 아니면 저 것으로 생각하는 방식이 너무 많다. 클럽을 밀어서 학원 체육이 외면받고, 학원 체육 살린다고 클럽이 부정당하는 상황을 조정한다면 새 모델이 나올 수 있다"고 했다.
유승민 IOC 위원이 2018년 2월 평창에서 열린 평창 올림픽 행사에 김연아와 함께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와 갈등, 대기업 지원…"왕하오 이길 때처럼 풀어보겠다"
대한체육회장이 되면 'K-스포츠 모델'을 만들어 보겠다고 결심한 이유다. 그는 현역 시절 엘리트와 생활체육이 공존하는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거꾸로 엘리트 선수들끼리의 경쟁이 확실한 중국에서도 뛰었다.
그는 "수능이라는 제도가 있으니 한국 만의 입시제도가 자리잡은 것 아니냐. 그 안에서 다양한 학습 방법이 나오고 인재들도 나온다"며 "누군가는 체육계가 미국, 일본 혹은 독일을 따라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 나라들과 한국은 규정도 다르고 현실도 다르다. 남자 선수들은 군대에도 다녀와야 한다. 난 우리 사정에 맞는 K-모델을 만들 수 있다고 본다"고 했다.
물론, 유승민이 구상하는 한국 체육의 새 전성기는 그의 아이디어만 갖고 이뤄질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그런 면에서 유승민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정부와 체육계의 갈등, 대기업 등의 지원 부족 등을 적극적으로 풀어나가겠다고 밝혔다. 서로 마음을 열고 소통하면 빠르게 해결될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유승민은 이를 아테네 올림픽에서 왕하오 이겼을 때의 전략에 비유해 차근차근 설명했다.
유승민 대한탁구협회장이 지난 8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파리 하계올림픽 탁구 여자단체전 시상식에서 한국 여자대표팀 선수들에게 동메달을 걸어주고 있다. 연합뉴스
"왕하오와 결승전할 때 공격 점유율이 90%였다. 그러나 10%에 해당하는 수비 등 나머지 기술들을 다양하게 썼는데 돌아보니 그게 킬링 포인트였다"며 "그렇게 하면 지금의 논란들도 풀고 또 우리 쪽으로 지원을 끌고 올 수 있다"고 했다. 때로는 공세를 누그러트리고 만나서 대화하면 체육계와 체육인들을 위한 더 좋은 답이 나올 수 있다는 의미다.
그는 "파리 올림픽 좋은 성적으로 한국 스포츠가 특수를 누려야 할 시기 아닌가. 경기단체들도 마찬가지다. 후원 계약도 많이 들어오고 분위기도 확 살아나야 할 시기인데 다들 죄인처럼 숨죽이고 있다. 이 현실이 너무 안타깝고 울분이 터진다"고 개탄하면서도 "뛰어다니기 나름이다. 이제 기업 후원도 가치만을 추구하는 시대는 아니지 않나. 기업이 스포츠 단체나 선수에게 돈을 쓰면 실리적으로도 충분히 보상 받을 수 있는 그런 시스템을 구현하고 싶다"고 했다.
유승민의 대한체육회장 출마 결심은 대한탁구협회장 시절 각광 받았던 행정이 큰 힘이 됐다.
탁구협회장 시절 세계탁구선수권과 아시아탁구선수권 유치는 물론, 재임 5년간 10여개 넘는 기업들에 총 100억원 이상의 후원 계약을 이끌어내 한국 탁구 부활의 토대를 닦았다. 파리 올림픽에서 선수들이 선수촌 숙소와 '찜통 버스'로 곤란해하자 거처를 즉시 외부로 옮긴 것도 화제였다. 혼합복식과 여자단체전에서 연이어 동메달을 획득, 12년 만에 한국 탁구가 올림픽 시상대에 복귀한 것은 '유승민 탁구협회장 시대'의 클라이맥스였다.
그는 "선수 시절 경험을 떠올렸다"며 "현장이 필요한 것을 요청하고, 그에 대해 탁구협회가 바로바로 응답을 해주면 좋은 경기력이 나오더라. 나 역시 탁구협회장으로서 1분 1초도 지체할 수가 없었다. 파리에 대접 받으려고 가는 거 아니다. 선수들이 모든 에너지를 올림픽이란 최고 무대에서 경기력 발휘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나라도 더하려 했다"고 회상했다.
유승민 IOC 선수위원 및 대한탁구협회장이 지난 7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파리 올림픽 기간 중 여자대표팀 에이스 신유빈과 탁구 시범을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최저학력제 최선인가…폐지 적극 추진하겠다"
최근 체육 현장은 초·중학교 선수들의 최저학력제 시행으로 뒤숭숭하다.
현행 학교체육진흥법은 학생선수가 일정 수준의 최저학력에 도달하지 못할 경우 경기대회 출전을 제한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제도는 올해 1학기부터 시행될 예정이었으나, 현장 준비 부족으로 유예된 뒤 2학기인 9월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체육계에선 이 제도 시행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초·중학생 선수들의 경우 최저학력 기준 미달 시 구제 방안이 없어 일부 선수들의 경우 소년체전 선발전 및 본선 등 주요 대회 출전에 제약을 받을 가능성이 커졌다.
유승민은 이 사안에 대해 명확한 목소리를 냈다. "대한체육회장이 되면 최저학력제 폐지를 적극 추진하겠다. 선수들의 미래를 위해 필요하다"고 즉각 답변했다. 그리고는 쓴소리를 쏟아냈다.
"우리가 죄졌나요? 운동하는 학생들이 불평등한 일을 겪고 있다. 인권, 인권 운운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인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유승민은 "아이들이 공부보다 운동에 더 투자하고 싶다는데 왜 그걸 굳이 '최저학력제'라는 프레임에 가둬놓고 대회에도 출전하지 못하게 하나"라고 외쳤다,
그는 이어 "현장은 지금 그런 말도 안 되는 정책 때문에 아비규환이다. 우리가 죄인이 아닌데 내가 정말 화가 난다"고 덧붙였다.
유승민 전 IOC 위원 겸 전 대한탁구협회장이 지난 26일 서울 서초구 개인 사무실에서 엑스포츠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양재동, 고아라 기자
체육계 일각에선 엘리트 선수들과 'K-팝' 아이돌 길러내는 시스템이 똑같은데 왜 운동 선수들에게만 이런 규제를 두는 거냐고 반발하고 있다.
유승민 역시 동의했다. "왜 운동 선수들이 대회 나가는 것에 대해 법원의 판단을 받아야 하나"라며 다시 화를 낸 그는 "대회 출전을 현장체험학습으로 인정받을 명분이 충분히 있는데 그것도 막아놨다. 지금 학생 선수들이 수업을 다 받고 있다. 오후 5시20분에 다른 학생들이 학원을 가는 것처럼 선수들은 그 때부터 훈련하고 땀을 흘리는데 왜 운동 선수들만 옥죄는지 속이 상한다"라고 했다.
이어 "지금도 운동과 공부를 함께 잘하는 학생들이 있지 않나. 그들 역시 자율적으로 운동, 공부 투자 비중을 설정하는 것이다. 최저학력제 폐지를 넘어 학생 선수들이 외국어 등 자신이 필요로 하는 공부를 선택할 수 있게 하는 시스템 구축에 힘쓰겠다"고 약속했다.
자신이 구상하는 2032년, 2036년 올림픽 준비를 위해서도 최저학력제 폐지는 필요하다는 게 유승민의 생각이다.
"2028 올림픽은 지금 선수들로 어떻게든 준비할 수 있지만 8년 뒤, 12년 뒤 올림픽도 있지 않느냐"는 그는 "국제대회에 태극마크를 달고 나가는 선수들이 좋은 기량을 펼치면 그게 생활체육 인구 증가로도 이어지고 결과적으로 관련 산업 발전에도 도움이 된다. 국제대회 성적 필요없다고 하시는 분들이 성적 나쁘면 가장 먼저 질책하는 것도 이해가 되질 않는다"고 했다.
유승민 회장이 결국 추구하는 대한체육회장은 현장을 신나게 하는 체육회장이다. 그는 "선수 중심, 지도자 중심이란 말이 있는데 결국 그게 다 현장 아니겠느냐. 현장에는 생활체육 동호인들도 포함된다"며 "현장이 무너졌는데 체육이 잘 될 수가 없다. 집행부가 잘 돌아가는 게 아닌, 현장이 잘 돌아가는, 현장을 신나게 하는 게 바로 행정의 역할"이라며 '현장 퍼스트'를 약속했다.
유승민(오른쪽)이 2012 런던 올림픽 남자 단체전에서 은메달을 거머쥔 뒤 주세혁(왼쪽), 오상은 등 남자대표팀 등료들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진=양재동, 고아라 기자 / 연합뉴스
김현기 기자 spitfire@xports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