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노트북]에서는 그 동안 인터뷰 현장에서 만났던 배우들과의 대화 중 기사에 더 자세히 담지 못해 아쉬웠던, 하지만 기억 속에 쭉 남아있던 한 마디를 노트북 속 메모장에서 다시 꺼내 되짚어봅니다. [편집자주]
(엑스포츠뉴스 김유진 기자)
"돈 받고 연기하는데, 잘 해야죠. 여러 사람 앞에서 실수를 안 하고, 걱정을 안 끼치고 싶은 마음이에요. 첫 번째에 딱 완벽하게 연기해서 OK가 난다면 제일 행복하죠. 그런데 뭔가 잘 안 되는 것 같고, '다시 한 번 하시죠' 이러면 슬슬 멘탈이 털리기 시작하고요.(웃음) 그걸 티 안내려고 하다 보니 '어려워'란 말도 못하고, 그러다보면 쓸쓸해지고 외로워지고…(웃음)" (2018.08.02. '공작' 인터뷰 중)
2022년의 끝자락은 배우 이성민의 연기를 보며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이성민은 지난 해 11월 18일부터 12월 25일까지 방송된 JTBC 금토일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순양그룹의 창업주이자 회장인 진양철 역을 맡아 열연하며 호평을 받았죠.
냉철하고 엄격한 진양철이라는 인물을 화면 위에 누구보다 뜨겁게 그려낸 이성민의 호연은 '재벌집 막내아들'에 활력을 불어넣는 가장 큰 힘이 됐습니다.
특히 11회에서 진양철이 섬망(일시적으로 갑작스레 나타나는 혼란한 정신 상태, 의식 장애의 하나) 증상을 보이며 손자 진도준(송중기 분)과 마주한 장면은 아직까지도 많은 시청자들에게 최고의 연기로 회자되고 있죠.
1985년 연극 무대에서부터 시작된 탄탄한 내공을 바탕으로 드라마와 영화까지 활동의 폭을 넓혀 온 이성민은 2014년 방송된 tvN 드라마 '미생'의 오상식 과장 역으로 시청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2016년 1월 개봉한 '로봇, 소리'로 스크린에서도 첫 원톱 주연을 꿰차며 존재감을 더해왔습니다.
최근까지도 '재벌집 막내아들'을 비롯해 영화 '리멤버', '대외비'까지 꾸준한 활동을 이어왔죠.
그런 이성민에게 2018년은 매우 바빴지만, 또 그만큼 안팎으로 의미 있는 다양한 경험을 했던 시간들이기도 했습니다. 이성민의 주연작 영화 '공작'과 '목격자'가 각각 8월 8일과 8월 15일, 일주일 간격으로 개봉하며 누구보다 꽉 찬 일정을 소화하게 됐죠.
'공작'은 1990년대 중반 흑금성이라는 암호명으로 북핵의 실체를 파헤치던 안기부 스파이가 남북 고위층 사이의 은밀한 거래를 감지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첩보극으로, 이성민은 북한의 외화벌이를 책임지고 있는 대외경제위 처장 리명운 역을 맡아 몰입감 높은 연기를 선보였습니다.
특히 '공작'이 그 해 5월 열린 제71회 칸국제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부문에 초청되며 이성민은 처음으로 칸 레드카펫을 밟기도 했죠. '공작' 속 호연을 인정받으며 이듬해 열린 제55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등 5관왕을 휩쓸기도 했습니다.
취재진과도 '공작'과 '목격자' 개봉을 앞두고 각각 인터뷰를 가지며 어느 때보다 많은 만남을 가지기도 했었죠. '공작' 개봉을 앞두고 마주했던 이성민은 "8월에는 하루도 쉬는 날이 없더라고요. 감기에 안 걸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죠 있죠. 영화가 잘 된다면 쉬지 못해도, 잠을 못자도 안 피곤할 텐데"라고 웃으며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이성민과의 대화 속에서는 연기에 대해 얘기할 때 누구보다 진심인 속내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배우라는 직업을 언급해야 할 때면 정말 자신이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일'이자, 어느 것보다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바라보려는 시선으로 말하곤 했죠.
'공작'을 함께 했던 윤종빈 감독, 황정민, 조진웅 등과 치열하게 임했던 현장을 떠올린 이성민은 '늘 폐를 끼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었다고 말하면서 "여러 사람 앞에서 실수를 안 하고, 걱정을 안 끼치고 싶은 마음이에요. 첫 번째에 딱 완벽하게 연기해서 OK가 난다면 제일 행복하죠. 그런데 뭔가 잘 안 되는 것 같고, '다시 한 번 하시죠' 이러면 슬슬 멘탈이 털리기 시작하고요"라며 껄껄 웃었습니다.
"그걸 티 안내려고 하다 보니 '어려워'란 말도 못하고, 그러다보면 쓸쓸해지고 외로워지고…(웃음) 그러다가, 어느 날 들리는 소문에 (조)진웅이도 똑같이 어려워하고 있다 하더라고요. 진웅이가 '형, 나도 그래요'라고 말하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너무 마음이 편안해졌죠.(웃음) 나중에는 감독님까지 서로 고해를 하는 시간이 됐죠."
이성민의 말을 들으며 '다른 촬영장에서도 이렇게 좀 어렵다는 말을 하기 어려워하는지, '공작' 현장이 유독 그랬는지' 물음을 이어갔습니다. 이성민은 "대개 그렇죠. 돈 받고 연기하는데, 잘 해야죠"라며 멋쩍게 미소 지었죠.
TV 화면과 영화 속 스크린 안에서는 누구보다 자유롭게 캐릭터를 펼치던 이성민이지만, 인터뷰 자리에서 다소 낯을 가리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영화로는 첫 원톱 주연이었던 '로봇, 소리'로 취재진을 마주했을 때는 속내와는 다른 짧은 단답형 답으로 본의 아니게 누구보다 긴장하고, 떨리는 마음을 드러내기도 했었죠.
몇 년이 지난 시간의 흐름 속, 인터뷰에서 연기를 포함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을 조금은 어려워하던 이성민도 이제는 한층 더 여유를 찾은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가장 최근 개봉했던 '대외비' 인터뷰로 지난 2월 말 다시 반갑게 마주했던 이성민은 코로나19 팬데믹을 지나 그동안 열심히 촬영했던 작품들이 한 편씩 관객들을 만날 수 있음에 안도하며 더욱 편안해진 얼굴로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세상에는 배우의 숫자만큼 배우의 연기 방법과 캐릭터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배우를 만나든, 어울려서 조화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해야죠. 연기라는 것은, 서로 인정하는 것이 시작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그렇게 나를 알아가는 것이 배우의 길인 것 같고요. 저도 제가 30대였을 때는 내가 누군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에 대해 알아가게 되는 것 같아요.
내가 어떤 성격을 갖고 있고, 어떤 목소리와 자세, 어떤 정서의 사람인가를 알아가는 것 아닐까 싶죠. 그러면서 캐릭터와 나를 확실하게 구분해나갈 수 있게 됐어요. 어릴 때는 그러지 못했거든요. 배우가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그렇게 자기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 같아서, 그게 장점이 된 것 같아요. 이제는 어떤 분장을 더하지 않아도, 캐릭터와 나를 구분해낼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것이죠.(웃음)"
'대외비'와 연기 이야기를 누구보다 진지하면서도 편안하게 털어놓은 이성민은, 2월 당시에도 여전히 화제의 중심이었던 '재벌집 막내아들'을 마친 소회까지 전하며 예정된 인터뷰 시간이 지났음에도 "5분만 더 이야기하시죠"라면서 너스레를 떨었죠.
몇 년 전만 해도 인터뷰 자리에서 어색함을 감추지 못했던 이성민이 자발적으로 대화를 더 하고 싶다고 말하는 의욕적인 모습에 현장에 함께 있던 모두가 놀라워하며 웃음 짓기도 했습니다.
당시 점심시간을 앞두고 있던 때였기에, 배우가 점심을 챙겨야 하는 시간을 신경 쓰는 관계자에게는 "가서 바로 먹을 수 있게, 미리 시켜놓으면 되지 않을까요?"라고 제안하며 영화 개봉 전 인터뷰 시스템을 한층 더 완벽히 숙지한 태도로 다시 한 번 웃음을 더했죠.
스스로도 "이제는 이런 자리(인터뷰)가 많이 편해졌다"고 말하는 이성민에게서 시간이 지날수록 연기는 물론, 삶을 바라보는 시선까지 점점 더 쌓여가는 여유로움이 엿보입니다.
이성민의 반가운 모습은 지난 28일 열린 제69회 백상예술대상을 통해 다시 한 번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이성민은 '재벌집 막내아들'로 TV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하며 공들였던 노력의 한 순간을 인정받았죠.
자신은 물론 가족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쑥스러워하던 이성민은 소감 말미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없는데, 저희 딸이 느닷없이 '꼭 받으라'고 응원을 해줬습니다. 딸 사랑하고, 사람답게 일하고 있어서 고맙고 아빠는 늘 행복하단다. 우리 딸, 집사람 고맙습니다"라며 가족을 향한 고마움을 수줍게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2022년의 마무리, 2023년의 시작과 4월의 마지막까지 기분 좋게 마무리 한 이성민은 새 드라마 '형사록2', '운수 오진 날'과 영화 '핸섬가이즈' 등 차기작으로 꾸준히 대중을 만날 예정입니다.
사진 = 엑스포츠뉴스DB, 각 영화 스틸컷, JTBC·tvN 방송화면
김유진 기자 slowlife@xports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