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1.03.14 03:03 / 기사수정 2011.03.14 03:03
[위클리엑츠=한만성의 월드뉴스]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얘기라고? 결코, 그렇지 않다. 두 여자가 각자의 팀을 대표하는 선발 투수로서, 그것도 자신들보다 몸집이 두 배는 돼 보이는 남자 선수들 사이에서 당당히 맞대결을 펼친 사상 초유의 경기가 열렸다. 연습 경기나 자선 경기가 아닌 공식 경기에서 여자 선수들이 양 팀의 선발 투수로 격돌한 건 200년의 야구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에서조차 처음 있는 일이다.
역사적인 경기가 열린 무대는 바로 미국 고교야구 리그다. 레이크발보아 버밍엄 고교의 마르티 세멘텔리(18)와 샌마르코스 고교의 어살레이 세일러스(17)는 각자 재학 중인 학교의 '소년' 야구부(boys' baseball team)의 간판스타가 된 '소녀'들이다. 이들은 지난 6일(이하 한국시간) 열린 두 팀간의 고교야구 정규시즌 경기에 나란히 선발투수로 마운드에 오르며 역사를 새로 썼다.
기념비적인 경기를 취재하기 위해 미국 스포츠를 대표하는 언론사인 'ESPN'은 중계 카메라를 대동했고, 경기가 열린 캘리포니아주 남서부 지역 일간지 'LA 타임스'는 컬럼니스트를 파견하며 소규모 고교야구 경기에는 걸맞지 않은 이례적인 관심을 보였다. 특히 'LA 타임스'는 세멘텔리와 세일러스의 맞대결 소식을 7일자 스포츠 섹션 1면에 실으며 대서특필했다.
세멘텔리와 세일러스는 언뜻 보면 야구모자를 푹 눌러쓴 채 남자들 사이에서 공을 던지고 있어 체구가 작은 남자 선수들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더욱이 두 선수는 각각 체인지업, 커브가 자신의 주무기라고 당당히 밝힐 수 있을 만큼 실력도 출중하다. 세멘텔리의 경우 어린 시절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보스턴 레드삭스에 입단하는 게 꿈"이라는 원대한 목표까지 공개했었다. 이제는 고교 졸업을 1년 앞둔 팀 내 최고참으로서 남자 후배들을 이끌고 있는 세멘텔리다.
세일러스 또한 타석에 들어설 때면 여학생답게 분홍색 배팅 글러브를 착용할 정도로 야구는 '남자의 스포츠'라는 편견을 뒤집겠다는 자신의 가치관에 거리낌이 없다.
이날의 경기 결과는 세멘텔리가 선발투수로 등판한 버밍엄 고교의 6-1 완승이었다. 고교야구 규정상 7이닝까지 진행된 경기에서 세멘텔리는 5안타 1실점으로 샌마르코스 고교의 타선을 틀어막으며 남자 선수들에게도 힘에 부칠만한 완투승을 해냈다. 세일러스 역시 3 1/3 이닝 동안 3안타만을 허용하며 호투했고, 타석에 들어선 7회에는 세멘텔리를 상대로 안타까지 쳤다.
미국에서 여자 아이들이 학교 야구부나 어린이 야구단(리틀 리그 베이스볼)에서 공을 던지는 건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그러나 제아무리 야구에 소질을 보이는 소녀들도 차후 성장 과정을 거치며 남자들에 비해 기본적인 순발력이나 힘과 같은 생물학적인 한계를 드러내며 소프트볼로 전향하거나 단순한 취미로 야구를 즐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세일러스와 세멘텔리도 신장이 160CM도 채 되지 않아 체격조건이 고교팀 동료인 남자 선수들과 비교해도 현저히 뒤쳐진다.
그러나 두 선수 모두 야구에 대한 열정을 버릴 수 없었단다. 세일러스는 "처음 나를 본 남자 선수들이 서로 쑥덕거리는 모습을 수없이 봐왔다. 그러나 이들은 나의 투구에 농락당하며 삼진 아웃을 당했을 때 비로소 조용해진다"며 미소를 지었다.
세멘텔리 역시 소프트볼로 전향하지 않은 데에 대해 "내가 사랑하는 걸 버리면서까지 더 쉬운 길을 택하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내게 있어 야구는 곧 새로운 역사다. 내가 좋은 활약을 펼침으로써 여자 야구선수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내 뒤의 여자 선수들은 나만큼 많은 어려움을 겪지 않았으면 한다"며 뼈 있는 한 마디를 남겼다.
세일러스도 그동안 남자 선수들로부터 감내하기 힘든 차별과 멸시를 받았다. 세일러스가 투수로 출전한 경기에서 팀 동료인 남자 선수가 여자와 같은 팀에서 뛰고 싶지 않다는 항명의 뜻으로 경기 도중 플라이볼을 잡는 걸 거부한 일도 있었다. 여자 야구선수들은 오늘도 남녀 평등시대를 주장하는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차별을 받으며 그라운드를 누비고 있다.
세멘텔리의 팀동료 케빈 토레스(18)는 이에 대해 "나 역시 마르티 (세멘텔리)가 처음 팀에 들어 왔을 때 '꼭 여자와 같이 뛰어야 하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연습 경기 도중 마르티에게 삼진아웃을 당한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며 정상급 여자 선수들의 기량은 결코 남자들에 비해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LA 타임스' 컬럼니스트 빌 플라시키도 세멘텔리와 세일러스의 실력이 편견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예사롭지 않다는 데 동의했다. 그는 "두 선수의 경기를 직접 본 결과 남자 선수들에 비해 체구가 훨씬 작은 데도 불구하고 구위가 워낙 잘 가다듬어져 있어 마치 신입생 유망주들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라며 혀를 내둘렀다.
서로 아픔을 너무나도 잘 알고 이해하는 두 선수는 비록 같은 팀에서 뛰고 있지는 않지만, 그 누구보다 돈독한 동료애로 묶인 절친한 사이다. 이들은 지난해 미국 여자 야구대표팀에 나란히 선발 돼 베네수엘라에서 열린 여자야구 월드컵에 출전하며 동메달을 목에 걸며 인연을 맺었다.
세일러스는 "마르티를 만나기 전까지는 가까운 곳에 나 말고 다른 여자선수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말하면서도, "우리는 영원한 동료이자 친구다. 조만간 대표팀에서 다시 만날 예정이다. 항상 마르티를 응원하겠다"며 동료애를 드러냈다.
야구선수의 길을 택한 두 소녀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미국에서도 과거 실업팀이나 20세기 중반의 흑인리그였던 '니그로 리그(Negro League)에 여자 선수가 몸담은 적은 있으나 모든 야구 선수들의 궁극적 목표인 메이저리그(MBL)는 여전히 여자 선수들에게 머나먼 세계일 뿐이다. 최근 추신수가 활약 중인 클래블랜드 인디언스의 배팅볼 투수(타자들의 연습을 돕는 투수)로 여자 대학 야구팀 코치가 잠시나마 활동한 게 MLB와 여자야구가 맺은 인연의 전부다.
미국은 1943년 여자프로야구(AAGPBL: All-American Girls Professional Baseball League)를 출범하며 당시 600명 이상의 여자 선수에게 프로무대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으나 11년만에 리그가 잠정 중단되며 한계를 체험했다. AAGPBL은 초창기 시절 경기당 3천여명의 유료 관중을 불러모으며 흥행에 성공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행정 미숙으로 인한 재정난을 이겨내지 못하고 리그를 존속시키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미국은 여전히 지역 단위의 실업리그들을 위주로 여자야구의 명분을 유지하고 있다.
이 외에도 미국에서는 1995년 아일라 보더스가 대학야구 무대(NCAA)를 누빈 첫 여자 선수로 활약한 데 이어 2년 후 프로야구 독립리그 팀 세인트 폴 세인츠에 입단하며 야구 역사상 남자 선수들과 같은 무대에 선 첫 여자 프로선수로 등극했고, 이듬해에는 둘루스 슈피리어 듀크스(현 캔자스 시티 티본스)로 이적해 승리 투수의 영예를 안기도 했다.
가장 최근에는 일본인 '너클 공주' 오시다 에리(18)가 2008년 일본 간사이 독립리그 고베 나인 크루즈에서 활약하다 지난해 미국 독립리그 GBL(Golden Baseball League) 소속 치코 아웃로스와 프로계약을 체결하며 세간의 관심사로 급부상했었다.
국내에서는 지난 2007년 한국여자야구연맹(WBAK)이 출범하며 여자야구가 본격적인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에 앞서 한국 최초의 여자 야구선수인 안향미 전 선라이즈(지난해 해체된 여자야구단) 감독은 고교야구 선수였던 1999년 대통령배에서 배명고를 상대로 덕수정보고의 선발투수로 등판하며 유명세를 탄 데 이어 남자 야구에 도전하겠다고 선언해 화제가 됐었다.
그러나 안향미는 고교 졸업 후 여자선수는 합숙훈련이 힘들다는 이유로 대학팀들로부터 거절을 당해 꿈을 이루는 데 실패했으나 2002년 일본 실업팀 드림윙스에 입단해 주전으로 활약했으며 2004년에는 국내 최초의 여자야구단 비밀리에를 창단시키는 족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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