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7.07.20 23:36 / 기사수정 2007.07.20 23:36
[엑스포츠뉴스=박현철 기자] '회춘'한 야마사키, 올스타 최다 득표 영예
라쿠텐의 강타자로 우뚝 선 야마사키 타케시(39.사진)가 2007' 일본프로야구 퍼시픽리그 올스타 투표 지명타자 부문에서 1,094,803표로 표를 휩쓸며 최다득표의 영예를 안았다.
비록 '라쿠텐 몰표 파문'으로 그 의미가 퇴색되긴 했지만 한때 '선수로서 가치가 없다.'라며 혹평을 받았던 야마사키의 부활은 일본 내 다른 선수들과 야구팬들에게 희망을 안겼다.
주니치의 주포에서 타선의 선풍기로
1986년 드래프트 2순위로 주니치 드래곤스에 입단한 야마자키의 원래 포지션은 포수였다. 그러나 야마자키의 수비력은 수준 이하였고 팀 내에 이미 한국계 포수 나카무라 다케시(한국명:강무지)가 있었다.
주니치는 야마자키를 1루수로 전향시키는 동시에 거포로 조련했다. 야마자키가 처음 제 기량을 펼친 것은 95년. 오치아이 히로미쓰(현 주니치 감독)가 93년 요미우리로 이적한 이후 오른손 거포에 목말랐던 주니치의 갈증은 푼 거포는 야마사키였다.
야마사키는 95년 단 66경기에서 16개의 아치를 그리는 괴력을 발휘하며 주전 1루수로 떠올랐다. 그 이듬해에는 .322 39홈런 107타점의 뛰어난 성적으로 센트럴리그 홈런왕에 오르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배트 스피드가 다른 거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었던 야마사키는 정확성 면에서도 문제를 노출했다. 2000년 배트를 짧게 잡는 방법으로 .311의 고타율을 기록하기도 했으나 장타력 외에 내세울 것이 별로 없던 야마사키는 후쿠도메 교스케가 타선의 핵으로 떠오르면서 입지가 대폭 축소됐다.
결국, 2001년부터 대타 요원으로 전락, 경기 감각을 점차 잃으면서 배트가 허공을 가르는 일이 잦아졌다. 나고야 팬들은 그에게 '선풍기 타자'라며 비아냥거렸고 2002시즌 후 오릭스 투수 히라이 마사후미와의 맞트레이드에 의해 오릭스 블루웨이브로 쫓겨났다.
2년 만의 방출, 선수생활 막바지에 부활하다
트레이드 상대 히라이는 95년 53경기 15승 27세이브의 '애니콜' 식 출장 마무리로 신인왕에 오른 뒤 혹사 후유증에 시달리며 '한물갔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한물간' 선수들끼리의 트레이드는 예상을 깨고 2003년 '윈윈 트레이드'로 평가받았다.
야마사키는 2003년 22홈런 68타점을 기록하며 나름대로 재기에 성공했다. 히라이 또한 주니치 4선발로 12승 6패를 기록, 주니치와 오릭스 모두 나름대로 남는 장사를 했다.
그러나 야마사키는 1년 만에 오릭스의 트레이드 장사를 손해로 만들었다. 당시 오릭스의 지휘봉을 쥐고 있던 이하라 하루키(현 요미우리 코치)감독은 '한 발자국 더 뛰는' 빠른 야구를 원했고 발 느린 야마사키는 그에 철저히 배제되었다.
야마사키의 2004년 성적은 .245 4홈런 20타점에 불과, 시즌 후 자유계약으로 방출되었다. 때 마침 신생팀 라쿠텐이 '썩어도 준치'라는 심정으로 야마사키에게 달려들었고 야마사키는 2005~2006' 2년간 44개의 홈런을 날리며 제 몫을 했다.
그리고 올 시즌 야마사키는 20일 현재 홈런 1위(31개), 타점 공동 1위(65점), 장타율 1위(.652)의 놀라운 활약으로 라쿠텐 타선을 이끌고 있다. 전성기에 비해 느려진 배트 스피드를 나이답지 않은 파워로 상쇄하며 상대 투수들을 고민에 빠뜨리고 있다.
야마사키에게 내세울 것이라고는 장타력밖에 없다. 그는 다른 운동능력을 키우는 대신 장타력을 더욱 특화시켜 불혹의 나이에 '제2의 전성기'를 구가 중이다. 시간이 갈수록 모든 운동능력과 기술을 갖춘 만능타자를 찾는 야구계에 '1 Tool Player' 야마사키의 부활은 신선함 그 자체이다.
<사진=ballplayers.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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