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노트북]에서는 그 동안 인터뷰 현장에서 만났던 배우들과의 대화 중 기사에 더 자세히 담지 못해 아쉬웠던, 하지만 기억 속에 쭉 남아있던 한 마디를 노트북 속 메모장에서 다시 꺼내 되짚어봅니다. [편집자주]
[엑스포츠뉴스 김유진 기자]
"시나리오가 내 마음을 움직인 것처럼, 관객들도 나처럼 마음이 움직여졌으면 하는 것이죠. 나는 벌써 늙어서, 나를 힘들게 하는 영화는 싫어요. 늙으면 달라지는 게 뭔지 아세요? 그냥 평온하고 싶어요. '사운드 오브 뮤직'처럼 판타지지만 아름다운 이야기를 보고 싶죠. 내가 산 세월이 너무 끔찍했기 때문에 영화는 좀 아름답고 예쁜 얘기가 보고 싶지, 막 이렇게 피 튀기고 손 자르고 그런 것은 못 봐요." (2016.05.09. '계춘할망' 인터뷰 중)
배우 윤여정의 거침없는 행보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1966년 TBC 3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 이후 50년을 훌쩍 넘어 한국을 대표하는 베테랑 배우로 대중과 호흡하고 있죠. 한국 나이로 일흔 네 살인 윤여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활발한 작품 활동으로 진가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2016년 5월, 영화 '계춘할망'(감독 창)으로 윤여정을 만났습니다. '계춘할망'에서 윤여정은 하루 종일 손녀 생각뿐인 평범하고 소박한 제주도 할머니이자 베테랑 해녀 역할을 연기하며 관객들에게 따뜻함을 안겼죠.
윤여정은 "그냥 바람이 있다면, 시나리오가 내 마음을 움직인 것처럼, 관객들도 나처럼 마음이 움직여졌으면 하는 것이죠"라며 "나는 벌써 늙어서, 나를 힘들게 하는 영화는 싫어요"라고 담담하게 얘기했습니다.
"김지운 감독이 '선생님이 제 영화 싫어하신다'고 하는데, 난 그걸 싫어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들은 아직 젊어서 몰라요.(웃음) 늙으면 달라지는 게 뭔지 아세요? 그냥 평온하고 싶어요. '사운드 오브 뮤직'처럼 판타지지만 아름다운 이야기를 보고 싶지, 자극적이고 그런 것은 못 봐요. 내가 산 세월이 너무 끔찍했기 때문에 영화는 좀 아름답고 예쁜 얘기가 보고 싶지, 막 이렇게 피 튀기고 손 자르고 그런 것은 못 봐요. 총 쏘는 것은 볼 수 있는데, 칼만 나와도 못 보거든요. 제가 영화관에 갈 때 손수건을 갖고 가는 이유가, 울려고 갖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런 장면들이 나오면 가리려고 그런 것이에요.(웃음)"
윤여정은 지난 달 제25회 부산국제영화제 갈라 프레젠테이션에 초청된 영화 '미나리'의 기자회견에서도 작품 선택 이유에 대해 "저는 나이가 많아서, 지금은 작품이 어떻다 하는 것보다도 사람을 보고 일을 한다"고 자신만의 작품 선택 소신을 솔직하게 전하기도 했습니다.
흐르는 세월을 담담하게 마주하며, 누구보다 자연스럽게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윤여정의 모습은 '50년' 경력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같은 해 영화 '죽여주는 여자' 인터뷰에서도 윤여정은 연기 경력을 언급하며 "50년 따지는 것 싫어한다. 자꾸 50년, 50년 그러면 듣는 50년 기분 나쁘다"고 특유의 솔직한 화법으로 너스레를 떨어 웃음을 안겼죠. "일 안하고 놀면 뭐하냐"며 "재밌게 살다 가고 싶다"고 연기 활동을 향한 의지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올 한해에도 윤여정은 3월 종영한 MBC 토요드라마 '두 번은 없다'를 비롯해 영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찬실이는 복도 많지'로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이제는 한국을 넘어 세계의 관객들에게도 각인될 윤여정의 활약을 볼 날도 멀지 않았습니다. 지난 13일에는 윤여정이 '미나리'로 미국 독립영화 시상식인 2020 미국 고섬어워즈 최우수 여자연기상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이 전해졌죠. 또 글로벌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OTT) 애플TV플러스의 드라마 '파친코'에 합류한다는 내용까지 더해지며 내년까지 이어질 활발한 행보를 예고했습니다.
이미 일찍이 윤여정은 '미나리'로 2021년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조연상 유력 후보에 거론되는 등 기대를 높이고 있죠. 윤여정은 "이렇게 후보에 오를 것이라고 하다가 못 올라가면 못한 것이 되는 것 아니냐. 굉장히 곤란하게 됐다"고 난감해했지만, 이 언급만으로도 윤여정은 자신의 존재감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그의 발걸음을 향한 응원을 계속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삶과 작품을 바라보는 담담하고 당당한 마음, 또 그것을 연기 속에 자연스레 녹여 대중과 공감할 수 있는 윤여정만이 가진 베테랑의 힘을 더 오랫동안 좋은 작품 속에서 볼 수 있길 바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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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진 기자 slowlife@xports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