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최종편집일 2024-12-02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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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겨울. 안녕, 징크스.

기사입력 2007.03.05 13:08 / 기사수정 2007.03.05 13:08

김민숙 기자

[엑스포츠뉴스=김민숙기자] 2007년 3월 4일, 수원 월드컵 경기장에는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화창한 봄날의 개막전을 기대하고 있던 나는 아침부터 내리는 비에 잔뜩 눈살을 찌푸려야 했다. 비가 내림으로 해서 경기를 보는 데 따르는 불편은 커졌다. 우산을 접어든 채 버스를 타는 일은 개운치 않았고, 경기장에 들어선 후에는 비를 피하고 싶은 기분에 개막전의 설렘을 마음껏 누릴 수가 없었다. 

사실 대전의 홈경기를 좋아하는 나는 빅 버드(big bird, 수원 월드컵 경기장의 애칭)보다 좀 더 따뜻한 퍼플 아레나(purple arena, 대전 월드컵 경기장의 애칭)의 공기에 길들어져 있었다. 그래서 내가 느끼기에 빅 버드에는 아직 봄이 오지 않은 듯했다. 3월이라고는 하지만 봄이라는 말이 너무나 무색했다. 그리고 봄이 오지 않았으므로 축구 역시 시작하지 말아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녹색 잔디를 내려다보니, 그 위에는 내 팀의 선수들이 이미 몸을 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내 선수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내 마음에 이상하게도 불안 같은 것이 아주 잠깐 깃들였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이 경기를 아직 시작하지 말아야 할 것 같은 불안이었다. 나는 봄이 온 곳에서 새로운 시즌을 시작하고 싶었다. 이 춥고 스산한 곳에서 내 선수들이 첫 경기를 가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 수 있다면 화창한 봄날, 아름다운 퍼플 아레나에서, 대전의 시민들과 함께 시즌의 첫 경기를 가지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내 마음과는 무관하게, 이 경기를 다음으로 미룬다거나 좀 더 따뜻한 날이 올 때까지 기다리게 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나는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휘슬이 울렸을 때 아주 크게 세 번 손뼉을 쳤다. 내 팀의 승리를 기원하는 박수였다. 내 마음에 깃들였던 불안을 잊어버리기 위한 박수이기도 했다.

사실 불안이 생겨난 이유는 상대가 다름 아닌 수원 삼성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도 모르지는 않았다. 

수원은 언제나 강하고 화려했다. 나는 그러한 수원에 대전이 쉽게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수원에 쉽게 이길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지도 않았다. 만약 수원이 대전을 상대로 하여 그토록 약한 모습을 보이지만 않았다면, 나는 수원에 반드시 승리하기를 바라는 마음 같은 건 품지 않았을 터였다. 시작은 대전 징크스에 발목을 잡혀 버린 수원에서 비롯되었다.

그렇지만, 언젠가부터, 수원의 징크스가 대전의 발목도 잡아 버렸다. 대전팬들은 대전 시티즌이 가진 열악한 조건과 그로 인한 한계를 알고 있었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재정 문제는 ‘최초의 시민 팀이라는 자부심’에 대한 대가처럼 창단 이후 내내 대전을 괴롭히고 힘들게 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대부분의 대전팬이 그러하듯, 내 팀의 선수들에게 무리한 승리를 요구하지 않았다.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것만으로 박수를 보내줄 수 있는 여유가 내게는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수원과의 만남에서는 그런 여유를 가질 수가 없게 되었다. 승리하고 싶어졌다. 승리해왔기 때문에, 계속해서 승리하고만 싶었다. 그리고 그것은 안타깝게도 대전에 역시 짐이 되었다. 징크스에 걸린 것은 비단 승리하지 못하는 수원만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대전 역시 이 징크스에 걸린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초조하고 불안했다. 순위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겠다고 생각해 온 내가, 단 한 번의 경기에 일희일비할 것 같은 마음이 되어있었다. ‘만약 이 경기에서 진다면?’ 이라는 문장만 떠올려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세상의 모든 행운이 지금 이 순간이 자리로 몰려와 내 팀의 머리 위로 우수수 떨어지길 바랐다. 문득 ‘이 경기에서만 승리할 수 있다면 신을 믿어도 좋다.’라는 생각도 들었다. 갑자기 어떤 신에게라도 좋으니 기도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나는 제대로 믿어본 적도 없는 신들에게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승리하게 해 주세요. 승리하게 해 주세요. 부디, 이 경기에서만은 승리하게 해 주세요!’

그렇지만, 승리를 가져다주는 것은 행운이 아니었다. 신들 또한 신앙심 없는 한 변덕스러운 축구팬의 기도 따위에 귀를 기울여주진 않았다. 그리하여 결국 대전은 패배했다. 대전은, 패.배.했다.

나는 경기의 끝을 알리는 휘슬 소리를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4년 만에 우리에게서 얻은 승리로 인해, 상대가 기뻐하는 환호성 같은 건 듣고 싶지 않았다. 급하게 경기장을 빠져나오자 내가 그토록 좋아하던 녹색 잔디는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내 앞에 남은 것은 ‘이 패배로 인한 분노를 어떻게 다스리면 좋을까?’라는 물음뿐이었다.  

빅버드를 빠져나오니, 경기가 시작할 당시보다 더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몇 걸음 채 옮기기도 전에 금세 옷이 젖어들었고, 나는 추위에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니 세상은 아직도 겨울이었다. 수원의 어느 곳에도 아직 봄은 오지 않은 듯했다.  

‘3월인데, 대체 봄은 언제 오는 걸까?’

하루종일 계속되는 비와 바람이 지긋지긋해 나는 문득 패배도 잊고 봄에 대한 생각을 떠올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생각이 났다. 우리는 호된 신고식을 치른 셈이었다.

아직 온전하게 봄이 오지도 않은 도시에서, 춥고 스산한 공기를 마시며,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고, 그 도시를 통째로 날려버릴 것 같은 상대팀 서포터들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대전은 올 시즌의 호된 신고식을 치른 셈이었다. 그리고 그 신고식 덕분에, 대전은 그 지긋지긋하던 징크스로부터 벗어났다. 

그것은 대전에도 분명히 징크스였다. 수원에 반드시 승리하고자 하는 마음은 짐이 되었고, 나는 때때로 그 짐으로부터 홀가분해지고 싶었다. 그렇지만, 징크스가 계속될수록 승리하고자 하는 욕구도 점점 더 커졌기 때문에 결국 그 징크스가 무겁다는 사실은 외면해야만 했다. 징크스에 사로잡히고 싶지 않았지만, 징크스가 깨지는 것도 두려웠다.  

하지만, 이제 그 징크스는 드디어 끝이 났다. 더 이상은 수원전을 앞두고 며칠 전부터 긴장하는 일은 없을 듯했다.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내 선수들에게 ‘반드시 승리해 달라.’는 부탁 같은 것 역시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승리하고자 하는 마음이 오히려 부담이 될 이유도 없어졌고, 한 번의 패배로 인해 지나치게 상심할 필요도 없게 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나는 문득 웃음이 났다. 그리고 ‘이 패배가 100% 나쁘지만은 않구나.’라는 생각을 하는데, 문득 희뿌연 하늘 사이에서 보일 듯 말 듯한 햇빛이 보였다. 아직 비가 내리고 있었고 바람은 거셌지만, 그 햇빛은 분명히 봄의 것이었다. 춥고 스산했던 수원에도 봄이 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바랐다. 열흘 후에는 이 도시에도 완연한 봄이 와있기를. 그리하여 열흘 후에 대전이 다시 이 도시를 찾았을 때는 화창한 봄의 햇살이 내리쬐고 있기를. 그렇게 길었던 겨울과 안녕하고, 또 그만큼 길었던 징크스와도 안녕한 다음, 이제 다시 수원과 제대로 경기할 수 있기를. 

징크스 따위에 발목이 묶이지 않은 두 팀이, 다시 처음과 같이 만나 처음과 같은 기분으로 처음처럼  달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이제 겨울과 안녕 하는 것처럼, 징크스와도 안녕하면서 말이다.



김민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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