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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바토크 ⑨] 브라질 최고의 보석, 축구 황제 호나우두

기사입력 2010.01.07 01:12 / 기사수정 2010.01.07 01:12

박문수 기자

"축구는 영국이 만들었지만, 브라질에 의해 완성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축구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도 브라질이 세계 최고의 축구팀이란 사실을 쉽게 인정하며, 무의식적으로 인식된 브라질 축구의 강력함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 오래된 관습으로 자리매김했지요. '엑스포츠뉴스'는 매주 목요일 본지 박문수 기자를 통해 브라질 축구에 대한 깊이 있는 정보를 제공하는 연재물 '삼바 토크'를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 드립니다. [편집자 주]



[엑스포츠뉴스=박문수 기자] 지난 10년간 세계 축구의 주름을 잡은 선수는 많다.

프랑스의 상승세를 주도한 지네딘 지단과 왼발의 황제 히바우두, 축구계의 외계인 호나우지뉴,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면서 세계 최고의 이적료를 경신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등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그럼에도, 필자는 월드컵 최다 득점을 경신하며 놀라운 득점력으로 축구팬을 매료시킨 호나우두를 최고의 선수로 꼽고 싶다. 게다가 호나우두는 지난 1일(한국시간) 축구 온라인 매체 골 닷컴에서 지난 10년 동안 각자의 포지션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친 선수들을 선정한 투표에서 절반의 득표를 얻으며 아직까지 많은 팬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입증했다.

그렇다면, 이번 삼바토크 9편은 -호나우두를 상징하는 등번호 9번과 일치하는 점에서- 축구황제 호나우두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1976년 9월22일은 리우 데 자네이로의 빈민가에서 축구황제로 등극할 '호나우두'가 태어난 날이다. 지독한 가난으로 고생한 호나우두는 어린 시절 플라멩고 입단 기회를 얻었지만, 모자란 차비 때문에 포기했었다. 우여곡절 끝에 자일지뉴의 눈에 포착되는 행운을 가졌지만, 그는 훌륭한 축구 재능을 지닌 어린 아이에 불과했다. 펠레, 가린샤 등과 함께 브라질의 전설적인 선수로 불리는 자일지뉴는 어린 호나우두의 재능을 높게 평가하며 그의 원만한 선수 생활에 물꼬를 튼 인물이다.

1986년 테니스 클럽 바우케이레라는 유소년 축구팀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한 어린 호나우두는 천부적인 재능을 바탕으로 1993년에 브라질 명문 클럽 크루제이로와 정식 계약을 맺게 되었다. 16살이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호나우두는 브라질 전국리그에서 폭발적인 득점력으로 제2의 펠레라는 찬사를 얻기 시작한다. 이러한 그의 활약은 1994년 FIFA 미국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한 브라질 대표팀의 일원이 되는 행운을 줬으며 이 대회에서 호나우두는 호마리우와 베베토의 그늘에 가려 한 경기도 출장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브라질의 두터운 선수층을 고려했을 때 어린 호나우두의 발탁은 파격적이었다. PSV 에인트호벤으로 이적하며 유럽에 입성하는 관문이 되었다.

박지성과 이영표의 前 소속팀으로 유명한 에인트호벤은 브라질 대표팀의 선배 호마리우가 뛰었다는 점에서 호나우두에게도 큰 매력이었다. 그는 2시즌 동안 46경기에서 42골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며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의 FC 바르셀로나로 둥지를 옮긴다.

바르셀로나에 입단한 호나우두는 전술 그 자체였다. 37경기에서 34골을 기록한 득점력도 우수하지만, 매 경기 모든 수비수의 넋을 빼는 드리블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사를 낳았다. 이 때문에 호나우두를 막기 위해서는 파울밖에 없다는 신조어가 탄생했다. 바르셀로나에서 호나우두를 지도한 故 바비 롭슨 감독은 "당신은 아마 호나우두와 같은 선수를 세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슛을 하고 패스를 하는 부문에서 감각적이다. 남들보다 거리가 뒤처져도 전광석화처럼 달려들어 볼을 낚아채 상대 수비진을 트린다. 개인 능력과 함께 팀 플레이에도 유용한 매우 현명한 선수다"라고 전했다.

스페인에서 화려한 선수 생활을 보낸 호나우두는 아쉽게도 바르셀로나와의 계약 문제 때문에 인테르 밀란으로 팀을 옮긴다. 이적 후에도 그는 꾸준한 모습을 보여줬다. 클래스가 있는 선수라도 리그 적응에 애를 먹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그의 적응 속도는 무서웠다. 첫 시즌에 소속팀 인테르의 UEFA 컵 우승과 리그 준우승을 이끈 호나우두는 1년 만에 리그 최우수 선수와 UEFA MVP라는 개인 타이틀을 거머쥐게 된다. 바르셀로나 소속으로 1996년 FIF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던 그는 1997년에는 FIFA 올해의 선수상과 발롱드흐를 동시에 차지하며 세계 최고의 선수로 인정받는다.

인테르에서 화려한 선수 생활을 보내던 호나우두는 브라질 대표팀에서도 최고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가 이끈 브라질은 1997년에만 컨페더레이션스 컵과 코파 아메리카 정복으로 대외컵 2연패를 달성한다. 이 때문에, 브라질은  1998 FIFA 프랑스 월드컵 우승후보 0순위로 군림하게 된다. 데니스 베르캄프,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지네딘 지단 같은 선수도 호나우두에 비해 한 수 아래라는 평이 많았다.

하지만, 황제라는 칭호가 너무 부담되었을까? 그는 프랑스 월드컵을 기점으로 나락의 길에 빠지게 된다.

우선, 호나우두는 대회 출전 당시 경미한 부상을 숨긴 채 출장해야 했다. 나이키의 상업적인 목적 때문에 그가 희생되었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호나우두에 쏠린 전 세계 축구계의 시선은 그의 무리한 출장을 이끌었다. 대회 내내 아픈 몸을 이끌고도 MVP를 차지한 점은 호나우두의 천부적인 능력을 대변한다.

1998년 브라질 대표팀은 양날의 검과 같았다. 화려한 선수 진은 대회 우승 후보 0순위라는 점을 대변했지만, 대회 당시에는 호마리우와 주니뉴 파울리스타가 부상 때문에 출전하지 못했다. 게다가 지난 94 미국 월드컵에서 수비적인 경기 운영 때문에 우승을 하고도 비난을 받은 브라질의 상황상 프랑스 대회에서의 브라질은 더욱 공격적이었다.

결국, 브라질은 대회 신데렐라로 부상한 히바우두와 부상이란 적과 맞서 싸운 호나우두의 능력 때문에 결승 진출에는 성공했지만, 프랑스에 0-3으로 대패하며 2인자로 전락한다. 결승 직전, 발작을 일으킨 호나우두는 진통제 투입을 통해 결승전에 나섰지만 홈 팀 프랑스의 기세는 무서웠다.

이후, 마음을 가다듬고 99 코파 아메리카에 출장한 호나우두는 '최고의 동반자' 히바우두와 함께 브라질의 우승을 이끌며 황제의 부활을 알렸지만, 무릎 부상 재발로 그라운드와 일시적으로 결별하게 된다. 지속된 부상은 그의 발목을 잡았고 어느덧 호나우두의 이름은 히바우두 때문에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1999년 이후, 히바우두는 세계 최고의 선수로 부상하며 호나우두의 빈자리를 메우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2001년 12월, 호나우두는 인테르 밀란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며 소속팀을 위해 분발했다. 2001/2002시즌 후반기에는 풀타임을 소화하는 체력으로 끌어올렸으며 그의 부활은 인테르가 13년 만에 리그 우승을 하는데 크게 이바지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마지막 라운드인 라치오와 인테르의 경기에서 일어난 '그레스코의 난' 때문에 유벤투스에 챔피언을 내주게 된다. 당시 인테르의 왼쪽 풀백으로 경기에 나선 그레스코는 팬들의 바람을 저버리듯이 라치오의 체코 출신 오른쪽 측면 미드필더 파벨 포보르스키에게 지속적으로 공간을 계속 내줬다.

인테르가 리그 우승에 실패했지만, 2002년 FIFA 한일 월드컵에서의 브라질은 달랐다. 대회 직전, 호나우두는 는 '매 경기 골을 넣겠다'라는 다짐을 하며 2인자로 전락한 조국 브라질 축구의 부흥을 이끌 것을 약속했다.

당시 브라질은 남미 예선에서 3위로 통과했으며 계속되는 선수 테스트와 감독 교체 때문에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2001년 7월, 우루과이 원정 경기를 통해 펠리페 스콜라리 감독이 지휘봉을 잡으며 안정적인 팀을 만들 것으로 보였지만, 온두라스와의 2001 코파 아메리카 8강에서 패배하는 굴욕까지 겪으며 브라질 축구 사상 최악의 침체기로 불렸다. 이 때문에 줄곧 1위를 지키던 FIFA 랭킹도 떨어졌으며 우승 후보를 논하는 과정에서 프랑스와 아르헨티나, 이탈리아에 밀렸다.

애초, 예상과는 달리 호나우두의 브라질은 본선 무대에서 다른 팀보다 강했다. 앞서 지적했듯이 우승후보보다 2% 부족했던 브라질은 신예 스타 호나우지뉴와 호나우두, 히바우두가 최고의 공격 삼각편대를 가지게 되면서 대회 내내 승승장구했으며 월드컵 전승을 통해 우승을 차지한다. 특히 호나우두는 독일과의 결승전에서 기록한 2골을 포함해 대회에서 도합 8골을 기록하며 완벽한 재기에 성공했다.

이후, 월드컵을 통해 재기에 성공한 호나우두는 갈락티코 1기 정책의 수혜자로서 레알 마드리드에 입성하게 된다. 세계 최고의 포워드가 레알 마드리드라는 당대 최고의 클럽에 입단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당시 레알 마드리드는 최고의 마에스트로 지단과 오른쪽 측면 미드필더의 본좌 루이스 피구를 보유한 상태였다. 여기에 호나우두라는 마지막 퍼즐 조각이 더해진다면 보는 이로 하여금 환상에 젖어들게 할 것이다. 이것은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現 레알 마드리드 회장인 플로렌티노 페레즈의 이러한 환상을 현실로 바꾼 인물이다.

호나우두는 이적 첫 시즌 만에 무난히 적응하며 레알 마드리드의 2002-2003시즌 프리메라 리가 우승에 크게 공헌했지, 레알 마드리드의 갈락티코 1기는 빛 좋은 개살구라는 비평 속에 막을 내린다. 게다가 호나우두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소속의 콜롬비아 수비수 루이스 페레아의 살인적인 태클 때문에 부상에 늪에 다시금 빠진다. 필자는 이 날 소심하게 검은색 노트에 DEATH NOTE라는 문구를 적고 Luis Amaranto Perea Mosquera라는 이름을 새겨 넣었다. 페레아의 고의성이 보이던 태클은 호나우두의 과체중과도 밀접했다.

부상에 늪에 빠진 호나우두는 레알에서도 하락세를 타게 되지만, 그는 조국 브라질을 위해 2006 독일 월드컵에 출사표를 던진다. 결과적으로 2006년 독일 월드컵에 나선 브라질은 개개인은 완벽했지만 공수 균형에서는 최악이었다. 1994년 수비적인 경기 운영으로 브라질의 4번째 월드컵 우승에 이바지한 페헤이라 감독은 4-2-2-2라는 극단적인 공격 전술로 상대와 맞섰으며 한 골을 먹어도 두 골을 넣어도 된다는 마음가짐으로 월드컵에 나섰다.

결과는 최악이었다. 무엇보다 공격적인 전개를 선호하던 파헤이라는 정작 프랑스와의 8강전에서는 2004년 남미 예선에서 구사했던 4-3-2-1을 주 전술로 들고 나왔다. 주니뉴 페르남부카노에게 중앙 미드필더 역할을 맡기며 최전방 호나우두를 보좌하는 카카와 호나우지뉴의 모습은 보는 내내 이게 브라질이 맞는가? 라는 의문까지 들었다. 그나마 호나우두가 거구의 몸으로 열정적인 경기를 하지 않았다면 브라질은 가나와의 16강에서 탈락해도 이변이 아닐 정도였다. 참고로 호나우두는 가나와의 경기에서 카카의 패스를 받아 대회 3번째 골과 역대 월드컵 15번째 골을 기록. 모든 선수의 꿈인 월드컵 최다 득점자란 영광을 얻게 되었다.
 
이후, 파비우 카펠로 감독과의 마찰 때문에 레알 마드리드를 떠나 자신의 옛 소속팀이었던 인테르의 라이벌인 AC 밀란에 입단한 호나우두는 2006/2007시즌 후반기라는 짧은 시간 동안 밀란에서 훌륭한 활약을 보여주며 알베르토 질라르디노의 일시적인 부활과 중위권으로 떨어진 밀란을 상위권으로 도약시켰다.

당시 호나우두는 밀란 입성 후 리그에서 팀을 위해 좋은 활약을 펼치며 팀의 통산 7번째 UEFA 챔피언스리그 타이틀 획득에 숨은 공헌자가 되었다. 하지만, 레알 마드리드 소속으로 뛴 경기 때문에 유럽 대항 컵 출전 자격을 상실하였기에, 소속팀 우승을 멀리서 바라보아야 했던 불운의 스타였다.

이후에도, 잦은 부상으로 고생하던 호나우두의 축구 인생은 코린치안스 입단 후 달라졌다. 한물간 스타라는 오명 속에서도 호나우두는 팀의 상파울루 주 리그 우승과 코파 두 브라질 우승에 이바지하며 오랜 기간 부진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코린치안스의 부흥을 이끌었다.

이 때문에, 필자는 호나우두를 '재기와 끈기'의 상징으로 부르고 싶다.

많은 축구 팬은 호나우두를 일컬어 '신의 능력을 소화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한다. 즉, 자신의 능력을 부상과 상대 수비수의 집착으로 인해 맘껏 발휘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심각한 부상 때문에 은퇴가 유력한 상황에서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근성을 보여줬다. 양쪽 무릎의 슬개건이 나가고 오랜 기간의 부상 때문에 그라운드에서 벗어났어도 당당하게 이겨냈다. 부상 이후, 복귀한 그는 늘 전 세계에 존재하는 자신의 팬들에게 보답했다. 이제 우리는 그가 전성기 시절 보여준 날렵함과 상대를 쉽게 속이는 드리블 능력을 보기 어렵지만, 모든 축구 팬들은 호나우두에게 설렌다. 그에게 기대를 하게 되는 것은 브라질과 소속 클럽에서의 9번이라는 것과 더불어, '축구 황제' 호나우두이기 때문이다.

참고 자료 1: 호나우두 코린치안스 이적 후 기록
* 브라질 당사의 원길만 씨가 작성해 주셨습니다.

브라질 세리에 A 19경기(19경기 선발) 12득점 5도움
캄페오나토 파울리스타 10경기(9경기 선발, 1경기 후보) 8득점
브라질 컵 8경기(7경기 선발 1경기 서브) 3득점 1도움

총 37경기(35경기 선발, 2경기 후보) 23득점 6도움

참고 자료 2: 호나우두에 대한 명언들 (출처: 사커라인)

펠레(브라질) : "정말 특출난 선수다. 그러나 그가 월드컵을 우승한 후에야 나와 비교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축구선수로서 크게 성공했음에도 그가 여전히 좋은 인간성을 지니고 있어 매우 뿌듯하다. 그는 항상 겸손하고, 가족에 충실하고, 남의 비방을 거의 하지 않는다. 또한, 상대 수비수가 아무리 단단하게 수비하더라도 그는 결코 신경전에 말려들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브라질 사람으로서 그의 넘버원 팬이다."

마르코 반 바스텐(네덜란드):"내가 전성기 시절로 돌아간다 해도 호나우두만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정말 최고의 선수다."

참고 자료 3: 호나우두 프로필 (사커라인 내 호나우두 소갯글 참조)

성명 : 호나우두 루이스 나자리우 데 리마(Ronaldo Luiz Nazario De Lima)
생년월일 : 1976년 9월 22일
국적 : 브라질
신장 : 182cm
체중 : 비공개
주 포지션 : 스트라이커
클럽 : 코린치안스(브라질)
주요경력 :
1994 FIFA 미국 월드컵 우승
1996/1997시즌 컵 위너스 컵 우승(바르셀로나)
1997 코파 아메리카 우승
97/98시즌 UEFA컵 우승(인터 밀란)
2002 도요타컵 우승(레알 마드리드)
2002/2003시즌 프리메라 리가 우승(레알 마드리드)
1998 FIFA 프랑스 월드컵 준우승
1999 코파 아메리카 우승
2002 한/일 월드컵 우승
2002 UEFA 슈퍼컵 우승(레알 마드리드)
2002 도요타컵 우승(레알 마드리드)
1994/1995시즌 에레디비지에 득점왕(30골)
1996/1997시즌 프리메라 리가 득점왕(34골)
1996 FIFA 올해의 선수상 수상
1996 프랑스 풋볼 선정 유럽 골든볼 수상
1996 월드 사커 선정 올해의 선수상 수상
1997 FIFA 올해의 선수상 수상
1997 프랑스 풋볼 선정 유럽 골든볼 수상
1997 월드 사커 선정 올해의 선수상 수상
1998 프랑스 월드컵 최우수 선수 선정
1998 FIFA 올해의 선수 2위
1998 프랑스 풋볼 선정 유럽 골든볼
1999 코파 아메리카 득점왕
2002 한/일 월드컵 득점왕(8득점)
2002 도요타컵 최우수 선수 선정
2002 FIFA 올해의 선수상 수상
2002 프랑스 풋볼 선정 유럽 골든볼 수상
2002 월드 사커 선정 올해의 선수상 수상
2003/2004시즌 프리메라 리가 득점왕(24득점)
2006 FIFA 독일 월드컵에서 월드컵 최다 득점 경신(15득점)
2009시즌 캄페오나토 파울리 스타 우승, 코파 두 브라질 우승(코린치안스 소속), 골닷컴 선정 지난 10년간 최우수 선수 수상

[관련기사] ▶ [삼바토크 ⑦] 호나우두가 필요한 브라질, 실현 여부는?

[사진=호나우두의 생일을 축하하는 피파 공식 홈페이지 캡쳐]



박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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