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9.11.10 20:50 / 기사수정 2009.11.10 20:50
편집자 주: 11월 7일, 도쿄 국립경기장에서는 포항 스틸러스와 사우디의 알 이티하드의 AFC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열렸다. 포항의 아시아 제패와 더불어 일본의 축구 열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박진현 기자의 일본 축구 유랑기를 만나보자.
[엑스포츠뉴스=박진현 기자] [축구장에 놀러가다; 도쿄원정기①] 2009 AFC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알이티하드 대 포항 스틸러스, 도쿄 국립경기장, 11/07, 19:00
축구의, 축구를 위한, 축구에 의한
국내 축구장이 아닌 해외 축구장에 놀러가기 위한 첫 걸음. 그 무대는 흔히들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불리는 일본, 도쿄 국립경기장으로 향하는 길이다. 해외에 나갈 기회는 많이 있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미루던 일이 단 열흘 새에 결정되었다. 그 모든 것이 '단지' 축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포항의 AFC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진출이 확정된 뒤 필자의 첫 세계를 향한 '축구놀이'가 대한해협을 건넌다.
경기 당일인 11월 7일 토요일 오후 1시 비행기를 타고 김포에서 날아오른다. 이륙하기 위해 내달리는 가속력의 힘과 중력에 의해 잡아당기는 힘에 적잖이 당황하지만, 하늘을 날아오를 때 느끼는 그 설렘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한 시간 반여의 비행시간은 눈 깜짝할 새 지나갔지만, 출입국 심사대에서 문제가 생겼다. 지인을 통해 예약한 민박의 이름과 주소를 알지 못해 들여보내 줄 수 없다는 것이다(행여나 일본 여행은 결심한 분이라면 꼭 숙지하길 바란다). 부랴부랴 해결을 하고 공항을 빠져나왔지만 이미 해가 기울고 있다. 우리나라보다 동남쪽에 위치한 일본은 해가 빨리 지고, 아직 단풍이 지지 않았을 만큼 따뜻한 기후를 자랑(?)한다.
▲ 케이규센을 타고 도쿄의 중심으로. 이제 본격적인 도쿄여행 시작이다.
하네다 공항에서 케이큐센(京急線)을 타고 시나가와(品川) 역에 내려 JR 야마노테센(山手線)을 타고 숙소가 있는 신오쿠보(新大久保) 역으로 향한다. 한인 밀집지역인 신오쿠보 역 인근에는 일본어와 한글로 이루어진 간판이 많다(일본만 제대로 느끼고 싶다면 피해야 할(?) 장소이다). 일본에 대해 아는 것 없이 축구만을 보기 위해 도쿄를 찾은 '빵점 짜리' 여행객인 필자는 경기시간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부리나케 도쿄 국립경기장으로 달려간다.
▲ 2박 3일 동안 묵을 숙소가 있는 신오쿠보 역.
올드 축구팬들에게는 '도쿄 대첩'의 무대로 잘 알려진 도쿄 국립경기장은 필자에게도 역시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를 솟구치게 한다. 1958년 아시안 게임과 1964년 도쿄 올림픽이 열렸던 장소로 그 역사가 깊은 경기장이다. 현재는 각종 행사, FA컵 격인 천황배와 리그컵 대회인 나비스코컵 결승 등 중립경기장으로서 활용되고 있는 일본 축구의 성지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 도쿄 국립경기장이 있는 센다가야 역.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비추는 조명탑이 발걸음을 재촉한다.
도쿄 국립경기장이 있는 센다가야(千馱ヶ谷) 역에는 이미 많은 사람으로 북적인다. 이런 '빅매치'는 적어도 경기시작 한 시간 반 전에는 와서 분위기를 느껴야 하지만, 이미 경기 시각은 임박해오고 필자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진다.
포항,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새로운 역사를 쓰다
▲ 도쿄 국립경기장 내부 모습. 그 역사를 한 몸에 느낄 수 있다.
이미 취재신청은 해놓은 상태고, 짧은 영어로나마 도쿄 국립경기장 안까지 무사히 입성한다. J-리그 팀이 결승에 진출하지 못했고, 한창 재팬 시리즈가 진행되고 있어 흥행에 있어서 걱정을 했던 결승전이다. 하지만 '비싼' 중앙스탠드를 제외하고는 관중이 가득 들어차 있다(관중 집계결과 25,743명이 입장했다.). 그리고 오른쪽 관중석에는 대규모 포항 응원단이 포항産 용광로를 만들고 있다.
▲ 경기장 밖에는 역대 우승팀의 유니폼이 전시되어 있었다. 올해는 과연?
드디어 킥오프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발이 떨려 타이핑을 못할 지경이다. 지난 6월 10일 사우디아라비아와의 월드컵 최종예선 첫 A매치 취재를 갔을 때와 같은 느낌이다. 기자 신분이기 이전에 축구에 '미친' 사람 중 한 명이라 이런 기분은 스스로 조절하지 못할 때가 많다.
▲ 선수들이 경기장에 입장해서 도열하고 있다. 어느 때보다 긴장된 순간이다.
포항은 시작부터 수비에서 불안한 모습을 노출한다. 하지만, 올 시즌 보여준 포항의 조직력은 일본땅이라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짧은 패스를 통해 상대진영으로 차근히 진출한 포항은 데닐손이 배치되어 있는 오른쪽 측면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동시에 신형민과 김태수가 중거리 슈팅으로 상대 골문을 위협한다.
경기주도권을 포항에 내줬지만 알이티하드 역시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알이티하드 선수들은 뛰어난 개인기를 앞세워 포항을 교란시킨 뒤 수비 뒷공간을 향한 공간패스로 위협적인 장면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아부체루네와 하디드의 절묘한 프리킥은 포항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 허기진 배를 달래준 일본식 도시락. 어디를 가나 연어는 꼭 있다.
화끈한 공격축구를 보여준 양 팀은 무득점으로 전반전을 마친다. 동시에 긴장이 풀린 필자의 배는 먹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래서 프레스룸으로 냅다 달려가 구석에 남아있는 도시락을 찾아 다시 경기장으로 올라온다. 하지만, 밍밍한 일본의 도시락에는 그것이 없다. 김치가 필요해!
흡사 국내 경기장에 온 것 같은 기분이다. 차가운 도시락을 먹으면서 한국 기자들 속에서 경기를 관람하는 중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이분들 역시 기자 신분을 잠시 잊고, 축구팬으로 돌아가 포항의 플레이 하나하나에 환호와 탄식을 보낸다는 것이다.
후반 들어 포항의 공격은 더 거세진다. 그리고 골이 나와야 할 시점에 포항의 선제골이 터진다. 후반 11분 아크써클 왼쪽으로 조금 치우친 지점에서 데닐손이 얻은 프리킥을 노병준이 오른발로 감아찼고, 이것이 수비벽 사이를 뚫고 왼쪽 하단으로 빨려들어간 것이다.
▲ 노병준의 선제골 후 선수들과 코칭스태프들이 얼싸 안고 즐거워하고 있다.
노병준의 선제골로 인해 분위기가 한껏 고무된 포항은 후반 21분에 추가골을 넣기에 이른다. 오른쪽 측면에서 얻은 프리킥을 김재성이 오른발로 골문을 향해 붙였고, 김형일이 수비수와의 몸싸움에서 이기고 절묘한 헤딩 슈팅으로 알이티하드의 골망을 흔든다. 불과 며칠 전 부친상을 당했지만 팀에 조기 합류한 김형일은 아버지의 영전에 자신의 골과 우승 트로피를 바칠 수 있게 되었다.
포항은 후반 28분 모하메드 누르에게 추격 골을 허용하긴 했지만 끝까지 한 골 차를 잘 지켜내 2009 AFC 챔피언스리그의 주인공이 되었다. 경기종료 휘슬소리와 함께 선수들은 그라운드에 엎드려 우승의 기쁨을 만끽하고, 포항 응원단들은 소리 높여 포항의 연호한다.
▲ 포항에서만 들을 수 있는 '영일만 친구'가 도쿄의 중심에서 울려 퍼졌다.
2006년에 전북 현대가 AFC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을 한 이후 K-리그 팀들은 아시아 무대에서 매번 고배를 마셨다. J-리그 팀들에게 번번이 패하였고, 우리보다 한 수 아래라고 여겼던 중국의 슈퍼리그 팀들에게도 발목이 잡혔다.
그래서 올 시즌 포항의 아시아 무대 정복은 K-리그의 위상을 다시 한 번 드높일 수 있는 좋은 발판이다. 그리고 한국축구가 아시아의 맹주로서의 자리를 굳건히 하고, 한국축구를 한 단계 더 도약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 경기 후 프레스룸에서 인터뷰 중인 파리아스 감독과 믹스드존 인터뷰 중인 노병준.
시즌 초반에는 무승부 행진과 후반기에는 무서운 연승 행진을 보여주었고, 선수 개개인에게 사연도 많았던 올 시즌 포항은 이미 피스컵 코리아와 챔피언스리그에서 2개의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그리고 정규리그 2위에 올라 플레이오프에 직행해 K-리그 우승과 챔피언스리그 우승으로 진출권을 획득한 2009 클럽월드컵 도전을 남겨두고 있다.
'한국축구의 자존심' 포항이 K-리그와 아시아를 넘어 세계무대에도 그 족적을 남길 수 있을지, 그리고 그 도전의 끝이 어디인지 포항의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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