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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인시대] 롯데 자이언츠 '4번 타자', 김민호를 만나다

기사입력 2009.06.18 15:51 / 기사수정 2009.06.18 15:51

유진 기자

[엑스포츠뉴스=광주, 유진 기자] 고교야구 감독은 세 가지 역할을 해야 한다. 감독으로서 순수하게 경기를 이끌어야 하는 역할과 교사로서 제자들을 가르쳐야 하는 역할, 마지막으로 학부형과 선수 사이, 선수와 학교 사이의 관계를 중계/중재해야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래서 학원스포츠에서 감독을 맡는 사람은 단순히 '감독(manager)' 역할을 떠나 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 점에 있어서 부산고등학교 김민호 감독(48)은 자신의 모교에서 성실하게 지도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인물이다. 특히, 1-2학년이 주축이 된 팀을 이끌고 임한 무등기 고교야구 선수권 대회에서도 선수 시절 못지않은 열정적인 모습으로 제자들을 지도하는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현역 시절, 특히 ‘롯데 자이언츠 불멸의 4번 타자’로 부산 야구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은 김민호 감독을 부천고등학교와의 16강전 승리(2-1) 이후 무등경기장 앞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Q : 무등기 16강전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우선 아직까지 ‘현역시절 롯데 4번 타자’로 김민호 감독님을 기억하고 있는 팬 여러분들게 한 말씀 해 주십시오.

김민호(이하 ‘김’으로 표기) : 네 감사합니다. 음, 아직까지 ‘김민호’를 잊지 않고 아마추어 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이 알아봐 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그래서 매사의 행동에 조심도 많이 하게 됩니다(웃음).

현역시절의 추억

Q : 1984년, 1992년 롯데 우승과 1995년 롯데 준우승 등 ‘롯데의 황금기’를 두루 경험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1984년 데뷔 때에는 ‘김민호’라는 명성에 비해 썩 만족할 만한 성적을 거둔 것은 아니었습니다(주 : 당시 60경기 타율 0.257, 29안타 기록).

김 : (잠시 생각하다가) 그때 제가 신인왕 후보로도 거론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저의 데뷔연도인 1984년에는 강병철 감독님께서 재직중이셨는데, 뭐라고 해야 할까요… 저와는 코드가 잘 맞지 않았던 것 같았습니다. 물론 1984년 당시에 김용철, 김용희 두 선배가 나란히 1, 3루를 맡고 있었습니다. 제가 끼어들 자리가 없을 법했지만, 그래도 얼마든지 지명타자로도 기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986년도까지 스타팅 멤버로 뛰지 못했습니다. 이후 강병철 감독님께서 사임하시자마자 1987년도에 바로 3번 타자로 기용되었고, 이듬해부터 4번을 치게 되었습니다(주 : 김민호 감독은 4번 타자로 기용되었던 1988년에 생애 첫 3할 타율과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했다).

그런데 강병철 감독님과의 ‘악연’이라고 해야 하나요? 롯데 코치로 재직할 때 강병철 감독님이 오시면서 저와 윤학길, 김용철 코치가 모두 팀을 떠나야 했습니다. 2군에서라도 기용되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때를 생각하면 참으로 아쉽습니다.

Q : 아, 그러한 뒷이야기가 있었군요. 그래도 김 감독님 입장에서는 기억에 남는 경기들이 많으셨을 줄 압니다. 1984년 롯데 우승 당시에서 유두열의 쓰리런 홈런을 직접 보셨고, 1992년 롯데 우승시에도 팀의 중심에서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김 : (웃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역시 1992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먼저 해태와의 플레이오프 5차전 잠실경기에서 쐐기 쓰리런포를 날리면서 우리(롯데)가 한국시리즈 진출을 확정지었고, 한국시리즈 1, 2차전에서도 제가 승리 타점을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주위에서는 "야, 너 MVP까지 바퀴 세 개 달았다"고 이야기할 정도였지요. 그런데 5차전을 앞두고 제가 편도선에 몸살까지 앓아서 선발로 출장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몸 상태가 좋았다면 MVP도 불가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웃음). 하지만 ‘제 생애 최고의 순간’은 비록 선발 출장은 하지 못했지만, 팀 우승을 확정지었던 1992년 한국시리즈 5차전이었습니다.

Q : 생각해 보니 현역 시절에는 참으로 특이한 타격 폼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타석에 들어섰다가 투수가 와인드업을 하면 방망이를 아래/위로 한 번 휘둘렀다가 바로 타격에 임하지 않으셨습니까?

김 : 당시 제가 손목의 끌림을 많이 이용하였습니다. 최대한 가볍게 치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그러한 타격폼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타격에 자신감이 붙으면서 제가 갖고 있는 타격폼을 더욱 크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야구 관계자들은 “김민호나 박정태의 타격폼으로 타격하다가는 절대 3할 못 친다.”라고 했지만, 이후 3할 타율을 잘 기록하지 않았습니까? 결국, 타격폼 보다는 파워 포지션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Q : 전에 김청수 코치와 인터뷰했을 때에 들은 이야기지만, 김청수 코치만 나가면 방망이에 힘을 못 써서 ‘김청수 등판하는 날에는 나를 좀 빼달라’고 할 정도였다고 들었습니다.

김 : (웃음) 타격에도 ‘사이클’이 있습니다. 잘 치는 날이 있는 반면, 못 치는 날도 있는데 당시 (윤)학길이가 던졌을 때에는 곧잘 쳤습니다. 그런데 (김)청수가 던지는 날에는 제 타격 사이클이 ‘못 치는 날’과 겹치다 보니 우연하게 그러한 결과가 일어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김)청수가 9연패까지 빠진 적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후 (윤)학길이와 (김)청수의 등판 간격이 조정된 일이 있었습니다. 이후에는 (김)청수가 등판하는 날에 제 타격 사이클이 ‘잘 맞는 날’에 걸리다 보니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 팀의 4번 타자 김창혁에게 타격 조언을 하는 김청수 수석코치. 김 코치와 김민호 감독의 인연은 롯데 시절부터 각별했다.

Q : 이 외에도 1990년에는 올스타전 MVP까지 받으시지 않으셨습니까?

김 : 어휴, 그때 정말 기분이 최고였지요. (잠시 말문을 닫다가) 그런데 1990년은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해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한창 몸이 좋지 않으실 때에 돌아가셨거든요. 그래서 부모님을 올스타전에 모시고 아들의 모습을 구경시켜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참…. 몸이 좋지 않으셔서 결국 못 오셨어요. 그런데 올스타전 출전 전날에 꿈을 아주 잘 꿨습니다.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공격수 스킬라치가 꿈에 나타나서 저에게 ‘따봉’이라고 해 주더군요(웃음). 그 때문인지 올스타전에서의 활약이 MVP로 이어진 것 같습니다. 어쨌든 1990년은 저에게 기쁨과 슬픔이 공존했던 한해였습니다.

은퇴, 그리고 지도자 생활

Q : 1995년을 기점으로 서서히 일선에서 물러날 준비를 하신 것 같은데, 그 이면에는 마해영 등 ‘A급 후배들’의 존재가 크지 않았나 싶습니다.

김 : 당시에 마해영, 임수혁, 김종훈 등 젊은 선수들이 대거 등장한 해였습니다. 지명타자로 활약할 수 있는 후배들도 입단했지요. 하지만, 저는 나이 40까지 생각하고 선수 생활을 지속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 때문에 꽃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일찌감치 지는 후배들이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1996년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종범, 양준혁 같은 선수들이 적지 않은 나이에도 활약한 것을 보면 ‘아, 그때 계속 선수생활을 지속했으면 좋았을걸’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은퇴했던 당시에는 충분히 나이 40까지 뛸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그때에는 자연스럽게 물러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은퇴를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Q : 이후 동의대학교 감독을 맡으시면서 크게 한 번 ‘일’을 내지 않으셨습니까?

김 : (고개를 끄덕이며) 당시 멤버들이 참 좋았습니다. 정성기(전 애틀란타 브레이브스), 손시헌(두산 베어스), 정보명(롯데 자이언츠) 등을 이끌고 고려대학교를 6-1, 홍익대학교를 14-5로 이겼지요. 그리고 창단 2년 만에 양성재(롯데 자이언츠)의 완봉으로 전국대회 우승까지 차지할 수 있었고요. 정말 좋은 제자들을 두어서 우승할 수 있었습니다. 창단 최소 년도 우승은 아마 이제까지 깨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Q : 롯데 코치를 2년 하신 이후에 모교로 돌아오셨지요?

김 : 그렇습니다. 음, 모교 감독으로 부임한지 3년 됐네요. 롯데에서 나오던 해에 전임 조성옥 감독이 동의대로 부임하면서 공석이 된 모교 감독 자리를 제가 맡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프로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부산고 총동창회에서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동창회장님게서 “프로에 가게 되면 언제든지 보내주겠다”고 하여 감독직을 맡았고, 저 역시 1~2년 정도 후배들을 육성하면 되겠구나 싶었는데… 막상 들어오니까 그게 또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자들을 대학, 프로에 보내면서 많은 것을 신경 써야 하다 보니 쉽게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내년부터 모교 유니폼을 입게 될 중학교 3학년 선수들 자원도 매우 우수합니다. 스카우트를 잘한 결과이기도 한데, 이 친구들이 고3이 될 때에는 다시 한 번 ‘부산고 센세이션’을 일으킬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래서 ‘이것까지는 만들어 놔야겠다.’라는 생각이 강합니다.



▲ 김민호 감독은 제자들에게 ‘많이, 그리고 열심히 할 것’을 강조한다.

Q : 감독직을 맡으면서 아들(김상현, 동국대 2학년)과 한 팀에서 뛰셨는데?

김 : 잘해줬으면 좋겠어요. 작년에 어깨 수술을 받고, 지금 재활중인데 어쩌다 보니 아들이 고등학교 후배이자 대학교 후배가 됐네요. 일단 지금은 투수 쪽으로 생각하고 재활을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키 187cm니까 신체 조건은 일단 괜찮습니다. 하지만, 고교 2학년 때 다쳤던 곳을 3학년 때 또 다치다 보니까 수술까지 가게 됐습니다. 그런 만큼, 재활 기간을 길게 두고 부상 없이 선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하지만, 저는 ‘김민호 아들 김상현’이라고 불리는 것보다 '김상현의 아버지 김민호'라는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웃음).

Q : 이성득 해설위원과 같이 KNN 야구 해설도 겸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김 : 이성득 선배는 라디오, 저는 TV부문 해설을 맡고 있습니다. 토요일, 일요일 등 선수단 휴식을 취하는 주말에만 중계를 맡기로 했기 때문에, 선수들 훈련 일정과 겹치지 않게 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습니다. 특히 이번 주에는 무등기 출전 때문에 해설이 어렵다고 이야기를 했고, KNN에서도 이를 잘 알고 있습니다.

Q : 김 감독님께서 생각하시는 고교야구의 매력은 무엇입니까?

김 : 어린 선수들을 육성시켜 프로 진출이나 대학 진학을 시키는 맛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어린 선수들을 혹사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윤성환, 정성기, 손시헌 등 ‘김민호의 제자’들이 맹활약하는 모습을 보고 싶을 뿐이지, 성적 때문에 혹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시합에서 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선수보호’가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오늘 경기에서 박재현 선수가 공 130개를 던졌는데, 내일 경기에서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등판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철저하게 로테이션을 지켜주어야 합니다.

Q : 마지막으로 후배들과 제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김 : ‘모든 부분에서 정직하라.’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모든 결과는 훈련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훈련을 잘 못 했기 때문에 결과도 잘 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일단 제자들에게는 "많이 하라. 그리고 열심히 하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많이 하고, 열심히 하다 보면 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프로에 몸담고 있는 후배 선수들에게는 “잘해야 한다.”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열심히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 프로에서 열심히 안 하는 선수가 어디 있습니까? 프로는 다 열심히 합니다. 프로라면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을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 열심히 하는 것은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 김민호(김민호)
1. 생년월일 : 1961. 4. 28
2. 포지션 : 내야수(1루수/지명타자)
3. 체격조건 : 182cm, 82kg
4. 가족 : 동국대학교 2학년 김상현(아들)
5. 프로 통산 기록 : 타율 0.278, 1,050안타, 106홈런, 606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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