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최종편집일 2024-11-30 11:59
자유주제

해동전설(海東傳說)6 (2) 솟구치는 오기

기사입력 2006.11.30 02:30 / 기사수정 2006.11.30 02:30

김종수 기자



글: 김종수/그림: 이영화 화백


"아이…이것 말실수했네. 이를 어째…"

임희정이 난처한 기색으로 정차룡을 따라 대기실로 가려고 했다.

"킥킥킥…신경 쓰지마. 저 녀석이 이런 소리 듣는 것이 어디 한두 번이냐?"

"치잇! 이게 다 너희들 때문이잖아?"

임희정이 고운 아미를 잔뜩 찌푸리며 앙칼지게 신경질을 부렸고, 이창헌패거리들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시종일관 킬킬거리는 모습이었다.
대기실의 구석에 마련된 의자에 정차룡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앉아있었다.
경기 내내 실수를 반복하고 이창헌 패거리들에게 모욕당한 것  까지는 좋았다. 어차피 지금 당장 바뀔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짝사랑하는 소녀가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보았고 불쌍하다는 소리까지 내뱉은 것은 사뭇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빌어먹을…'

울화가 치밀어 오름에 정차룡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행히 같은 조의 동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정차룡에게 별다른 기대 같은 것을 갖지 않았었고, 무엇보다도 조수철이 있음에 질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도 일조는 오조에 칠점을 앞서고있었다.

정차룡은 슬쩍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보았다.
무슨 얘기들을 하고있는지 세 명의 동료들이 낮은 음성으로 수군거리고 있었고, 조수철은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왜 안 되는 것일까? 왜, 왜…'

연습 때는 그렇게도 잘 들어가던 것이 경기 중에는 전혀 안 되고 있음에 정차룡 스스로도 답답함을 이기기 힘든 심정이었다. 연습경기가 이 정도인데 실제경기를 뛰면 오죽하겠는가.
비웃음 가득한 이창헌 패거리들의 눈빛, 답답함을 억지로 참고있는 듯한 동료들의 눈빛, 그리고 동정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임희정의 눈빛이 계속해서 머리를 찔러댔다.
후반전도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소심한 성격에 머릿속이 온통 부담감으로 가득 차 있으니 몸이 제대로 움직이기나 하겠는가. 경기가 끝날 때까지 정차룡은 단일점도 올리지 못하였다.
다행히도 일조는 승리를 거두었다. 조수철의 종횡무진 활약덕분이었다.

'휴우…'

정차룡은 크게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나마 이겨서 그렇지, 지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는가?

"너무 긴장한 것 같더라. 실전경험이 많지 않아서 그런 것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다음 번에는 좀더 잘하도록 하자."

"수…수철아…"

정차룡으로서는 어깨를 툭 치며 격려의 말을 잊지 않는 조수철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정차룡에게 뭐라 한마디씩 하려던 동료들도 조수철의 태도에 이내 입들을 닫아버리는 모습들이었다.

"저기 차룡아."

고개를 숙인 채 대기실로 들어가려던 차룡의 귓가에 낭랑한 음성이 들려졌다. 여자의 음성, 확인해볼 것도 없었다. 지금 연무관에는 여자라고는 단 한 명밖에 없었으니까 말이다.

정차룡의 가슴은 쿵쾅쿵쾅 요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왜 자신을 찾는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는 바였지만 임희정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거론된다는 사실자체만으로도 흥분된 심장은 쉬이 진정되지 않고 있었다.

정차룡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나름대로는 담담한 표정을 지어 보이려고 애썼지만 실상 짓고있는 표정은 멀뚱하기 그지없었다.

"아까 했던 말 오해 없길 바래. 난 그런 뜻으로 한말이 아니거든."

"……"

임희정의 말에 정차룡은 무어라 대답해야할지 순간적으로 감이 잡히질 않았다.

"알았지? 차룡아."

생긋 웃으며 물어오는 임희정의 태도에 정차룡은 달아오른 얼굴로 서둘러 고개를 끄덕거렸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싶었지만 입술이 도통 움직여주지를 않았다.

"고마워. 앗!"

임희정의 눈길은 이내 정차룡의 뒤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목에 길다란 헝겊을 걸친 채 뒤늦게 걸어오고 있는 조수철을 본 것이었다.

"수철아."

임희정은 정차룡의 옆을 지나쳐 쪼르르 조수철을 향해 다가갔다. 언제나처럼 조수철은 무뚝뚝하기 그지없었지만 임희정은 혼자서 재잘재잘 거리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기색이었다.

'제…젠장!'

알 수 없는 수치심에 정차룡은 서둘러 대기실 안으로 들어갔다.

 

텅, 터텅…
집으로 돌아오기 무섭게 정차룡은 또다시 농구공을 던져댔다. 연습경기의 영향 탓인지 평소에 그렇게 잘 들어가던 것이 번번이 나무판을 맞고 퉁겨지고 있었다.

"휴우…이제는 이것마저도 안 들어가는구나…"

전신의 힘이 쭈욱 빠지는 것을 느끼며 정차룡은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땅 꺼지겠다. 이 녀석아. 어린 녀석이 무슨 한숨이냐?"

불현듯 들려오는 컬컬한 음성, 정차룡의 이맛살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잔뜩 찌푸려지고 있었다.

"이 녀석 봐라? 어른을 봤으면 인사부터 해야지, 인상쓰는 버르장머리는 어디서 배웠냐?"

이마에 새끼줄을 두른 깡마른 체구의 노인이 정차룡을 내려다보며 히죽히죽 웃고있었다. 박현수였다.

"뭐예요? 가뜩이나 심난해죽겠는데…할아버지는 그냥 정원 일이나 하세요."

"어이구…이거 어쩌지? 이미 정원 일은 다 끝내서 더하고싶어도 하지 못하겠는걸."

"그럼 그냥 가서 쉬세요. 왜 자꾸 귀찮게 하세요."

능글맞기 그지없는 박현수만 보면 괜스레 짜증부터 나는 정차룡이었다.

"거참 고약한 녀석일세. 누구는 간섭하고싶어서 간섭하는 줄 아느냐? 네 녀석 하는 꼬락서니가 하도 한심해서 이러는 것 뿐이야."

"한심하기는 뭐가 한심해요. 오늘은 손의 감각이 좋지 않을 뿐이에요."

"헤엥…여기서 공 던지는 것보고 그런 소리하는 줄 아느냐? 이상한 착각을 하고 있군. 그래."

"그럼 뭐 때문에 이러시는 것인데요?"

그제 서야 정차룡이 고개를 들어 박현수를 올려다 보았다.

"그래도 네 녀석정도면 또래 중에서는 곧잘 공을 던지는 편이야. 그런데 말이야. 아무리 마음이 여려도 그렇지, 고작 연습경기에서 잔뜩 쫄아가지고 완전한 기회까지 계속 놓쳐버리면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냐? 말 그대로 연습경기, 더 심하게 말해도 고작 연습 경기 일 뿐인데 말이야."

"그…그것을 할아버지가 어떻게 아세요?"

두 눈을 부릅뜨며 정차룡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이쿠! 이 녀석아. 깜짝 놀랐잖아?"

어깨를 크게 움찔해 보이며 과장된 표정을 지어 보이는 박현수였다.

"어서 말해봐요. 그것을 어떻게 알아요?"

상기된 표정으로 정차룡이 재촉했다.

"어떻게 알기는, 두 눈으로 지켜봤으니까 알지."

"연무관까지 와서 구경을 했단 말이에요?"

"그래, 얌전히 구경만 하겠다니까 그러라고 하던데…"

"……"

"왜? 별로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들켜버려서 쪽팔리냐? 그럴 것 없어. 어차피 네 녀석 농구 못하는 것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으니까."

"하…할아버지는 도대체 누구예요? 누구신데 다른 사람 농구하는 것까지 훔쳐보는 것이냐고요?"

"말조심해라. 이 육갑할 놈아. 훔쳐보다니? 과거에도 난 종종 연무관을 놀러가서 농구를 보고는 했었다고. 클클클…"

박현수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능글맞게 웃자, 확 풍겨오는 입 냄새에 코를 막으며 뒤로 물러나는 정차룡이었다.

"아우…냄새, 연무관 갈 시간 있으시면 이부터 좀 닦으세요."

"시끄러워. 남의 취미생활을 가지고 왈가불가하지 마라."

"에잇! 내가 정말…상대를 말아야지."

박현수와 설전을 벌이고있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진 정차룡은 신경질적으로 등을 돌려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직도 나를 사부로 모실 생각이 없느냐?"

박현수의 음성이 또렷하게 들려왔지만 못 들은 척 무시해버리는 정차룡이었다.

(계속)

※ 본 작품은 프로농구잡지 월간 '점프볼'을 통해 연재된 소설입니다.



김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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