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7.12.17 23:27 / 기사수정 2007.12.17 23:27
최초의 다이너스티
지금의 로스앤젤레스(이하 LA)와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레이커스'라는 구단 명은 1947년 창단 당시에 "the Land of 10,000 Lakes"라 불릴 만큼 호수가 많은 미네소타州 미네아폴리스를 연고지로 삼아 팀이 창단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1960년에 연고지를 지금의 LA로 옮겼지만 팀명은 계속 '레이커스'를 사용하고 있다.
현재 같은 연고지를 사용하고 있는 LA 클리퍼스가 NBA뿐만 아니라 전체 미국스포츠 최악의 구단으로 손꼽히는 것과는 달리, 보스턴과 함께 NBA 양대 명문 구단으로 인정받고 있는 레이커스는 16번 우승을 차지한 보스턴 셀틱스에 이은 두 번째로 많은 14번의 우승을 차지했다.
보스턴의 우승이 60년대에 그들의 우승 절반이 포함되어있는 것과는 달리 레이커스는 NBA 창설 이후 내내 우승권에 머물러 있던 강팀. 그 증거로 그들의 컨퍼런스 우승횟수는 28회로 거의 2년마다 한번은 파이널에 올라간 셈.
레이커스는 창단 초창기부터 당대 최고의 센터, 조지 마이칸을 앞세워 최강 전력을 과시했다. NBA 창설 후 레이커스는 초반 6년간 5번의 우승을 차지하여, NBA 역사상 최초의 왕조(다이너스티)를 건설한다. 좋은 기량의 포워드 짐 폴라드, 플레이메이커 험 쉐이퍼가 있었고, 미네소타 대학 감독 존 쿠들라를 고용했지만 이 당시 레이커스는 마이칸의 팀이었다.
마이칸은 당시로서는 '거인'이라 할 수 있는 6'10"(208cm)의 신장을 가진 선수였다. 드폴 대학에서의 4년 동안 대학 농구를 초토화시키고, *NBL팀이었던 시카고 아메리칸 기어스에 입단하여 그해 1946/47시즌 NBL정상으로 팀을 이끌었다. 다음 시즌인 1947/48시즌 레이커스로 건너온 마이칸은 또다시 소속팀에 그해 NBL우승을 안긴다.
마이칸이 레이커스로 오게 된 것은 당시 시카고 기어스의 회장이자 오너였던 모리스 화이트의 크나큰 실수 덕이다. 그는 기어스를 바탕으로 24개팀의 새로운 리그(Professional Basketball League of America)을 창설하려 했다가 그해 바로 실패하고 팀은 박살이 났다. 그렇게 해서 당시 NBL의 11개팀들이 그의 팀 멤버들을 나눠 가졌는데, 그때 운 좋게도 레이커스가 마이칸을 차지한 셈. 하나 덧붙이자면, NBA에서의 우승경력에서 NBL시절은 포함을 하지 않기에 마이칸은 5번(NBL시절 2번 제외)으로, 레이커스는 14번(NBL시절 1번 제외)으로 인정이 된다
1948년 NBL팀이었던 레이커스가 로체스터 로열스, 포트웨인 졸리너 피스톤스, 인디애나폴리스 Kautskys와 함께 BAA에 건너오게 되는데 이미 BAA에는 보스턴, 뉴욕, 필라델피아, 시카고와 같은 빅마켓에 팀들이 자리하고 있었기에 어려움이 예상되었다.
그러나 이미 이전부터 마이칸의 명성이 널리 퍼져있었기에 BAA 모든 도시의 팬들이 마이칸을 보기 위해 경기장으로 몰려들었고, 덕분에 레이커스는 단숨에 리그 최고의 인기팀으로 떠올랐다. 인기뿐만이 아니었다. 그를 상대했던 BAA 모든 팀들의 골밑이 초토화가 되었고 마치 90년대 많은 팀의 팬이 마이클 조던을 증오하면서도 좋아했던 것처럼 마이칸을 바라보았다. 오죽하면, 2차례 리그 정상을 놓고 다투었던 뉴욕 닉스의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 배포된 경기 팜플렛 제목이 'George Mikan vs. Knicks' 였겠는가.
하지만, 1953/54시즌 29살의 센터를 상한 무릎이 괴롭히기 시작했고 결국 18.1점 14.3리바운드로 성적이 급락하면서 마이칸과 레이커스에 어둠이 찾아온다. 결국, 시즌 막판에는 루키 Clyde Lovellette에게 주전센터를 내주게 되고, 다음 시즌 완전히 백업센터로 나서 10.5점 8.3리바운드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든 마이칸은 아픈 무릎과 함께 은퇴를 결심하게 된다.* 정리하자면, 그의 우승 커리어는 정확히 NBL우승 2번, BAA 우승 1번, 리그 통합 이후 4번으로 굉장히 복잡하다.
* 주 1. 초창기 미국에는 NBL(National Basketball League)과 BAA(Basketball Association of America)라는 2개의 리그가 있었는데, 1949/50시즌부터 BAA의 주도로 양리그가 통합하여 현재의 NBA가 창설이 되었다. 현재 NBA에서는 우승과 리그역사의 기준을 BAA로 잡고 있는 이유는 이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후 다시 1967년에 ABA(American Basketball Association)가 창설된 후 1976년 NBA에 흡수되어 지금까지 단일리그로 이어져 오고 있다.
* 주 2. 무수히 많은 보스턴의 영구결번에 비해 레이커스의 영구결번은 의외로 단출하다. 조지 마이칸이 레이커스의 영구결번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 놀라운 사실.
눈물의 2인자 시대
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에도 레이커스는 꾸준히 PO무대에 올라갔고 우승에 줄기차게 도전을 했지만 눈물을 삼켜야 하는 시대였다. 바로 신화적인 보스턴 셀틱스의 'Celtic Pride' 시대였기 때문이다. 1958/59시즌 파이널에서 보스턴에 0-4 스윕(완패)을 당하고 난 후, 연고지를 1960년에 LA로 옮길때만 하여도 앞으로 이것이 Celtics 8연覇의 시작이자, 레이커스 통한의 시작을 알리는 전주곡이 될 줄은 몰랐었다. 1961년부터 합계 7번이나 정상에서 밀린(그것도 보스턴에게만) 레이커스에 1969/70년은 7전8기의 무대였지만 그 역시도 '7차전 윌리스 리드의 투혼'에 의해 뉴욕 닉스에 밀려났다. 지난 10년간 8번의 준우승….
레이커스 그들의 멤버는 찬란했다. 필라델피아로부터 데려온 역대 '최강'의 센터 월트 체임벌린과 현재 NBA로고의 주인공이자 Mr.clutch 제리웨스트, 파워포워드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엘진 베일러. 제리 웨스트의 백코트 파트너이자 70년대 초반의 레이커스를 이끌게 되는 게일 굿 리치까지….
모두 현재 레이커스의 영구결번인 선수들로 이루어진 이 당시 레이커스에는 너무나 참혹한 성적표가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1968/69시즌엔 NBA에서 유일한 준우승팀 파이널 MVP(제리 웨스트)가 나올 만큼 안타깝게 물러나기도 했다.
그렇게 폭발할 만큼 쌓여만 가던 우승에 대한 갈망은 1971/72시즌이 되어서야 풀리게 된다. 그해 69승을 기록한 레이커스는 시즌 33연승이라는 불멸의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게다가 파이널 상대는 2년 전 그들에게 상처를 남겼던 뉴욕 닉스. 4승 1패로 마이칸 시대 우승 이후 18년간의 우승 도전이 성공하게 된다.*
* 주 3. 그러나 엘진 베일러는 이 시즌에 부상으로 인하여 로스터에서 제외되어 있었고 우승멤버에서 제외되고 만다. 다음 시즌 다시 돌아온 엘진 베일러에겐 또다시 준우승이라는 성적표가 주어진다. 1960년에 레이커스에 드래프트 되어 준우승만 8번하고 은퇴를 하는 그야말로 '무관의 제왕'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아이러니하게도 LA 클리퍼스의 GM직을 맡고 있다.
이어서 下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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