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0.05.11 03:35 / 기사수정 2010.05.11 03:35
[엑스포츠뉴스=이동현 기자] 2002년 5월 9일. 그날 LG는 광주에서 KIA와 원정 경기를 치르고 있었다. 관중수가 4886명에 불과했으니 팬들에게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승부였지만 단 한 사람에게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경기가 됐다.
LG 트윈스의 좌완 류택현(39)이다. 그는 8년 전 광주에서 펼쳐진 그 경기가 지금껏 현역 선수 생활을 계속할 수 있게 만든 밑바탕이라고 말한다. 직구 이외에 이렇다 할 변화구가 없었던 그가 실전에서 처음으로 커브를 던져 상대 타자를 돌려세운 날이다.
"내가 (레퍼토리에) 커브를 추가했다고 해서 갑자기 좋은 투수가 된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상대하는 타자들이 헷갈려 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때까지는 패하는 경기에 많이 나가는 투수였는데 그날 이후로 야구가 잘 되기 시작했어요."
류택현은 지난 7일 잠실 KIA전에 8회 세번째 투수로 등판해 조웅천(SK, 은퇴)에 이어 역대 두번째로 통산 800경기 등판을 달성한 투수가 됐다. 8년 전 우연한 기회에 던져 본 커브가 뜻대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아마 달성하기 어려운 기록이었을 것이다.
기회 놓치지 않으려 슬리퍼도 신지 않아
2002년 당시 LG 사령탑을 맡았던 김성근 감독은 이기는 경기에 최창호, 지는 경기에 류택현을 투입하는 투수 운용을 했다. 그런데 커브를 장착한 류택현의 구위가 점점 좋아지자 김성근 감독은 중요한 순간에 류택현에게 마운드를 맡기는 경우가 많아졌다.
"어렵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어요. 부상 당하지 않으려고 정말 사소한 것까지 신경쓰기 시작했어요. 심지어는 슬리퍼도 신지 않았어요. 발가락을 다칠까봐…."
류택현은 '그때는 더 내려갈 곳도 없었다'고 회상했다. 선발이나 마무리 같은 주요 보직을 맡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1군 엔트리에 자리가 보장돼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랬기에 한 번 찾아온 기회를 어떻게든 살려내야만 했다는 설명이었다.
"야구를 잘하는 것도 물론 어렵죠. 그런데 일정 수준에 오른 다음에 그 기량을 계속 유지하는 건 훨씬 더 어려운 일 같아요. 다치지 않는 게 중요하죠. 그래야 기회가 주어지고, 선수 생활도 오래 할 수 있으니까."
빈틈없는 자기 관리로 체력 유지
류택현은 화려함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선수다. '원포인트 릴리프' 또는 '왼손 스페셜리스트'의 범주에 속하는 투수들은 스포트라이트를 받기가 무척 어려운 게 사실이다. 승리나 세이브와 같은 '크레디트'는 앞뒤로 등장한 투수들이 가져가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기록만 봐도 그렇다. 11일 현재 류택현은 통산 802번이나 마운드에 올랐지만 그가 챙긴 건 12승6세이브가 전부다. 2000년대 들어 프로야구 기록에 홀드 항목이 도입되면서 중간 계투 투수를 평가하는 공식적인 기준이 생겼지만, 아직 그 가치가 제대로 인정되지는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고 좌완 셋업맨이 아무나 할 수 있는 역할은 절대로 아니다. 한 경기에서 던지는 공의 개수는 많지 않아도 워낙 많은 경기에 등판할뿐더러 불펜에서 몸을 푸는 시간도 상당히 길기 때문에 어지간한 체력으로는 버티기가 불가능하다.
"술을 마시더라도 운동만 제대로 하면 괜찮아요. 그런데 보통 한 잔 마시고 나면 그날은 (운동을) 열심히 하지 않게 되거든요. 나이를 한 살씩 먹어가면서 운동 외에 쓸데없는 것들을 안 하고 있어요. 하루하루 열심히 하다 보면 그게 쌓이는 거에요."
류택현이 밝힌 체력 유지 비결이다. 야구를 오랫동안 잘하기 위해 철저한 자기 관리를 했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그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건 정말 어렵다'며 나태함을 경계해야 한다는 요지의 말을 덧붙였다. 30대 후반의 나이에도 여전히 자신의 영역을 지키는 류택현의 '밑천'이었다.
류택현의 2010년, 그리고 다음 목표
류택현은 누구보다 힘든 시즌 초반을 보냈다. 3월 27일 개막전부터 내리 세 경기에 등판한 뒤 2군행을 통보받았다. 관점에 따라서는 신임 박종훈 감독이 팀내 역학 구도에서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17년차 류택현을 희생양으로 삼았다고 볼 수도 있었다.
"계속되는 긴장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죠. 어쨌든 (1군에서) 결과가 안 좋아서 2군에 내려간 거니까…. 마음을 다잡는 시간이었어요. 매 경기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고, 준비를 잘 해왔으니까 앞으로는 좋은 결과가 있을 거에요."
800경기 출장이라는 의미 있는 이정표를 눈앞에 두고 뜻밖에 2군으로 떨어졌던 그는 구리에서 보낸 36일 동안 많은 것을 느끼고 돌아온 듯 보였다. 류택현은 800경기 등판 기록 작성이 시즌 전 예상보다 다소 늦어진 것에 대해 "뭐든 쉽게 먹는 건 없나봐요"라고 말하며 빙긋이 웃었다.
지난해 7월 5일 잠실 두산전에서 사상 최초로 통산 100홀드를 달성한 뒤 그는 '다음 목표는 1000경기 출장'이라고 밝혀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이제 802경기에 나왔으니 앞으로 200경기 가까이 더 등판해야 정복할 수 있는 고지다. 매년 70경기씩 등판한다고 쳐도 꼬박 세 시즌이 걸린다.
한국식 나이로 이미 40대가 된 류택현이 과연 그의 다음 목표를 이룰 수 있을까. 여전히 1000경기 등판을 마음속에 담고 있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돌아온 그의 대답은 짧고 명쾌했다.
"1000경기요? 물론 해야죠."
[사진 = LG 류택현 ⓒ 엑스포츠뉴스 권혁재 기자]
ⓒ 엑스포츠뉴스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실시간 주요 뉴스
실시간 인기 기사
엑's 이슈
주간 인기 기사
화보
통합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