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최종편집일 2024-11-11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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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바 토크] (16) 브라질 최고의 드림팀 1기, 1970 대표팀

기사입력 2010.02.26 00:58 / 기사수정 2010.02.26 00:58

박문수 기자

[엑스포츠뉴스=박문수 기자] 지난 삼바 토크 14, 15편에서는 브라질 축구의 초기 역사에 대해 알아봤다.

브라질의 축구는 1894년 브라질 출신의 어머니와 영국 출신의 아버지를 둔 찰스 밀러에 의해 시작됐다. 그는 자신의 재력을 이용해 어머니의 고향에 축구장을 건립했으며 영국에서 가져온 축구공과 유니폼으로 축구 클럽을 만들면서 브라질 축구의 기반을 다졌다.

1914년에는 잉글랜드 대표팀과의 친선 경기를 통해 본격적으로 국제 축구에 발을 내밀게 됐으며 온갖 시련을 겪은 결과, 1958년 스웨덴 대회에서 (신성 펠레와 가힌샤, 바바의 활약에 힘입어) 월드컵 첫 우승에 성공했다.

혹자는 두 번의 삼바 토크를 통해 1962년까지 브라질 월드컵 역사에 대해 언급했으며, 우리는 여기서 펠레의 등장 이후, 세계 최고의 축구 강국이 된 브라질에 대해 알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브라질 축구의 역사는 펠레의 등장 전후로 나눌 수 있다. 이전에 레오디나스를 비롯해 몇몇 빼어난 선수가 존재했지만, 그들은 월드컵이란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이 때문에 펠레는 조국에 첫 번째 월드컵 우승을 가져다준 상징적인 인물이며, 브라질 축구의 창조주이자 구세주로 불린다. 게다가 펠레 시대 이전의 브라질은 오늘날처럼 강대국이 아닌, 그저 그런 팀 중 하나였다는 점에서 그의 등장과 펠레 시대의 브라질은 오늘날까지 그들 축구의 뼈가 됐다.
 
그렇다면, 이번 삼바 토크 16편에서는 브라질 역대 최고의 드림 팀으로 불린 1970, 1982, 2006년 브라질 대표팀 중 1970년 멕시코 대회에서의 브라질과 축구 황제 펠레에 대해 알아보자.

 

▶ 패배의 쓴맛도 잠시, 완전한 팀으로 돌아온 1970 브라질

두 번의 대회에서 연속 우승을 차지한 브라질은 잉글랜드에서 열린 1966년 월드컵에서 이변의 희생양이 되며 상승세가 한풀 꺾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에이스 펠레가 상대 수비의 거친 반칙 때문에 부상으로 중도 하차했다. 가힌샤의 부재까지 겹친 브라질은 결국, 펠레가 결장한 예선 2번째 경기인 헝가리전에서 1-3으로 패했으며 1차 리그 최종전인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서는 검은 표범 에우제비우의 활약에 고개를 떨어뜨리며 1-3으로 무릎을 꿇었다.

지난 두 번의 대회에서 얻은 우승이란 성과는 브라질에 강대국이란 명성을 주었지만, 잇따른 스타 플레이어에 대한 반칙은 그들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특히 이 대회 이후, 펠레는 다시는 월드컵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는 인터뷰까지 하면서 자신에 대한 수비수의 불필요한 반칙에 대한 혐오감을 직접적으로 드러냈다.

그럼에도, 펠레의 애국심은 꺾이지 않았다. 역대 최고의 드림팀으로 불린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의 브라질은 돌아온 펠레를 주축으로 카를로스 알베르토, 브리토, 피아차, 자이르지뉴, 히벨리누, 토스탕, 제르손, 클로도알도 등, 내로라하는 스타 플레이어의 맹활약에 힘입어 줄리메 컵의 영구 소유자가 된다.

마리오 자갈로 체제의 이 드림팀은 4-2-4전술과 4-3-3전술을 혼용하는 형태로 팀을 만들었는데 최전방 포워드로는 하얀 펠레로 불린 불운의 사나이 토스탕이 나섰으며 그 아래에는 축구 황제 펠레가 위치한다.  두 선수 모두 개인기와 드리블이 뛰어나기 때문에 상대 수비진을 흔드는 능력은 독보적이었다.

한편, 좌,우 날개는 히벨리누와 자이르지뉴가 맡았다. 악마의 왼발로 불리며 호베르투 카를로스보다 뛰어난 프리키커라는 평가를 받는 히벨리누가 좌측을 맡으며, 가린샤의 후계자로 불리며 이 대회 전 경기 득점에 성공한 자이르지뉴가 우측을 담당했다.

중앙 미드필더인 제르손과 클로도알도는 각각 다른 역할을 담당했는데 제르손은 오늘날의 안드레아 피를로처럼 빌드업 과정에서 팀 공격의 시발점이 되며, 플레이메이커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반면 클로도알도는 홀딩 미드필더이다. 게다가 빼어난 드리블 능력을 바탕으로 공격에 가담하는 능력도 지녔다.

측면 수비진은 알베르토, 에베르알도가 나섰는데 두 선수는 브라질 대표팀에서 은퇴를 선언한 카푸, 카를로스와 유사하다. 공수 양면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며 기회가 생기면 적극적인 오버래핑으로 직접적인 득점에 가담한다. 좌우 측면을 장악했던 이들은 수비와 적극적인 공격 참가로 현대축구에 풀백의 원형이 되었다.

중앙 수비진은 제공권과 공중볼 장악이 뛰어난 브리토와 피아차가 나섰다. 두 선수의 호흡도 좋았기 때문에 당시 브라질은 안정적인 수비진영을 갖추게 됐다.

前 대회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은 수비 축구의 중요성을 알려준 대회였다. 지금보다 전술적인 측면에서 미미한 부분이 보여지지만, 당시 흐름은 안정적인 수비를 기반으로 지키는 축구를 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럼에도, 자갈로가 이끈 브라질은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공격으로 승승장구했다. 역대 월드컵 대표팀 중에서 최고로 불리는 이 팀은 빼어난 선수들이 많았기 때문에 공격력에서 화룡점정을 찍었다. 마치 한 골을 내주면 두 골을 넣을 수 있을 만큼 든든한 선수들이 포진했기 때문에 아름다운 팀으로 불렸다.

▶ 드림팀의 월드컵 제패, 줄리메 컵을 영구 소유하다
 
잉글랜드, 루마니아, 체코 슬로바키아(이하 체코)와 한 조에 속한 브라질은 체코와의 예선 첫 경기에서 펠레와 히벨리누, 자이르지뉴의 연속 득점에 힘입어 4-1로 승리를 거둔다. 특히 자이르지뉴는 이 대회에서 전 경기 득점에 성공. 가힌샤의 진정한 후계자임을 입증한다. 게다가 자이르지뉴는 축구 황제 호나우두를 오늘날의 슈퍼스타로 만든 장본인이다.

체코와의 첫 대결에서 승리한 브라질은 전 대회 우승팀은 잉글랜드와 조별 예선 2차전을 치른다. 고든 뱅크스, 바비 무어, 바비 찰튼, 조프 허스트 등 전 대회 주축 멤버들이 건재한 잉글랜드는 브라질, 서독, 이탈리아와 함께 이 대회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혔다. 이 때문에 브라질과 잉글랜드와의 경기는 사실상 미리 보는 결승전과 다름없었다. 팽팽하던 양 팀의 경기는 자이르지뉴의 한 방에 힘입은 브라질이 승리했으며 이후, 그들은 루마니아와의 조별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도 3-2로 승리. 조 1위로 8강에 진출한다.

8강 상대 페루는 브라질에 상대되지 못했다. 비록 테오필리오 쿠비야스라는 스타 플레이어가 있었지만, 브라질에는 그보다 많은 슈퍼스타가 존재했다. 결국 토스탕의 2골과 히벨리누, 자이르니쥬의 득점포가 터지며 쿠비야스와 가야르도가 각각 한 골씩 넣은 페루를 4-2로 꺾으며 4강에 진출한다.

4강에서 만난 우루과이는 브라질의 예상보다 강했다. 이미 1950년 자국 월드컵 결승전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안겼던 그들과의 대결은 브라질로서는 설욕의 기회였지만, 우루과이의 쿠비야가 전반 19분에 선제 득점을 올리며 줄리메 컵을 노리는 브라질에 쓴잔을 맛보게 했다.

그러나 우루과이의 이날 선제 득점은 훗날 1982년 스코틀랜드와 브라질의 경기에서 지미 힐의 발언처럼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든 셈이 됐다. 이후, 브라질은 클로도알도의 동점골과 자이르지뉴의 역전 골, 히벨리누의 추가 득점까지 나오며 우루과이에 3-1로 완승했다. 게다가 우루과이 선수들은 브라질의 매서운 공격력에 흥분하며 잇따른 반칙으로 경고 3장이나 얻으며 자멸했다.

이로써 브라질은 6전 전승으로 파죽지세로 결승에 진출했다. 상대는 월드컵을 2번이나 제패했던 카테나치오의 이탈리아였으며 그들도 서독을 꺾은 상승세였기 때문에 1970년 멕시코 월드컵 결승전은 줄리메 컵 주인의 옥석을 가리는 경기이자 명승부로 기대를 모았다.

참고로 국제 축구 연맹 FIFA는 클래식 풋볼이란 코너를 통해 브라질과 이탈리아의 1970년 월드컵 결승전 경기를 명경기로 꼽았다.

6월 21일 결승전, 멕시코 시티의 아스테카 구장에 모인 관중은 브라질과 이탈리아의 월드 더비(역대 월드컵 최다 우승팀 1,2위인 양 팀의 경기는 남미와 유럽 대표팀의 맞대결이라 하여 월드 더비로 불린다. 참고로 최근 브라질은 이탈리아와의 맞대결에서 모두 완승을 했다.)에 환호했으며 이러한 열광에 보답하듯이 펠레가 전반 18분 만에 헤딩으로 선제 득점을 올렸다.

비록 월드컵에서 선제 득점을 올리는 팀이 패한다는 공식이 존재했지만, 이날 펠레의 선제 득점은 브라질의 골 폭풍에 대한 예고편이었다. 징크스에 대한 고민을 하는 순간, 이탈리아의 동점골이 나왔다. 전반 37분 보닌세냐가 펠릭스 골키퍼의 실수를 득점으로 연결한 것이다.

팽팽한 전반전을 마친 양팀의 경기 양상은 후반전에 완전히 갈렸다. 브라질은 제르손의 강력한 중거리 슈팅으로 역전했으며 세트 피스 상황에서 제르손과 펠레를 거친 공이 자이르지뉴에 연결. 추가 득점에 성공했다. 스코어는 어느덧 3-1로 벌어졌으며 브라질은 줄리메 컵의 주인이 되기까지 20분이란 시간을 남겨둔 상태였다. 후반 종료 직전 브라질은 역대 월드컵에서 가장 멋진 골로 불리는 환상적인 묘기를 보여준다. 주장이자 오른쪽 풀백의 교과서로 불리는 카를로스 알베르토의 발끝에서 마무리된 이번 득점은 패스 플레이를 통해 아주리 군단의 카테나치오를 뚫기 시작한 카나리아 군단은 펠레의 패스를 받은 알베르토가 강력한 중거리 슈팅을 득점으로 연결하며 4-1로 대승한다.

이로써 브라질은 줄리메 컵의 영구 주인이 됐으며 감독인 마리오 자갈로는 선수와 감독으로서 모두 월드컵을 제패하는 최초의 감독이 된다. 줄리메 컵이 당시 멕시코 대통령인 오르다스의 손을 떠나 알베르토에게 전해졌을 때, 관중과 선수들은 비바 브라질을 외치며 그들의 우승에 환호했다. 브라질 국내는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으며 선수단의 입국 후에는 하나의 축제의 장이 됐다. 정치적 갈등 때문에 어수선했던 국내 사정도 나아졌으며 여태까지 그들이 세운 성과는 역대 최강의 팀으로 꼽힌다.

 

▶ 브라질 축구의 구세주, 축구 황제 펠레

앞서 말했듯이, 브라질 축구는 펠레의 등장 이후 진정한 강호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월드컵과 인연이 없었던 브라질이 펠레의 발끝에서 3번의 월드컵을 우승하며 줄리메 컵의 영구 주인이 된 점이 그의 상징성에 대한 단적인 예이다.

에지송 아란치스 두 나시멘뚜는 1940년 10월 23일 브라질의 뜨레스 코라송이스에서 태어났다. 훗날 펠레라는 애칭으로 축구 황제로 군림하게 되는 그는 15살이란 어린 나이에 산투스에 입단하며 자신의 신화 창조를 시작한다. 마치 신화 속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펠레는 16세의 나이에 브라질 리그에서 독보적인 포워드로 성장한다. 이러한 활약은 17세란 어린 나이에 브라질 대표팀의 일원으로 월드컵에 참가하는 기회를 줬으며 단 4경기에 출전해서 스웨덴 월드컵 MVP를 차지하는 영광을 얻는다.

지난 삼바 토크 15편에서 언급했듯이 비센트 페올라 감독은 소련과의 경기를 기점으로 펠레와 가힌샤라는 최고의 공격진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바늘과 실처럼 하나가 된 펠레와 가힌샤는 서로의 부족한 점을 메워주며 브라질을 강호로 한 발 나아가게 하며 조국의 첫 우승을 선사한다.

펠레는 자신의 라이벌로 볼 수 있는(시대적으로 라이벌은 아니지만, 마라도나와 크루이프의 실력 또한 발군의 기량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펠레의 라이벌로 볼 수 있다. 순수하게 실력으로 비교했을 경우이다. 호나우두 역시 펠레의 라이벌로 볼 수 있지만, 그는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에 제외한다) 디에고 마라도나, 요한 크루이프가 최고의 선수가 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펠레는 10대라는 어린 나이에 모든 것을 이룬다.

너무나도 완벽해서 불가사의하며 창조적이고 충격적인 그의 재능은 오늘날 브라질 축구의 진정한 아버지로 볼 수 있다. 173cm라는 단신에도, 빼어난 개인기와 드리블 능력, 동물처럼 감각적인 공격에서의 반응속도와 침착성, 가속력, 점프력, 헤딩력 등, 펠레는 공격수가 필요로하는 모든 것을 지닌 인물이었다.

지금과는 달리 유럽 무대에서 자신의 재능을 입증하지 못했지만, 당시 펠레가 이끈 산투스가 월드 투어에서 90%이상의 승률을 기록한 점은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산투스는 펠레와 함께 세계 클럽 선수권 대회에서 2번 연속 우승한 전례도 있으며, 그의 산투스 시절 득점 기록이 438경기에서 474골이란 점은 펠레의 우월함을 보여준다. (해트트릭도 92회나 기록했다)

현재 펠레는 누리꾼의 조롱 감이 되며 저주의 대상이 됐지만, 그의 능력과 업적은 어떠한 선수가 오더라도 쉽게 대적할 수 없는 특별함을 지니고 있다. 다만, 입방정은 본인의 이미지를 위해서라도 자제해야 할 것이다.

[관련 기사] ▶ [삼바토크⑮] 펠레의 등장, 강호로 도약한 브라질 -1

[사진= 피파가 인정한 최고의 클래식 매치 브라질과 이탈리아의 1970년 월드컵 결승전, 축구황제 펠레 ⓒ FIFA 공식 홈페이지 캡쳐]



박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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