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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 중간점검②] '삼맥종=얼굴 없는 왕?'…사료로 풀어낸 궁금증 셋

기사입력 2017.01.18 09:00 / 기사수정 2017.01.18 08:48

김주애 기자

[엑스포츠뉴스 김주애 기자] 신라시대 화랑의 이야기를 최초로 브라운관에 옮긴 KBS 2TV 월화드라마 '화랑'. 사다함, 김유신, 관창 등 역사적으로 유명한 화랑도 여러명에다가, 무예가 뛰어난 꽃미남들의 모임이라는 매력적인 소재에도 불구하고 화랑을 전면에 내세운 드라마가 없었던 것은 역사적으로도 정확히 밝혀진 사실이 없었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역사 기록물로는 화랑의 정확한 설립연도와 목적을 알 수 없다. 또 1989년 세상에 공개된 박창화의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기존에 밝혀지지 않은 화랑에 대한 정보들이 기록돼 있었으나, 진위 여부에 대해 논란이 많아 이 역시 정확한 정보라 할 수 없다. ('화랑세기'는 실존하는 책으로 8세기경 한산주 도독이던 김대문이 저술한 실제 역사서로 '삼국사기'에 극히 일부가 인용돼 있다.)

모든 사극이 사료를 바탕으로 역사적 상상력을 더해 만들어지지만, 알려진 게 거의 없는 화랑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보통의 사극보다 더 큰 상상력이 필요하다. 이런 연유로 '화랑'의 윤성식 PD는 "'화랑'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역사극으로 보기 어렵다. 최소한의 역사적 사실은 고증을 거쳤으나 대부분의 사건은 가성의 이야기라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과연 드라마 '화랑'은 실제 역사에서 어떤 사실을 가져오고, 어떤 사건을 만들어냈을까. '화랑'을 보다보면 자연스레 생기는 궁금증을 사료를 바탕으로 풀어봤다.

▲ 삼맥종, 정말 얼굴없는 왕이었을까

극 중 삼맥종(박형식 분)은 지소태후(김지수)의 섭정 아래 숨어지내는 '얼굴없는 왕'으로 등장한다. 그는 당대 막강한 귀족 세력인 박영실(김창완)에 의해 언제 암살당할지 모른다는 위협 속에 살고 있으며, 자신을 '세상에 둘도 없는 상등신이래'라고 말하는 백성들의 추측에도 반박하지 못하고 쓴 웃음만 삼킨다. 이래서는 언제 신라 최전성기를 이끈 진흥왕으로 성장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도한다.

실제 역사 속 삼맥종은 신라 23대 국왕인 법흥왕의 동생 갈문왕 입종과 법흥왕의 딸 지소부인 사이에서 534년 출생했다. 삼맥종은 법흥왕이 죽은 540년 7세라는 어린 나이로 즉위했다. 이에 어린 삼맥종을 대신해 어머니인 지소태후가 실제로 신라를 다스렸다. ('삼국사기'에서는 '왕태후가 섭정했다'고만 기록되어 있어 법흥왕의 왕비인 보도부인이 섭정했다는 의견도 있다. '삼국유사'와 '화랑세기'에서는 섭정을 한 태후가 지소부인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지소태후가 섭정을 하는 10년 여의 시간 동안 삼맥종이 실제로 얼굴없는 왕으로 지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특히 진흥왕 전대의 왕인 법흥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한 왕임을 기억하면 '얼굴없는 왕'이라는 설정이 더욱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지소태후가 박영실에 재가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갈등을 빚으며 원수처럼 지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아 삼맥종이 친정하기 전에는 위태로운 왕위였을거라는 가정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상상이다.

그러나 드라마 상에서 가야의 악공 우륵(김원해)이 신라로 넘어온 것으로 보아 이미 대가야가 멸망한 시점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데, 시기상으로 이는 이미 진흥왕이 직접 집권하며 본격적인 영토확장을 시작한 때다. 드라마 전개가 역사의 타임라인을 정확히 따라가지는 않지만, 역사가 곧 스포일러인 진흥왕의 업적이 극 중에서도 곧 전개될거라는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 '화랑', 누가·왜·언제·무엇을 위해 만들었을까

드라마 '화랑'에서는 지소태후가 아들 삼맥종에게 탄탄한 왕권을 물려주기 위해 왕을 위협할 수 있는 귀족의 아들들을 화랑으로 모은다. 극 중에서 이 상황은 귀족들의 아들을 자신의 통제 아래에 둬, 그들을 견제하려는 지소태후의 계략이 묘사된다.

현존하는 역사서에 따르면 화랑이 설립된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다. 삼국시대를 기록한 유일한 정사로 알려진 '삼국사기'에서는 진흥왕 37년(576) 화랑제도가 정립됐다고 서술돼있지만, 앞서 562년 활동한 사다함이라는 유명한 화랑의 일화 역시 기재하고 있다. 이에 역사학자들은 576년 이전에도 민간 단체로서 화랑이 존재했으나, 진흥왕 대에 이르러 이를 국가적 집단으로 조직 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 일연이 작성한 '삼국유사'와 조선 후기 안정복이 쓴 '동사강목'에서는 진흥왕 원년인 540년 화랑제도가 시작됐다고 보고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화랑이 시작된 시기는 다르게 기록하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화랑의 기원을 '원화'라고 설명하고 있다. 진흥왕 시대에 남모와 준정이라는 아름다운 두 미녀를 뽑아, 그들로 하여금 무리를 이끌게 하며 나라에 필요한 인재를 발탁하게 한 원화제도. 하지만 이 제도는 준정이 남모를 질투하여 살해한 뒤, 준정역시 사형에 처해지며 해체됐다. 이후 신라 조정에서는 미녀가 아닌 미남자들을 택하여 화랑이라고 이름짓고 원화를 대신하게 했다.

또 화랑세기 필사본에 따르면 법흥대왕이 아름다운 위화랑을 사랑해 화랑이라고 불렀다고 전하며 이를 '화랑'이라는 이름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이 기록에서는 지소태후가 국정을 맡았을 때 원화 제도를 폐지하고 화랑을 설치하며, 위화랑을 우두머리로 삼아 풍월주라 하였다고 말한다.

화랑 제도의 설립이 지소태후의 뜻인지, 진흥왕의 뜻인지도 정확하게 기록되지는 않았다. 정확한 목표도 알 수 없으나 문헌에 기록된 화랑의 업적을 보면 이 제도를 통해 인재들을 발굴했으며, 그들에게 효도와 우애, 충성과 신의를 가르쳐 나라와 왕을 보필하는 장수를 만드는 데 요긴하게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화랑'은 진짜 칼군무를 췄을까

5회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화랑 생활을 시작한 '화랑' 주인공들. 1대 풍월주 위화공(성동일)의 가르침 아래에 도덕경을 공부하고, 칼군무(검무)를 통해 즐거움을 배우고, 궁마(활과 말)를 익히며 지-덕-체를 모두 갖춘 인재로 거듭나고 있다.

실제 역사에서도 화랑은 다재다능한 인물들로, 일반 백성들로붙어 숭상받았다고 평한다. '삼국사기'에는 "도의로써 서로 연마하고, 혹은 노래와 음악으로 서로 즐겼는데, 산과 물을 찾아 노닐고 즐기니 멀리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화랑이 한 일이 서술돼 있다. 

이에 그들이 서로 연마한 것들로 무예, 글 등을 추측할 수 있다. 또 '화랑세기'에는 제15세 풍월주 유신공(김유신)이 풍월주에 오른 후 매알같이 낭도들과 궁마를 단련했다고 적혀있어, 궁마 역시 화랑들이 즐겨한 훈련이라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합숙 훈련을 하고 있는 극 중 화랑들과 달리 실제 화랑은 특정 장소에서 숙식을 한 것은 아니다. '삼국유사'에는 화랑 죽지가 며칠째 모임에 참석하지 않는 낭도 득오를 찾아가는 내용이 나온다. 이로 미루어 보아 화랑은 정기적인 모임을 통해 모여서 훈련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덧붙여 '화랑' 3회에서는 화랑들이 현대의 축구를 떠올리게 하는 축국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현존하는 역사서 중에는 '삼국유사'에서 전하는 태종 무열왕과 김유신의 이야기가 축국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하지만 '화랑세기 필사본'에서는 법흥왕 때부터 축국을 했다고 전해진다.

savannah14@xportsnews.com / 사진 = 화랑문화산업전문회사, 오보이 프로젝트, KBS 2TV 방송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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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애 기자 savannah14@xport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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