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9.03.16 11:20 / 기사수정 2009.03.16 11:20
[엑스포츠뉴스=전성호 기자] 축구와 야구는 명실공히 대한민국의 양대 인기 스포츠다.
월드컵이 열릴 때면 온 나라가 들썩이고 한국시리즈 앞에서는 제아무리 인기드라마라도 결방을 피할 수 없다. 최근 열리고 있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역시 매일 아침마다 세 명 이상 모인 자리에서는 늘 화제에 오르고 있다.
그러나 국가대표급에서 거의 동일한 두 스포츠의 인기는 프로에서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인다. 프로야구는 철저한 지역연고의식의 기반 위에서 꾸준한 인기를 얻는 반면, 프로축구는 빈약한 연고지 충성도와 함께 들쭉날쭉한 관객 수 등 야구에 비해 안정적인 인기를 얻지 못하고 있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 걸까? 그 원인을 두 스포츠의 전파 과정을 비롯해 이들이 국내에서 인기를 얻게 된 과정에서 찾아보는 건 흥미로운 작업이 될 것이다.
'국제적'인 축구, '지엽적'인 야구
한국의 축구사와 야구사를 논하는 자리에서 가장 중요하게, 그리고 가장 먼저 거론되는 것은 국가대항전 축구경기와 고교야구다.
축구는 야구보다 훨씬 국제적인 스포츠다. 1908년 런던올림픽에서 처음으로 경기를 가졌고, 1930년에는 월드컵이 시작됐다. 이에 반해 야구는 1912년 스톡홀름올림픽에서 경기가 있었는데 스웨덴만이 미국에 대항했다가 대패했다. 이렇다할 상대팀이 없다는 것은 야구가 올림픽에서 사라지는 것을 의미했다. 이후 1992년까지 80여 년간 야구는 올림픽 정식종목이 될 수 없었다.
실제로 1920년대 당시 축구는 이미 전 세계적으로 전성기를 누렸지만 야구의 본고장 미국은 1990년대까지 전 세계에 야구를 전파하기 위한 진지한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고, 따라서 몇몇 나라를 제외하고는 외국에서도 야구를 배우려는 관심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상업적 이윤 추구에만 관심을 가진 메이저리그 측은 시즌이 방해받는 것이 싫어 올림픽에 아마추어 선수들을 출전시켰다. WBC의 미국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대진 방식만 보더라도 프로선수들이 출전하는 국제야구대회는 철저히 메이저리그 상업주의 논리에 의해 벌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축구가 야구에 비해 전 세계적 스포츠가 된 데에는 역사적인 배경 역시 존재한다. 19세 말에서 20세기 초 영국의 해외 진출이 대단히 활발했기 때문에 세계 거의 모든 도시 사람들이 축구를 접하게 된 것이 축구의 세계화를 이끌었다. 만약 미국의 경제적 지배력이 40년 정도만 빨리 시작됐더라면 축구보다 야구가 세계적 스포츠가 됐을 수도 있다.
또 한가지 축구가 글로벌한 스포츠가 될 수 있었던 이유엔 그 활동에 대한 '접근성'이 있다. 축구는 공 하나, 하다못해 돼지 오줌보에 평평한 지면만 있으면 어느 곳에도 할 수 있는 스포츠다. 잘 사는 나라든 못 사는 나라든, 고지대이건 해변이건, 적도 부근에서도 시베리아에서도 할 수 있는 스포츠가 축구다.
반면 야구는 제약이 많다. 공은 물론이고 배트와 글러브 등 여러 장비가 필요하다. 널찍한 들판도 있어야 하고 장비 가격도 만만치 않아 경제적 여유와 공간적 여유가 함께 수반되지 않으면 하기 힘든 운동이 야구다. 이런 제약이 야구를 전 세계적 스포츠로 성장시키지 못하게 했다. 경제적으로 낙후된 아프리카에서 야구를 하는 나라가 거의 없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전성기의 차이점
어느 스포츠이건 국민적인 인기를 얻는 계기가 되는 대회가 있다. 승리를 향한 열망과 극적인 드라마가 펼쳐지는 경쟁의 장을 통해 사람들은 그 스포츠가 가진 참 재미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한 스포츠인 축구는 일찌감치 전 세계가 참여하는 국가대항전인 올림픽의 정식 종목이었고, 월드컵이란 고유의 대규모 국제대회를 개최하고 있었다. 많은 나라에서 사랑받던 스포츠였기에 두 메이저 대회 외에도 아시아의 군소 국제 대회가 여럿 생겨났고, 그만큼 국가 간의 경기를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축구는 일본강점기 조선축구단이 1935년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를 제패하고, 1954년 스위스월드컵 예선에선 일본을 꺾고 월드컵 진출권을 획득하는 등 우리 민족의 일제 감정기의 치욕에 대해 위로를 주는 존재였다.
또한, 올림픽, 아시안컵, 메르데카컵, 팍스컵 등의 굵직한 국제대회가 한 해가 멀다 하고 열렸다. 이러한 일련의 대회에서 성인대표팀과 청소년대표팀 모두 아시아를 제패하면서 축구의 위상은 급격히 올라갔다. 축구를 보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기준 역시 자연스레 국가 간의 대항전에서 형성되었다.
반면 야구는 축구의 월드컵 같은 국가대항전 급의 대형 이벤트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결국, 두 스포츠에서 가장 인기있던 대회의 층위가 달랐던 것이다. 프로리그가 없던 시절, 축구는 국가 간의 대결이 가장 주목받던 경기였다면 야구는 국내 간의 대결, 즉, 각 지역(또는 계층)을 대표하는 고교야구의 뜨거운 경쟁과 열기를 통해 인기를 얻었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축구를 볼 때는 '대한민국'이란 이름이 기준이었지만, 야구를 볼 때는 '우리 고장'에 감정을 이입하는 것에 익숙했다. 이러한 차이는 두 스포츠의 프로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지역'에 정착하지 못한 축구
쉬어가는 의미에서 농담처럼 전해지는 짧은 얘기 두 가지만 하고 가자.
1. 식당에 들어간 연인 한 쌍. 우연히 TV중계 중인 K-리그 경기를 보게 됐다. 화면 상단에 있는 '울산 VS 인천'이란 자막을 보고 여자친구는 애인에게 물어봤다. "왜 우리나라끼리 축구를 해?"
2. 유명 가수가 한 축구시상식에 초대 가수로 공연을 펼쳤다. 시상식이 끝나고 고위관계자들과 함께 한자리에서 이 가수는 당당하게, 하지만 진실하게 얘기했다. '축구를 너무 좋아하는데, 4년에 한번 씩 밖에 안 해서 너무 아쉬워요."
실소를 머금게 하는 말들이지만, 우리나라 일반 국민이 가진 축구의 경쟁의식에 대해서 이보다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말은 없다.
82년 출범한 프로야구의 인기 기반은 고교야구였다. 프로야구는 70~80년대 고교야구 열풍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프로야구는 출범 당시 프로축구와 마찬가지로 광역연고제(도시가 아닌 도 단위의 연고)를 채택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로야구의 경우는 철저한 프랜차이즈제를 도입해 구단주부터 선수에 이르기까지 본거지 출신으로 구성, 지역적 특성을 강하게 풍기며 연고지에 자리 잡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 다르다.
이는 고교야구에서 비롯된 지역간 대결구도가 자연스럽게 프로야구에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후 지역연고제로 전환한 이후에도 프로야구팀들에 대한 팬들의 지역주의는 강할 수밖에 없었다.
제도 역시 뒷받침됐다. 야구에는 유소년 시스템이 없었지만 99년까지의 신인 드래프트 제도가 지역주의를 살려 각 팀이 각 지역에서 나고 자란 프랜차이즈 스타를 보유할 수 있게 했다. 83년부터 86년까지는 구단별로 무려 10명의 1차 지명권을 행사하는 등, 프로야구는 지역색을 그대로 살려나가 팬들로 하여금 팀에 대한 자연스러운 애착을 가지게 하였다.
반면 한국 프로축구는 애초에 연고지라는 개념이 약했다. 앞에서 밝힌 것처럼 프로축구는 1983년 슈퍼리그 출범 당시 광역연고지 방식을 채택했는데 할렐루야가 강원·충청, 유공이 서울·경기·인천, 대우가 부산·경남, 포항제철이 대구·경북, 국민은행이 전라도에 연고를 뒀다. 그러나 프로야구처럼 각 팀이 연고에 대한 지역색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그 구분은 형식적이고 애매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후 1990년부터 각 구단은 도시연고제로 전환을 했고, 1996년부터는 당시 큰 성공을 거두던 J리그를 모방해 구단 완전 지역 연고제가 실시되었다. 이때부터 현재처럼 각 팀 명칭에 지역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프로축구연맹은 서울의 공동화를 위해 당시 서울에 있던 세 팀 LG, 유공, 일화를 강제연고이전시켰다. 연맹은 지역축구의 발전과 서울이란 거대 시장의 독점을 막기 위해서란 명문을 내세웠다. 결국, 세 구단은 각각 안양, 부천, 천안으로 연고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해당 지역을 어떤 비전이 있어 선택했다기보다 차후 서울에 재입성하기 위한 중간기착지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았다. 이들 세 팀 중, 단 한 팀도 현재 당시 연고지를 지키고 있지 않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인위적인 지역연고제가 얼마나 효과 없는 일이란 걸 알 수 있다. 단순히 연고제도를 채택했을 뿐 실제 연고지역에 팀이 녹아드는 노력은 부족했던 것이다.
지역과 하나 되기 위한 노력이 필요
프로스포츠의 흥행에 연고지 의식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팀 이름 앞에 지명 하나 달랑 붙이고 번듯한 경기장 하나 세운다고 하루아침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태생적으로 지역적 대결 구도에 익숙하지 못한 프로축구이기에 인위적 연고지와 밀착되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내 고장에서 태어난, 혈연과도 같은 애정을 쏟을 수 있는 팀이 애초부터 아니었기에 프로야구와 같이 팬들의 자발적인 팬덤이 형성되는 것은 자생적인 시민구단이 아니라면 사실상 불가능하다. 프로축구단이 내 고장을 대표하는, 나와 정체성을 함께 나누는 팀이라는 인식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기업형 구단의 경우 '장사가 되지 않는다.'라는 이유로 하루아침에 연고지를 바꾸는 일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 같은 환경 속에서 일방적으로 지역에 대한 연고의식을 축구팬들에게 강요하려 한다면 이것만 한 넌센스도 없다. '당신 지역에 팀을 만들었으니 좋아해 주시오. 축구팬으로서 그건 신성한 의무가 아니겠소'란 식의 접근이다. 그래놓고 어느 날 갑자기 이들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간다. 이건 팬을 바보로 만들고 스스로 프로축구의 인기를 갉아먹는 것밖에 안된다.
포털사이트에 광고를 내고, 길거리에 현수막을 걸고, 무료입장권을 뿌리는 것만으로는 결코 사람들을 경기장에 데려올 수 없다. 초특급 스타플레이어를 영입한다고 해도 그 효과는 반짝 특수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일반론적 마케팅의 방법은 통하지 않는다.
비록 그 시작이 인위적이고 우연적이었을지라도, 연고지역 주민들과 구단과의 관계를 필연적인 관계로 바꿔줄 수 있는 작업이 필요하다. 자기 고장 축구팀에 대해 애정을 느낄 수 없는 이들에게 물어보면 한결같이 나오는 대답이 '내 팀 같지가 않다.'라는 말이다. 이건 뒤바꿔 얘기한다면 프로축구단이 해당 지역에 대한 애정과 열정을 주민들에게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적어도 연고지를 내세운 팀이라면 이건 기본 중의 기본이다.
많은 변화를 가져오고 있기는 하지만, K-리그 구단들의 지역 마케팅은 아직도 약하기만 하다. 유럽의 경우만 하더라도 프로선수들이 연고지역의 병원이나 사회복지시설을 매주 방문하고, 아이들과 만나 축구를 가르쳐주기도 한다. 자원봉사를 나가기도 하고, 사인회 등을 통해 팬들과의 만남을 자주 갖는다. 언론에 내보이기 위한 일회성 행사가 아닌, 지속적으로 지역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K-리그 팀들도 얼마든지 이러한 활동을 통해 지역사회와 밀착할 수 있다. 최근 몇 년 전 유행했던 TV 프로그램처럼 해당 지역의 불우한 이웃의 집을 고쳐주거나, 게릴라 홍보활동을 위해 거리로 나가 팬들과 직접 만날 수도 있다. 지역의 한 식당이나 패스트푸드점에서 일일 종업원 체험을 하고 방학 기간에는 학생들과 선수들이 함께 캠프를 떠나는 것도 괜찮다. 구단의 엠블럼이 박힌 공을 각 학교에 나눠주어 아이들이 그 공을 차며 축구를 할 수 있게 해줄 수도 있다. 시와 연계한다면 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지역 행사는 무궁무진하다.
지역에는 많은 초중고등학교의 축구팀이 있다. 뿐만 아니라 매주말마다 각 학교 운동장과 공원 등에서 '조기축구회'로 불리는 동호인 축구 경기가 벌어진다. 여기에 선수들이 직접 참가해 축구교실을 열어주거나 구단의 훈련 프로그램을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건 어떨까. 혹은 구단의 이름으로 지역축구대회를 개최해 유소년 급 선수들은 물론 지역의 동호인 축구팀 간의 경기를 주선하는 것이다.
선수들을 직접 만나고 축구까지 함께 하는 것은 어린이들은 물론이고 성인들에게도 잊을 수 없는 경험이며, 한 팀을 사랑하는 데 충분한 조건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이벤트는 지역 주민들로 하여금 연고구단을 '우리 팀'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축구 산업 관련 종사자들은 이러한 축구의 기본 바탕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하여 연고의식 형성에 대해서도 다른 스포츠와는 달리 깊은 성찰과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만이 쓸쓸한 분위기의 관중석을 채울 수 있고, 축구단에 대한 지역 주민들의 관심을 얻을 수 있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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