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최종편집일 2024-11-23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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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인시대] '아마야구 괴물타자'였던 그, 추성건을 만나다

기사입력 2009.02.06 15:26 / 기사수정 2009.02.06 15:26

유진 기자



▲ 서울고교 야구부 선수들과 추성건 코치

[엑스포츠뉴스=유진 기자] “자세가 어정쩡하잖아!”, “집중하란 말이야!”, “좋아 좋아!”, “각 포지션 위치로!”

일찌감치 학생들이 하교를 마친 서울고등학교 교정은 매우 조용했다. 그러나 ‘고요속의 외침’이라는 말은 이를 두고 한 말일까. 유난히 넓디 넓은 운동장에서만큼은 ‘따악’ 하고 배트로 공을 치는 소리와 ‘파이팅’을 외치며 선수들을 독려하는 목소리가 가득했다. 그리고 배트 박스에는 예사롭지 않은 모습으로 제자들에게 직접 펑고(fungo)를 쳐 주는 코치가 있었다. 싫은 내색 없이 다양한 방향으로 타구를 보내는 그 사람 - 한때 아마추어 괴물타자로 불렸던 그 – 바로 추성건이었다.

어지간한 야구팬들이라면 추성건이라는 이름 석자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특히, 대학야구의 간판타자로서 주요 신문사 야구기사 타이틀에 추성건의 이름을 직접 본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비록 프로무대에서는 제 실력을 뽐내지 못했지만, 야구천재들만이 모여 있는 89학번 타자들 중에서 그는 단연 돋보였다. 또한 건국대학교 4학년 시절, 톱 타자 이종범(KIA 타이거즈)과 콤비를 이룬 추성건은 1992년 대학야구에서 모교에 유일한 2관왕을 안기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안타까운 선수’라는 말을 많이 한다. 실제로 그는 야구 재능에 비해 프로무대에서 자신의 역량을 크게 펴지 못했다. 아까운 선수였음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절대 ‘실패한 선수’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고교야구에서 우수한 지도력을 겸비한 코치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2002년 프로무대 은퇴 이후 모교로 돌아간 그를 서울고등학교 교정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첫 만남, 그리고 현역시절 이야기

Q : 우선 해외(중국) 전지훈련 다녀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추성건 선수를 잊지 못하는 팬 여러분들께 한 말씀 해 주신다면요?

추성건(이하 ‘추’로 표기) : (웃음) 2002년 은퇴 이후 잊혀진 사람인데, 기억해 주시는 분들이 많다니 참으로 감사할 뿐입니다.

Q : 옛날 이야기를 좀 해 보겠습니다. 1992년도에 건국대학교는 대학야구에서 유일한 전국대회 2관왕을 차지했습니다. 그때 상황을 이야기 해 주십시오.

추 : 제가 대학교 3학년 때부터 팀의 주장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4학년이었던 1992년 전반기에 팀 성적이 너무 좋지 않아서 주장으로서의 책임감이 상당히 컸죠. 그런데 당시 전국대회 첫 우승의 순간이 너무 감격적이었습니다. 그때 고비가 준준결승 이었는데, 상대는 신재웅(現 공주중학교 감독) 선수가 버티고 있던 경성대학교였습니다. 당연히 신재웅 선수가 선발로 나섰죠. 그런데 팀이 9회말 투 아웃까지 1:9로 지고 있었습니다. 아웃카운트 하나만을 남겨놓은 상황에서 주자도 없었는데, 우리(건국대)가 10:9로 역전을 했지요(웃음). 준준결승에서 힘겨운 시합을 이기고 나니, 준결승은 비교적 쉽게 가져갔습니다.

그런데 결승전은 조금 어려웠지요. 당시 고려대학교를 만났는데, 연장까지 가는 접전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우승트로피는 결국 우리 몫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우승을 했던 대회에서는 연세대학교와 결승전에서 맞붙었습니다. 경기 양상은 팽팽했지만, 9회말에 제가 결승 홈런을 기록함으로써 끝이 났었습니다(웃음).

무엇보다 당시 건국대학교 야수 구성이 상당히 좋았습니다. 이종범을 비롯하여 송태일(은퇴), 이영우(한화 이글스), 장재중(은퇴) 등 호화 멤버들이 자리잡고 있었기에 건국대학교가 승승장구를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Q : 당시 추성건 선수를 포함한 89학번에는 천재 선수들이 많았는데, 특별히 상대하기 까다로웠던 선수가 있었다면요?

추 : 김경환을 포함하여 구대성, 이상훈 등 대학무대에서 돋보적인 투수들이 많았고, 대학졸업 이후 상무에서 실력이 일취월장한 마해영 선수도 있었죠. 그러나 솔직히 그때 당시에는 특별히 상대하기 어려운 선수가 없었습니다(웃음). 그 만큼 타석에 들어서면 자신이 있었지요.

Q : 결국 그러한 자신감이 대학무대를 평정할 수 있었던 비결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결국 대학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1993년 신인 1차 지명에서 OB 베이스(現 두산 베어스)가 추성건 선수를 뽑았어요.

추 : 솔직히 저는 1차 지명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팀에 합류한 이후 1993년과 1994년은 프로에 적응하는 단계였지요. 2년간의 적응을 마친 후에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1995 시즌 시범경기에서 제가 홈런왕과 타점왕을 차지했죠. 그런데 개막전에서 손목을 다쳐버렸습니다. 결국 재활에 매달려야 했고, 노력 끝에 7월에 다시 그라운드에 설 수 있었습니다. 복귀 첫 경기가 광주 원정경기였는데, 첫 타석에서 홈런을 기록하는 등 페이스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홈런 친 이후가 문제였습니다. 이번엔 발목 부상을 당했습니다. 결국 다시 2년간의 재활과정을 거쳐야 했죠. 공교롭게도 그날 광주 원정경기가 김성한 감독(前 KIA 타이거즈)님의 은퇴경기였습니다(웃음).

그런데 팀은 1995년도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그때 저도 현장에 있기는 있었는데, 발목에 깁스를 하고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서 경기를 봤지요(웃음).

Q : 이후 SK 와이번스로 이적하셨어요.

추 : 그렇습니다. 그런데 1997년에 다시 그라운드에 복귀를 했는데, 그것 참… 적응이 잘 안 되더군요. 더군다나 당시 팀에 우즈가 투입된 이후부터는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1999년에 신생팀 SK로 유니폼을 바꿔 입었죠.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OB 베어스에서 저로 인하여 상당히 마음이 아팠을 겁니다. 하지만 인간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선수들을 가르치지만, 그때 인연들이 아직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기록적인 사항보다는 사회적인 유대관계가 중요함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Q : SK 와이번스에서는 그래도 나름대로 좋은 활약을 펼치셨는데, 두 구단(두산과 SK) 각각의 특징이 있다면요?

추 : OB 베어스는 전통적으로 체계가 잡혀 있는 팀이었어요. 반면 SK 와이번스는 당시 신생팀이다 보니 처음 1~2년간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죠. 그런데 생각보다 빠른 시간 내에 프로무대에 자리를 잘 잡은 것 같습니다. 제가 SK에서도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 지금까지 지인으로 지내는 것을 보면 복이 많은 것 같습니다.

SK에서는 3루수로 보직을 변경하기도 했죠. 그리고 나름대로 성과도 있었습니다. 잘 했지만, 2000년 이후 다시 출전 기회를 잡지 못한 것은 모두 제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출전 기회를 잡지 못하다 보니 혈압으로 쓰러질 때도 있었거든요(웃음).

Q : 2002년에 서른 둘이라는 젊은 나이에 은퇴를 선언하셨는데, 많은 이들이 참으로 안타까워 했어요.

추 : 결국 부상이 가장 크지 않았나 싶어요. 제가 대학에서부터 프로 입문까지 아파 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아프면 세상이 바뀝니다(웃음). 일부에서는 김형석, 김종석 등 기라성 같은 선배들의 존재가 출전 기회를 막은 것 아니냐는 이야기들을 많이 하셨는데, 절대 그렇지는 않습니다. 김인식 감독(한화 이글스)님께서도 저에게 기회를 많이 주셨으니까요. 다친 것이 가장 컸습니다.

제가 SK에서 방출되고 나니까, 김성근 감독(당시 LG 트윈스)님께서 2002 시즌을 앞두고 같이 뛰어보자고 제안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는 정말로 그라운드에서 직접 야구하기가 싫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모교인 서울고교로 왔습니다.



▲ 제자들에게 직접 펑고(fungo)를 쳐 주는 추성건 코치

모교 야구부 코치시절과 중국리그 진출

Q : 모교인 서울고교로 돌아오신 계기가 있으시다면요?

추 : 그 전부터 와 달라는 연락은 꾸준히 받았습니다. 당시 코치셨던 백기성 감독님께서 “같이하자”고 제안하셔서 두말 없이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제가 1988년에 모교 야구부 주장을 맡았기 때문인지 모교에 대한 애착도 컸습니다. 일단 서울고교 야구부는 선배님들의 지원이 풍부하기 때문에 그에 의지하는 바가 큽니다.

Q : 이후 잠시 중국야구를 경험하셨죠? 그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듣기로는 중국에서 내야수로도 뛰셨다는데?

추 : (고개를 가로 저으며) 아닙니다. 제가 선수 생활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북경에 ‘희망팀’이라는 야구단이 있었는데, 이 팀에 이용호와 이준, 두 선수가 나란히 선수로 뛰었을 뿐입니다. 저는 (광동 레오파스) 기술 감독직을 맡았죠. 그런데 제가 가르친 선수 중 중국 야구 국가대표를 네 명이나 배출했습니다. 천쥔이, 리유카이, 지아더롱, 쟝홍보(이상 광동 레오파스) 등 네 선수가 제 손으로 키워 낸 제자들입니다(웃음). 그래서 중국 야구협회장도 저를 인정해주었죠.

이 때의 인연을 바탕으로 서울고교 해외 전지훈련을 중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물론 중국 프로리그의 인프라는 여전히 열악합니다. 그러나 중국 야구협회가 중/장기적인 목표를 세워놓았기 때문에 장차 많이 발전할 것으로 보입니다. 또, 중국 6개 프로구단이 모두 일본 프로팀과 자매결연을 맺고 우수한 선수를 일본으로 연수시키거나 일본 코치들이 중국으로 지원을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미즈노가 프로리그를 후원하고 있으니, 중국리그의 앞날이 밝은 것만은 틀림 없습니다.

Q : 중국리그 경험 이후 다시 모교로 돌아오셨습니다. 복귀 이후 많은 대회에 출전하셨는데, 일단 저는 2007년 대통령배 대회에서 이형종(現 LG 트윈스) 선수가 역투한 경기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추 : 그것 참… 너무 아쉬운 경기였습니다. 2007년도에는 저희가 전국체전에서 우승할 만큼 전력이 탄탄했거든요. 팀 타율이 4할에 이를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전국 각지의 강호들을 왠만하면 콜드게임으로 끝냈죠(경남고교, 신일고교 등).

그런데 (이)형종이보다 정찬헌(現 LG 트윈스)이 먼저 마운드에서 강판됐어요. 마운드에서 물러나 1루수로 교체됐는데, 제가 1루에 (베이스 코치로) 나가있다 보니까 선수들 면면이 다 보이잖아요. 그때 (정)찬헌이가 표정 변화 없이 눈물을 주르륵 흘리더군요. (이)형종이보다 (정)찬헌이가 먼저 울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표정 변화 없는 정찬헌 선수를 보고 나니 ‘이 친구, 참 괴물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두 선수 모두 프로 입단 첫 해에는 제 모습을 찾지 못했죠. 제 생각에 아마야구에서 명성을 날린 투수라 해도 1~2년간은 프로무대에서 고생해야 제 모습을 찾는다고 생각합니다. 야수의 경우는 3~4년이 필요하죠. 변화에 대한 적응이 필요합니다.

Q : 이번엔 조금 원론적인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현장에서 느끼는 학원스포츠의 애로사항이 있으시다면요?

추 : 고교야구장은 전쟁터입니다. 왜냐? 고교야구에서 3학년이 되면 세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프로입단, 대학진학, 야구포기가 그러한데, 일단 프로에 지명될 확률이 가장 낮고, 대학에 진학하거나 야구를 포기하는 비율이 50:50 정도로 비슷합니다.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오전 4교시 수업을 의무적으로 듣고 오후부터 연습하는 구조는 고등학교가 아닌 유소년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야구밖에 모르는 아이들에게 성적이나 진학 등 선택권의 폭을 넓혀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은 코치들이나 감독님이 이러한 지도를 해야 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선수들이 잘 따라주는 것이 그저 고마울 뿐입니다.

저는 솔직히 야구를 늦게 시작했어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했으니까요. 그런데 믿으실지 모르시겠지만, 저는 중학교 때 까지만 해도 전교에서 1~2등을 다투는 수재였습니다(웃음). 학력고사 시절에 186점(200점 만점)을 맞았는데, 그때 코치님들이 “얘 누구냐?”라고 말씀하시면서 깜짝 놀라셨죠. 그런데 제가 ‘야구라는 것이 이것이다’ 라고 느꼈던 시기가 나이 서른때였습니다. 만약에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다면, 야구를 깨우치는 시간이 빠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봤습니다.

Q : ‘나의 모교 서울고교’, 전국대회 우승을 자신하는 요인이 있다면요?

추 : 팀워크가 상당히 좋습니다. 일단 첫 대회인 황금사자기 4강 안에 들기만 하면 우승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최근에 우승한 대회가 2007년 전국체전인데, 이번만큼은 고교 3대 야구선수권에서 우승을 한 번 해 보고 싶습니다. 모교 우승이 최 우선 과제죠.

Q : 마지막으로 후배 야구선수들에게 한 말씀 해 주십시오.

추 : 요즘 선수들이 덩치는 큰데, 정신력은 예전만 못한 것 같습니다. 특히, ‘목표의식’을 갖고 있는 선수가 드뭅니다. 또한, ‘안 되면 부모가 해 주겠지’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선수들이 적지 않은 것도 문제입니다. 예전보다는 젊은 선수들이 많이 약해진 것 같아 참 안타깝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전하고 밝은 모습으로 야구하는 것은 칭찬해 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세계 청소년 야구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는 것을 보면 열악한 인프라에 비해 참으로 야구 잘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견이지만, 이는 전 세계 지도자들보다 우리나라 지도자들이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야구를 잘 가르치기 때문이라 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날씨 추운데도 불구하고, 눈 오는데도 불구하고 야구하는 나라는 전 세계에 우리나라뿐입니다. 이런 것을 감수하고 야구를 가르치는 일선 지도자들의 고생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젊은 선수들과 후배들이 이러한 점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 부천 고등학교와 연습 경기를 앞두고 진지하게 배팅 연습에 임하는 서울고교 선수들

[정리=엑스포츠뉴스 유진 기자]

※ 추성건은 누구?

90년대 초반, 아마야구 괴물타자로 군림했던 대형 1루수였다. 서울고등학교를 거쳐 건국대학교에 입학한 그는 ‘천재들의 집합’인 89학번 타자들 가운데서 단연 으뜸이었다. 당시 89학번으로는 투수 이상훈이 가장 돋보적인 존재였으며, 이종범, 마해영, 구대성, 김홍집, 손차훈, 김경환 등이 건제했다.

마해영은 프로 입문 이후 260 홈런을 기록하는 등 프로무대에서 승승장구했지만, 적어도 아마시절에는 추성건이 단연 ‘낭중지추’였다. 특히, 건국대학교 시절 동료 이종범과 짝을 이뤄 일궈낸 1992년 대학 야구 선수권대회 2관왕은 그의 진가를 확인시켜 주기에 충분했다.

이에 추성건은 1993년 신인 우선 지명에서 OB 베어스에 지명되는 영광을 안았다. 당시 대학 최대어인 이상훈의 LG 트윈스행이 결정되자, OB 베어스는 2순위인 추성건을 두말없이 데려갔다.

그러나 추성건은 프로무대 데뷔 이후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손목과 팔목 부상으로 인하여 아마시절 괴물타자로써의 위용을 뽐내기 어려웠던 추성건은 1999 시즌을 끝으로 SK 와이번스로 이적했다. 그러나 이것이 전화위복이 됐다. 이적 첫 해인 2000년, 생애 첫 3할 타율을 기록하며 서서히 살아났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2001 시즌에 23경기 출전에 그쳤던 그는 2002년 시즌을 앞두고 은퇴를 선언하며, 모교인 서울고교의 부름을 받았다.

서울고교 코치를 시작으로 다시 그라운드에 복귀한 추성건은 한때 중국에서 지도자 생활을했다. 광동 레오파스에서 그의 지도를 받은 네 선수가 올림픽 국가대표에 선임될 만큼 ‘지도력’에 있어서 큰 점수를 받았다. 이후 다시 국내로 돌아 온 추성건 코치는 현재까지 모교인 서울고등학교에서 후배들을 가르치며, 후학 양성에 힘을 쓰고 있다.



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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