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8.12.30 15:13 / 기사수정 2008.12.30 15:13
[엑스포츠뉴스=유진 기자] 인간이기에 누릴 수 있는 특권 중 하나가 바로 ‘말’을 할 줄 아는 것이다. 그래서 말 한 마디에 천냥 빚도 갚는다는 옛말도 있다. 이는 말 한 마디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이야기로 귀결될 수 있다.
특히, 선수들의 독려를 위한 말 한 마디는 큰 영향을 미친다. 선수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 감독과 감독 사이에 오가는 설전들은 스포츠를 보는 또 하나의 재미이기도 하다. 2008년 야구판에도 수많은 말들이 오갔다. 그 중 가장 인상깊었던 말들은 무엇일까? 입과 입을 통해 이야기된 많은 말들 중 10가지를 추려봄과 동시에 2008년 야구계를 돌아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1. “떨어질 팀은 결국 떨어진다” - 김재박 LG 감독
LG트윈스는 시작부터 좋지 않았다. “야구는 투수놀음”이라는 법칙에 따라 외국인 선수 둘을 모두 투수로 채운 것까지는 좋았으나, 물방망이 타선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물방망이보다 그렇게 자신있어하던 마운드에서 먼저 탈이 났다. 박명환은 시즌 초에 가장 먼저 선발마운드에 이탈하였으며, 회심차게 영입한 제이미 브라운도 결국 퇴출이라는 직격탄을 맞았다. 이때부터 투 - 타 동반부진이 일어나더니, 시즌 초부터 하위권을 전전하게 된다. 이에 김재박 감독은 시즌 초 부진한 성적에 대해 “떨어질 팀은 결국 떨어진다”는 말로 답했다. 그러나 어쩌랴. 올 시즌 떨어진 팀은 LG 단 한 팀에 불과했다. 시즌 유일한 80패 팀으로써 창단 후 두 번째 8위를 마크했다.
2. “한국에 경계해야 할 선수는 특별히 없다. 다만 선발 멤버를 바꾸지 않았으면 좋겠다” - 호시노 센이치 前 일본 국가대표팀 감독
흔히 ‘위장오더’ 사건으로 화자가 된 호시노 前 일본대표팀 감독의 발언이다. 일본이 적지 않은 시간을 투자하며, 틈틈이 올림픽을 준비했다고는 하지만, ‘위장오더’에 대한 발언은 야구 선진국이라 자부하는 일본대표팀 감독으로써 해서는 안될 말이었다. 심지어는 일본에서조차 당시 ‘위장 오더’발언에 대해 ‘유치원 수준’이라는 평을 낸 곳도 있었다. 그러나 ‘위장오더’에 대한 발언보다 ‘한국에 경계해야 할 선수는 없다’라는 말이 우리나라 선수들의 승부욕을 자극한 것 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김경문 대표팀 감독은 이보다 한 수 위였다. 그는 “강팀이면 강팀다운 여유를 보여야 한다. 야구는 말이 필요 없다. 자꾸 입씨름하게 하는데, 그라운드에서 실력을 견주기만 하면 그만이다”라고 맞받아쳤다.
3. “9전 전승으로 우승할 자신이 있습니다.” - 이승엽 대표팀 4번 타자
우리나라는 상대적으로 일본에 비해 국가대표팀 구성이나 준비기간이 짧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엽 등 노장 선수들의 참여가 큰 힘이 되기도 했다. 이에 이승엽은 “소속팀에서의 부진을 이번 올림픽에서 만회하고 싶다”고 말한 이후, “9전 전승으로 우승할 자신이 있다. 지켜봐 달라”는 약속까지 잊지 않았다. 이는 호시노 감독의 위장오더 발언이 나온 직후라서 그 말만으로도 듣는 사람들의 기분이 좋아질 정도였다. 실제로 대표팀은 9번의 경기를 모두 승리로 이끌면서 남자 구기종목 역사상 첫 금메달을 조국에 안겼다.
▲ 국가대표 야구선수들은 말 뿐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9전 전승을 차지하는 데에 일조했다.
4. “독도를 넘어 대마도까지 갔네요. 일본은 다께시마라고 우기는데”, “고마워요 사토!” - 허구연 해설위원
국민감독, 국민타자, 국민투수에 이어 ‘국민 해설위원’까지 등장했다. 그 주인공은 감칠 맛 나는 해설로 전 국민들의 호응을 얻었던 허구연 해설위원이다. 허구연씨는 베이징 올림픽 야구 준결승에서 “대쓰요!(됐어요!)”, “아~~앗!!” 등 잠시 해설위원으로써의 본분을 잊고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이것이 오히려 그를 국민 해설위원으로 발돋움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특히, 야구 준결승은 일본 정계에서 독도문제로 우리나라를 자극하면서 예민한 신경전이 오가는 가운데 진행되었기에 허구연 해설위원의 ‘대마도’ 표현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시원하게까지 만드는 역할도 했다. 공교롭게도 이승엽의 역전 투런홈런은 일본 관중석 내에 일장기가 걸려 있는 의자에 떨어져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남기는 듯 했다. 이후 일본대표팀은 G.G.사토의 실책 등이 연결되며 자멸했다. 이 때에도 허구연 해설위원은 “고맙다”는 표현을 서슴치 않으며, 일본대표팀이 들으면 약이 오를 만한 감칠 맛 나는 해설을 계속했다.
5. “기가막힌 순간에 퇴장명령이 났다.” - 하일성 KBO 사무총장
야구 결승전. 대표팀은 9회말 쿠바의 마지막 공격을 잘 막으면 우승이었다. 그런데 푸에르토리고 심판이 쿠바를 편들기라도 하듯 1사 2루에서 두 타자에게 모두 볼넷을 허용하게끔 만들며 대표팀을 곤란하게 했다. 이에 강민호 포수는 “low ball?(볼이 낮았나?)”라고 가볍게 항의를 했지만, 주심은 바로 퇴장을 선언했다. ‘볼이 아니다(no ball)'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에 김경문 감독이 공식 항의를 했지만, 퇴장 명령은 정정되지 않았다. 이를 두고 하일성 사무총장은 “선발 류현진이 한계에 왔기 때문에 끝까지 밀고 가기 어려웠다. 교체를 해 주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특히, 첫 타자 볼넷때 이미 교체를 했어야 했는데, 그 타이밍을 놓친 것이 실수였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강민호의 퇴장이 나왔고, 정대현으료 교체되어 경기가 끝이 났다. 정말로 기가막힌 순간에 퇴장명령이 났고, 이 때문에 쿠바쪽으로 갈 뻔했던 경기 흐름이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왔다”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 국가대표팀은 ‘아시아’를 넘어 세계까지 재패했다.
6. “김현수 시프트가 뭐예요? 그냥 외야로 보내면 되지 않나요?” - 김현수(두산)
올림픽의 여운은 곧 프로야구 포스트시즌까지 연결됐다. 플레이오프에서 만난 두 팀은 삼성과 두산이었는데, 롯데를 3연승으로 가볍게 이겼던 삼성의 기세는 대단했다. 비록 1차전은 두산에 패했지만, 2, 3차전은 일명 ‘김현수 시프트’가 성공을 거두며 삼성의 2연승으로 이어졌다. 이에 김현수는 인터뷰에서 “그런게(김현수 시프트라는 것이) 있었어요? 그럼 간단하네요. (박)진만이 형 머리 위로 넘기면 되는 것 아니예요?”라고 맞받아치는 여유로움을 보였다. 실제로 김현수는 4, 5, 6차전에서 박진만의 머리 위로 날아가는 외야 안타를 많이 침으로써 ‘김현수 시프트’를 스스로 무색하게 만들기도 했다.
7. “2008시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딱 이틀 뿐이었다.” - 이승엽(요미우리)
올림픽 직후 소속팀에 합류한 이승엽은 주니치와의 리그 챔피언쉽에서 연타석 홈런을 기록하는 등 식지 않은 방망이 실력을 선보였다. 그러나 정작 중요했던 제펜시리즈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임과 동시에 팀도 제펜시리즈를 정복하지 못하자 그는 2008 시즌을 정리하는 인터뷰에서 “2008 시즌은 최악이었다. 내 스스로에 만족을 하지 못했다. 그나마 행복했던 순간은 딱 이틀 뿐이었다. 올림픽 준결승때와 결승때가 그랬다.”라며 자조가 섞인 평을 남겼다. 결국 그는 2009 WBC 불참을 선언하며, 내년 시즌 부활을 위한 담금질에 들어갔다. 그는 여전히 “부상당한 손가락이 여전히 완전하지 않다”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체력단련에 들어갔다”며 최근의 근황을 전했다.
8. “어쩌다 또 나한테까지 오게 됐어? - 김인식 WBC 국가대표팀 감독
한국시리즈 우승팀이 SK로 결정나자 KBO는 미뤄두었던 WBC 국가대표팀 감독 인선에 들어갔다. 먼저 우승팀 감독인 김성근씨에게 감독을 요청하고자 했으나 그는 “건강상의 이유로 감독직을 수행하기 어렵다”며 난색을 표했다. 김경문 감독 또한 “올림픽 예선과 결선 등으로 너무 힘든 시간을 보냈다. 이제는 소속팀을 수습하며 쉬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이에 KBO는 김인식 한화감독을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추대한다는 ‘언론발표’를 먼저 내보냈다. 김인식 감독은 당황해 하면서 “아니, 어쩌다 나한테까지 오게 된거야? 1, 2위팀 감독들이 해야지. 그것도 안 되면 선동열 감독(삼성)도 있잖아? 그것 참.... KBO도 문제야. 아니 언론발표를 먼저 하고 감독직 수락을 요청하는 경우가 또 어디 있어?” 라고 말하며 쓴웃음을 짓기도 했다.
9. “형, 나좀 도와줘.” - 하일성 KBO 사무총장
WBC 감독직이 발표된 이후 김인식 감독은 바로 김성근 SK감독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통화에서 김인식 감독은 “형, 나도 뇌졸중수술을 해서 몸이 온전치 않은데 형이 건강문제를 얘기해야겠어? 나도 이제 예순이 넘었어!”라고 말하며, 자신에게 다시 한 번 독이 든 성배를 떠넘긴 김성근 감독에 푸념을 놓았다고 한다. 이에 김성근 감독은 “그래도 국가대표팀 감독은 나보다는 네가 더 나아. 대신 필요한 선수들은 다 내어 줄게”라고 답했다. 하일성 KBO 사무총장이 김인식 감독을 만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안 가서였다. 하 총장은 김 감독과의 대면에서 맥주컵에 소주를 부어마시며 “형, 나좀 도와주라. 이미 (한화)구단하고는 얘기가 끝났어. 형만 좋다면 대표팀 감독 맡아도 된데. 형 아니면 맡을 사람이 없어!”라며 매달렸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본 김 감독은 “허 참! 언론에까지 공표해 놓고 내가 안 한다고 하면 모양새가 좋지 않으니 안 맡을 수도 없고... 그것 참! 알았어!” 라며 기어이 승낙을 받아냈다고 한다. 김 감독은 이 때의 일을 회상하며 “뇌종줄 수술까지 받아서 건강도 안 좋은 하 총장이 맥주 글라스로 소주먹는 것 보고 놀랐어. 다들 안 한다고 하니, 어쩌겠어. 그런데 국제무대에서 나 같은 늙은이가 발 절룩거리면서 기자회견장에 나가는 것도 보기 안 좋잖아? 한국이라는 나라를 어떻게 보겠어?” 라며 대인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10. “그냥 공개해” - 김응룡 삼성 사장
KBO 총재 선임 문제를 두고 야구계와 문화체육관광부의 줄다리기가 이어졌을 때 쯤, 유영구 KBO 총재 내정자가 갑자기 총재 사퇴 의사를 밝혔다. 이유는 정부와 입씨름을 해 가면서까지 총재직을 맡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에 씁쓸한 마음을 안고 시작한 사장단 이사회는 무거운 분위기에서 시작했으며, 김응룡 삼성 사장은 “우리보다 외부에서 사정을 더 잘 알고 있더구먼. 회의내용을 비공개로 할 필요가 있어? 그냥 공개하지 뭔 난리아” 라며 거침없이 가시돋힌 말을 했다. 결국 총재 선임 문제는 해를 넘기는 것으로 결론났다. 500만 관중과 올림픽 금메달 등 경사로운 일만 가득했던 야구계의 끝은 씁쓸한 결말을 맺은 채 2009년을 맞게 되었다.
[사진=올림픽 대표팀(C) 두산 베어스 홈페이지 제공, SK관중석(C) 강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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