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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 인터뷰] 곽경근 감독, ’부천 전성기’를 이끈 공격수 ②

기사입력 2007.06.05 20:16 / 기사수정 2007.06.05 20:16

이상규 기자

엑스포츠뉴스에서는 2회에 걸쳐 지난날 파란만장했던 '곽경근 선수'의 이야기와 앞으로는 지도자로서 축구와 함께할 '감독 곽경근'의 이야기를 [예.스(예비스타. Yes) 인터뷰]를 통해 연재하고 있다.



[엑스포츠뉴스=이상규, 이우람 기자]

나는 부천을 대표하는 공격수

곽경근 감독이 전성기를 보낸 부천은 90년대 후반 수원, 부산과 더불어 많은 축구팬의 인기를 받은 구단이다. 특히 당시 부천 서포터즈 헤르메스는 K리그에서 가장 열정적인 응원을 펼쳐 선수들에게 큰 힘을 실어줬다.

"1:0으로 지고 있을 대 팬들의 응원 덕에 이긴 경우가 많았다. 팬들이 응원을 열심히 해주면 우리도 더욱 열심히 뛰게 된다. 선수들도 부천 응원을 좋아했고 열광하고 그랬다. 경기 끝나고 이기면 랄랄라송 할 때 가장 좋았다. 내 콜도 있었는데(기억을 더듬으며…)  지금은 까먹었다" (웃음) 비록, 팬들이 만들어준 응원가를 잊어버린 곽 감독이었지만, 그는 정말 팬들과 함께했던 그 순간을 그리워했다.

부천은 '니폼니시-조윤환 감독'으로 이어지는 패스 위주의 아기자기한 축구로 팬들의 높은 호응을 받았다 그런 부천을 상대로 1995년 후발 주자로 출발한 수원 삼성이 김호 감독의 4-4-2 축구를 앞세워 자연스레 라이벌로 등장했다. 두 팀은 1999년에는 정말 주옥같은 명승부를 매번 펼치며 K리그의 제1의 르네상스를 빛냈다. 그렇다면, 곽 감독은 수원과의 라이벌 관계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부천 선수들도 수원과의 라이벌 의식이 있었다. 1999년에 서로 1~2위를 다투다 보니, 항상 빅 매치가 되곤 했다. 나는 부천이 우승했던 2000년 대한화재컵에서 1골도 못 넣어 부끄러워하고 있던차, 정규리그 개막전 수원전에서 골을 넣어 다시 고개를 들 수 있었다. 그 경기에서는 부천이 5:1로 이겼다."

당시 곽 감독은 1999년과 2000년에 각각 13골 8도움, 9골 4도움을 넣어 부천 공격진을 빛내며  올스타까지 뽑혔다. K리그 정상급 공격수 반열에 오르면서 꾸준히 팬들의 사랑을 받으며 전성기 시절을 보낸 기분은 정말 어땠을까?

"그때는 정말 기뻤다. 성적 올리기가 쉽지 않았는데 굉장히 좋았다. 1999년도 성적이 정말 최고였다. 부천은 그 당시 조직력과 팀 워크가 정말 대단했던 팀이다. 다만, 구단 대우가 아쉬웠고 동기유발이라든가 보너스가 없어서 아쉬웠다."

부천 시절 에피소드도 듣고 싶었다. 부천에서 친했던 선수는 누구였을까? "(이)을용, (윤)정춘이랑 잘 지냈다. 그리고 김기동과 윤정환도 나랑 친구였는데 호흡이 가장 좋았던 선수였다. 선배와 후배의 격이 없을 정도로 서로 잘 뭉쳤다. 그래도 그 중 특별히 의논을 가장 많이 한 사람은 오랜 벗이었던 이임생(수원 코치) 이었다."

"지금 포항에 있는 김기동은 부천 시절부터 착실했고 몸조리를 잘했다. 항상 성실한 게 좋았다. (김기동은 얼마 전 K리그 통산 400경기 출전 기록을 세웠다. 필드 플레이어로는 역대 최다 출전기록이다.) 그리고 조윤환 감독님 시절부터 골키퍼를 맡은 이용발이 그라운드에서 많이 튀었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정보는 그게 실은 조윤환 감독님이 팬들을 위해 직접 시킨 것이다. 때문에 용발이도 처음에는 고깔 콘을 써보기도 하고, 고민하더라…."

곽 감독은 '크라머-니폼니시-트루판-포터필드'로 통하는 외국인 감독과의 인연이 유독 남달랐다. 흥미롭게도 그는 질문 도중 터키 출신 트나즈 트루판  감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하자 고개를 흔들었다. 부천은 2002년 한일월드컵 이후 트루판 감독을 영입한 이후부터 성적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트루판 감독은 정말 별로였다. 터키에서 하재훈 당시 스카우트님이 빵집에 갔는데 거기서 트루판 감독을 처음 봤다. 그게 인연이 된 것이다. 트루판 감독이 올림픽대표팀 감독을 맡았다고 들었는데 그런 것 같지 않다. 가르친 것도 없고 훈련 나오면 바로 들어가는 편이었다. 그래서 선수단에서도 반발이 심했었다."

여기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현재 세뇰 귀네슈 FC서울 감독의 한국어 통역을 맡고 있는 터키 국적의 시난 오즈투르크씨는 트루판 감독 시절에 부천 외국인 선수 테스트를 받은 적이 있었다는 거다. 곽 감독은 부천에서 테스트를 받은 시난 통역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시난 씨는 부천의 외국인 선수 테스트를 받던 당시에 터키 대표 출신 미드필더였다. 그때가 서울대 학생 시절이었는데 사람이 좋고 사교성까지 좋았다. 무엇보다 한국말을 잘했다. 팀에 1~2달 있었지만 결국 테스트에서 떨어졌다."

정든 부천을 떠나, 수비수로 변신하다

'잘 나가던' 곽 감독은 2001년 2골 6도움, 2002년 3골로 주춤하기 시작했다. 2000년 오른쪽 발목, 왼쪽 아킬레스건 부상 여파가 부진의 영향을 가져다준 것일까? 하지만, 곽 감독은 당시 부진이 부상 때문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부상보다는 실적이었다. 실적 때문에 언제부터인지 잘해야 한다는 부담이 다가왔다. 그래서 찬스가 와도 잘 안되었다. 어시스트는 계속 되는데 감독님은 골 넣은 찬스를 이렇게 하라는 식으로 조언했다. 하지만, 너무 골을 못 넣다 보니까 페널티킥은 나보고 차라고 했을 정도다. 그거라도 넣으면 괜찮아질까 했는데…."

결국, 곽 감독은 지난 2003년에 자유계약 선수(FA)로 풀려 부산으로 이적했고, 또 시즌 후반부터는  수비수로 포지션을 옮기는 것을 선택했다. 공격수 출신 김주성, 박건하에 이어 수비수 전환을 한 것이다. 

만족할만한 결과도 나왔다. 비록 부산에서 보낸 2시즌 동안 골을 넣지 못했지만 각각 27경기, 30경기에 출전하여 꾸준히 그라운드에 모습을 내밀며 제2의 선수 생활을 성공리에 보낼 수 있었다.

"수비수로 포지션을 옮긴 것은 사실 내가 하고 싶다고 했다. 골에 대한 부담감이 있어서 부담 없는 수비수로 옮겼다. 나이가 있다 보니 힘들어서 바꾸려고 했는데, 이안 포터필드 감독님께서 받아주셨다. 결과도 좋았다. 팀의 실점도 줄여 수비수로 잘 옮겼다고 생각한다. 주로 윤희준 선수와 호흡을 맞추었고 배효성이 백업 선수였다. 당시 주장이었던 윤희준 선수는 힘이 좋은 선수였고 선수들을 잘 이끌고 좋은 말을 많이 하는 편이었다."

성공적인 수비수 전환 비결이라도 있었을까?  "올림픽대표팀에서 수비수를 맡기도 했다. 고려대 시절 무조건 연세대와 정기전을 하면 감독님이 꼭 수비수를 시켰다. 정기전에서 지면 안되니까 무조건 수비만 하고 4학년 때만 공격수를 맡았다."

2004년부터 출전한 수비수 자리에는 공격수로서 경험하지 못했던 색다른 묘미가 있었을 것이다. 포지션을 수비수로 옮기면서 장점과 단점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 곽 감독은 "장점은 헤딩에 자신 있었다. 수비수로서 상대팀 공격수가 어떻게 하는지 알게 되니까 그 자리가 편했다. 단점은 공격수에서 수비수로 바뀌니까 대인마크가 힘들었다."

"특별히 마크하기 힘들었던 공격수는 광주에서 뛰던 이동국이었다. 한때는 내가 마크를 놓쳐서 이동국에게 골을 내줬다. 이동국은 수비수가 싫어하는 타입의 공격수다. 더 마크하기 싫은 건 전북에서 뛰던 마그노였다. 마그노를 대할 때마다 겁이 났다. 우리가 3:0으로 이기다가 마그노가 잘하니까 4:4로 비겼다. (2003년 11월 9일 경기. 마그노는 이 경기에서 2골을 넣었다.) 포터필드 감독이 원래 화는 안 내는데 경기 끝나고 화내더라. 그때 이후로 포터필드 감독이 무서웠다."

2005년 부산의 전기리그 우승을 이끈 스코틀랜드 출신 이안 포터필드 감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포터필드 감독은 아버지 같은 스타일이다. 진짜 유럽 스타일이 강하다. 수비수에서 공격으로 전환할 때의 스타일이 돋보였다."

아쉬운 은퇴 결심

곽 감독은 성공적으로 수비수로 지낸 2년간의 활동을 마지막으로 현역으로서 은퇴를 결심한다. 왜 그는 다소 이른 나이에 조용히 팀을 떠나 은퇴를 결심했을까? 그는 직감적으로 자신의 한계를 느꼈다고 말한다.

 "부산과의 2년 계약을 마치고, 이대로 선수 생활을 마쳐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팀에도 갈 수 있었지만…사실 은퇴식 못한 것은 아쉽긴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부산에서 골을 넣지 못한 게 의외로(?) 아쉬웠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팀이었던 부산의 관중 감소를 아쉬워했다. "구덕 경기장에서 할 때는 관중이 꽉 차니까 열기가 대단했다. 하지만, 홈구장이 2003년에 구덕에서 아시아드로 옮기면서 인기가 떨어졌다. 운동장 시야가 멀어지니까 팬들의 흥미가 없어졌다. 부산에 2년 있었는데 선수 사이에서도 구덕으로 옮기자고 말이 많았다."

(사진 : 여의도고 축구부의 연습 장면. 김중범 코치가 선수들의 슈팅 자세를 지도하고 있다.)

여의도고 축구부를 말하다.

곽경근 감독이 사령탑을 맡고 있는 여의도고 축구부는 2001년 초 차범근 수원 감독이 창단에 힘을 보탠 학교다. 그도 그럴 것이 차범근 축구교실에서 배출된 유망주들은 여의도고서 학업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신입 축구부원들은 전부 차범근 축구교실 소속일까?

"한해 받는 선수는 10명이다. 용강 중학교에서 9명이 들어오면 다른 학교에서 1명을 데려올 수 있다. 대부분은 용강 중학교에서 들어왔다. 사실 용강 중학교에서 잘하는 선수가 몇 명 빠진다. 무엇보다 수업을 받기 싫어하는 경향이 있거나 운동에 전념하려고 그런 경우다. 대표적으로 FC 서울의 김동석이 그런 케이스다."

여의도고 축구부는 선수들도 수업을 받게 하여 공부를 시키지만 합숙이 없는 학교로 잘 알려져 있다. 반면 다른 학교들은 계속 합숙을 하여 공부를 등한시하다시피 하루종일 연습을 하고, 방학 때 전지훈련까지 하면서 혹사 시키는 듯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런 차이점에 대해 여의도고 선수들 경기력에 부정적인 영향이 않을까?

"가장 불리한 건 겨울이다. 4시가 되면 수업을 받았던 선수들이 몸을 풀게 되는데 날씨가 금방 어두워지니까 훈련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라이트를 켜도 안 좋다. 운동을 해야 할 선수들에겐 불편한 점이다. 장점이 있다면 고등학교 때까지 운동을 하더라도 공부를 병행할 수 있으니까 좋다. 다만, 고등학교 때까지 운동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그만두니까 아쉬운 점도 있다.”

제자들을 키우면서 곽 감독은 옛날보다 지금은 너무 축구 하기 좋은 날이며 내심 부러워한 적도 있다고 한다.

"지금은 여건이 매우 좋아졌다. 예전에 인조잔디에서 경기할 때 화상 부담이 있었던 위험한 여건의 효창 운동장에서 경기를 했었다. 지금은 인조잔디에 시설 좋은 곳이 많아졌다. 요즘은 맨땅에서 경기를 잘 안 하는 편이다. 여의도고 같은 경우 연습은 학교 운동장인 맨땅에서 해도, 경기는 반드시 잔디구장에서 한다."

여의도고는 지난해 대통령금배 전국대회 32강에 진출했다. 어쩌면 당시 2년차 감독으로서 전국대회 32강 진출이 기뻤을 법하다. 하지만, 곽경근 감독은 32강이 기쁜 게 아니라고 말한다. "8강에 들어야 기쁘다. 올해는 성적이 좋게 가야 하는데 앞으로 더 좋게 가야 할 것이다. 올해는 4강이 목표였다."

이제 제자를 키워내는 지도자인 만큼 그도 대입 경쟁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 때문에 대학교에서 축구 선수 특기생 입시 자료로 활용하는 '경력실적 증명서'가 부담이 되지 않냐고 물어보자 "경기를 뛴 거니까 상관이 없다. 재작년에 전임 감독님이 8강 진출을 이끌어서 올해까진 부담이 덜하다. 하지만, 그런 게 없어지면 좋을 것 같다."

이쯤 되면 곽 감독의 여의도고 전력이 궁금하기도 하다. 핵심 역할을 맡는 선수가 있다면 누구냐고 묻자  "2학년인 미드필더 주원태, 공격수 이용욱이 여의도고의 주력 선수다. 이지성은 측면 미드필더인데 계속 키울 것이다. 내년부터는 내가 받는 선수들이라 더 좋은 성적을 거둘 것 같다.  선수들이 열심히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 열심히 하고 경쟁해야 하는지 이해하는 편이다."

올해 수원에 입단한 여의도고 출신 최찬양의 여의도고 시절 경기력은 어땠을까? "최찬양이 잘하는 편이다. 스피드가 좋고 돌파력이 좋은 선수지만 몸이 왜소해서 부딪히면 많이 넘어지는 스타일이다. 얼마 전 여의도 고에 왔었는데 몸싸움 약한 게 많이 늘었다고 한다. 차범근 감독님도 잘한다고 한다."



축구는 즐기는 것이다.

"코치를 안 했지만 작년에 감독을 해보면서 하나하나 꼼꼼히 가르치고, 지시하고, 이런 것도 노하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많이 배우고 있는 입장이다. 작년에도 감독을 했었는데 올해 초 졸업한 선수들이 대학교에 가서 잘하고 있다고 연락 오니까 기쁘다. 현재 감독을 맡으면서 가장 보람찼던 일이라 할 수 있다."

고교 선수들을 관리하는 감독 나름의 비법이 있다면 무엇일까? "선수들과 1:1로 면담을 많이 하고 그런다. 수업과 운동을 병행하는 것을 힘들어하는 선수들도 있다. 어떤 선수는 안산에 있는 집에서 6시에 출발하여 등교하고, 수업을 듣고, 연습을 하는데 그것이 반복되니까 힘들어 한다. 지금 선수들 중에서는 부천에 사는 선수가 많다"

고교 주전 선수들을 선발하는 감독 나름의 기준이 있다면 무엇일까? "용강 중학교에서의 라인이 있어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라인업은 고학년 위주로 편성한다. 진학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력이 안 좋으면 저학년 선수를 라인업에 포함 시킨다."

선수 시절에 느꼈던 지도자와 현재 지도자가 되었을 때의 차이점은 어떨까. 곽 감독은 "여의도고 경기를 보면 내가 뛰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 데 가끔 하기도 한다. 처음 가리켰을 때 프로식으로 했었다. 하지만, 고등학교는 그게 아니라 기초적인 면을 다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이어 선배로서 최근 K리그 에서 활약하는 공격수들의 경기력에 대한 따끔한 충고를 했다. "요즘 선수들이 헤딩이 떨어진다. 벌써 만족하는 마음을 가지면 안된다. 항상 높은 사람을 타깃으로 하라고 충고하고 싶다. 남이 한 발 뛰면 자신은 두 발 뛰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어느덧 3시간이 훌쩍 지났다. 이제 곽 감독은 여의도고 시합장에 가봐야 할 시간이다. (이날은 학교 수학여행이 있어서 낮에 훈련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곽경근 감독에게 축구는 무엇인지 물어봤다.

"축구란 즐기는 것이다. 보고, 즐기고, 느끼는 것이다." 현역 시절 부천의 전성기를 빛낸 곽 감독 다운 즐거운 축구 인생관이다. 

마지막 그는 여의도고 감독으로서 앞으로의 포부를 밝혔다.  "주위 사람들이 인정하는 지도자가 되고 싶다. 아직 K리그 진출은 생각 안 해봤다. 시기적으로 이르기 때문이다. 니폼니시 감독님과 조윤환 감독님, 최윤겸 감독님 등에 이르기까지 가르침을 많이 받았다. 그분들에 대해 많이 느끼고 좋아했었다. 부천 시절의 영향이 많이 느껴진다."

자리를 뜨며 돌아가는 길에 잊고 있던 질문이 있었다. 바로 부천 구단을 창단중인 부천 팬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말이다. 곽 감독으로 돌아온 답은 기대 이상이었다.

 "내 고향이자 태어난 곳이 부천이다. 사실 부천이 연고를 이전했을 때 섭섭했다. 그러나 부천시에는 많은 기업이 있어서 도움을 준다면 새로운 부천 팀 창단은 잘 될 것으로 기대한다. 준비 위원회의 선전을 바란다"

그는 웃으며 이런 얘기를 전했다. 

"기회가 된다면, 반드시 부천의 감독을 맡고 싶다." 

앞으로 지도자로서 곽경근 감독이 더욱 기대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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