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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진의 시네리뷰]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성실할수록 이상해지는 기괴함

기사입력 2015.09.12 13:10 / 기사수정 2015.09.12 13:10

이영기 기자


[엑스포츠뉴스=김동진 대중문화평론가]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영리한 제목이다. ‘성실한’이라고 읽으면, 그림자처럼 ‘이상한’이 따라 붙는다. 거의 복화술처럼 ‘성실한’과 ‘이상한’이 동시에 떠오른다. 영화는 이상한 방식으로 ‘성실한’ 나라와, 성실하면 ‘이상해지는’ 나라를 그려낸다.

(※ 아래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들이 밝혀져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집으로 가는 길
수남(이정현)에게는 집이 중요하다. 식물인간이 되어 병원에 누워있는 남편(이해영)의 꿈이 자신의 집을 갖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남편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아이를 위해 집을 갖고 싶었다. 그 아이에게 자신과 같은 삶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이렇듯 남편과 수남은 ‘아직 오지 않은 것(未來)’에 붙들려 있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와 깨어나지 않을 남편을 위해 필요한 집. 집은 그 허황된 가격만큼이나 텅 비어있다. 남편은 병원에, 수남은 고시원에. 삶을 채우기 위해 필요했던 집은, 모래늪처럼 수남의 삶을 점점 집어삼킨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토끼를 쫓아다닌다. 시간에 쫓겨 다급한 토끼는 ‘시간의 전령’이다. ‘이상한 나라’는 풍자적으로 설계된 어른들의 세계고, 토끼는 이곳으로 앨리스를 유인하는 미끼다. 토끼는 매번 앨리스를 앞서 나간다. 집값과 집값을 위한 빚도 매번 수남을 앞서 나간다. 미끼를 물면 낚싯바늘에 주둥이가 꿰이듯이, 집이라는 미끼는 수남의 삶을 꿰뚫는다. 투잡 쓰리잡을 뛰어도 솟아오르는 집값을 따라잡을 수는 없다. 집으로 가는 길은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는다. 다가가면 멀어지는 신기루. 토끼 품의 회중시계가 고장 난 것처럼 집값은 미쳐 날뛴다.




미쳤어
체셔 고양이는 ‘내가 미쳤는지 네가 어떻게 아니?’라는 앨리스의 질문에 ‘넌 확실히 미쳤어. 아니면 여기에 왔을 리가 없어.’라고 답한다. 그러니까 ‘여기’에 오는 순간 미치고 만다. ‘여기’는 성실함이 무릎을 꿇는 세계, 지대상승으로 불로소득이 생기는 뻥튀기의 세계다. 수남은 성실함을 무기로 전투적으로 살아왔지만, 성실하면 ‘이상해지는’ 나라에서 그것은 별무소용이다. 결국 수남에게 탈출구가 되는 것은 재개발밖에 없다. 하지만 재개발이란 집값을 더욱 상승시키고, 더 많은 수남으로 하여금 더 가혹한 내 집 마련 경쟁에 뛰어들게 만들 뿐이다. 곳곳의 수남들, 혹은 거의 수남에 가까워지는 우리 자신.

전직 원사 출신 도철(명계남)과 세탁소 주인 형석(이준혁)도 수남과 비슷한 처지다. 군복을 입고 으스대는 도철도 한 꺼풀 벗기면 박스를 주워 생계를 이어가는 가난한 노인일 뿐이다. 형석 역시 치매에 걸린 노모를 부양해야하는 자영업자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들 역시 ‘여기’로 들어서면, 이상한 방식으로 ‘성실해’진다. 재개발이라는 복마전에 꼬여든 두 소시민은 경쟁자 ‘수남’을 인정사정 볼 것 없이 학대한다.

어떤 면에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어른 세계의 기괴한 게임의 룰에 점점 맞서가는 소녀의 성장기다. 어른의 기괴함에 아이의 기괴함으로 맞선다고 할까. 앨리스의 몸은 뭔가를 먹거나 마시면 크기가 멋대로 변한다. 척도와 기준이 제멋대로인 세계에서 소녀가 습득한 생활의 기술일 수 있다. ‘비슷하지만 다르게’ 수남은 모든 것이 물구나무 선 ‘여기’에서 결국 연쇄살인마가 된다. 처음에 정당방위로 시작됐던 살인은 최종적으로는 일종의 판결처럼 행해진다. 그리고 그 방법들은 명함 꽂기나 신문 배달, 횟감 손질처럼 생계를 지탱해주던 기술들이다. ‘여기’에서는 생활의 기술이 살인의 기술이 된다. 세탁소 주인 형석이 다리미와 세탁기를 이용해 수남을 고문하는 것도 다를 게 없다.




그 놈의 목을 쳐라
경숙(서영화)은 심리치료사이자 통장으로 재개발을 둘러싸고 수남과 대립한다. 경숙은 분노조절장애인 세탁소 주인에게 약의 투여량을 줄여 그를 조종한다. 수남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도철과 형석은 사실 경숙의 수족일 뿐이다. 동네주민들 역시 종교지도자라도 우러르는 것처럼 경숙을 맹신한다. 이유는 단 하나, 재개발이 되어 집값이 오를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모든 길은 여왕의 것이다. 여왕은 변덕과 잔인함의 화신으로, ‘그 놈의 목을 쳐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앨리스가 여왕과 벌이는 크로켓 게임에서도 게임의 룰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고, 여기저기서 카드병사들만이 끌려 나간다. 경숙은 앨리스 속 여왕을 경유하여 지금 ‘여기’에 도달하는 비유가 된다. 오른손엔 가스통 할배, 왼손에 일베. 가계부채가 위험신호를 보내는데도 대출을 받아서 집을 사라는 정부와 언론. 사고가 나면 관계기관이 해체된다. ‘그 놈의 목을 쳐라’는 현실 속에서 끝없이 울려 퍼진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마지막. 법정에서 ‘저년의 목을 쳐라!’하는 여왕의 명령에 앨리스가 돌려준 대답은 ‘누가 네 말을 듣는대!’였다. 수남은 이 반격의 자세를 물려받는다. 돌이켜보면 영화 전체는 수남이 경숙을 의자에 묶어놓고, 선고를 내리기 전의 최후변론의 형식을 띈다. 수남은 게임의 룰과 입장을 바꿔놓는다. 한편으로 ‘목을 쳐라’라는 여왕의 말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형사들의 목을 긋는 수남. 수남은 남편의 존엄사를 거부하고 오토바이를 탄 채 길을 떠난다. 깨어날 가망성이 없는 남편과 동행하는 이유는 뭘까? 앨리스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이상한 나라를 벗어난 것처럼, 수남의 불행은 잠자는 남편의 악몽일지도 모른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기괴한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다양한 방법으로 참조하면서, 비정상화의 정상화가 이루어진 ‘여기’의 비참한 현실을 새삼 깨닫게 만든다. 체셔는 ‘이제부터 어느 길로 가야하는지’ 묻는 앨리스에게 이렇게 답한다.
“그건 전적으로 네가 어디로 가고 싶은가에 달렸지.”

nivriti@naver.com /사진=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이영기 기자 leyoki@xport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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