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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진의 '시네리뷰'] '암살', '여명의 눈동자' 그리고 미완의 '살부(殺父)'

기사입력 2015.08.11 07:12 / 기사수정 2015.08.20 04:25

이영기 기자
[엑스포츠뉴스=김동진 대중문화평론가]  '암살(2015)’은 희소가치가 있는 영화다. 항일투쟁과 친일파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독립군이나 항일투쟁을 소재나 배경으로 한 영화는 꾸준히 등장했었다. 하지만 60~70년대에 숱하게 만들어진 만주를 무대로 한 항일활극의 경우처럼, 대부분의 영화들은 ‘친일파 문제’를 건드리지 못했다. 주로 군자금을 둘러싸고 벌어진 이 액션 활극들에서 ‘일본군’은 서부극의 악역 정도로 활용됐을 뿐이다.



여명의 눈동자
‘친일파 문제’란 45년 이후의 대한민국에서 ‘친일세력’이 정치‧경제의 권력을 여전히 움켜쥐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내가 이 사실에 눈을 뜬 것은 중학교 시절에 본 ‘여명의 눈동자’ 덕분이었다. 독립군을 잡던 고등계 형사 스즈키(박근형)가 경찰서장으로 변신해 등장했던 그 장면. 마치 아버지가 바람피웠다는 얘기라도 들은 것처럼 충격적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세계의 밑바탕에 ‘거대한 부정의’가 깔려있을지 모른다는 우울한 각성의 순간. 그 후에 알게 된 근현대사에 대한 지식은 ‘여명의 눈동자’ 위에 차곡차곡 쌓아 올려 진 것과 다름없다.

며칠 전 우연히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라는 수요집회(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일본대사관 앞 정기집회)에 참여하게 된 고등학생의 다큐를 보게 됐다. 도입부에서 감독은 또래 학생들에게 ‘광복절’이나 ‘현충일’ 등 근현대사와 관련된 국경일의 날짜를 물어보는데, 놀랍게도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 공식 휴무일을 거의 맞추지 못한다. 학생들은 그 이유로 ‘한국사’가 수능에서 필수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답을 하는데, 뒤이어 ‘2017년부터 수능 필수가 되는 한국사에서 근현대사 부분은 축소’된다는 자막이 흐른다.

암흑과 같은 한국의 근현대사. 수많은 염석진(이정재)과 강인국(이경영)이 그리고 그들의 후손들이 이런 암흑의 상태를 원한다. ‘암살’은 이 암흑의 기원사를 밝힌다. 영화가 두 개의 시대(1933년, 1949년)를 택하는 건 그래서 적절하다. 만일 1933년만을 다루게 되면, 암살은 수많은 일제시대 배경의 액션활극에서 멈추게 된다. 하지만 암살은 1949년의 반민특위를 끌어옴으로써 ‘친일파 문제’의 핵심이 ‘단죄의 실패’라는 사실을 명확히 한다. 1945년(광복)을 가운데 두고 앞뒤로 ‘친일파의 득세’와 ‘단죄의 실패’를 동시에 보여주는 것. 친일파와 건국세력의 ‘연결고리’를 보여주는 것은 여전히 한국영화의 무의식적 금기를 뚫고 들어가는 행위다.

'암살'은 1991년에 ‘여명의 눈동자’가 했던 역할을 2015년에 반복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25년 동안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수많은 TV 드라마와 영화가 존재했지만, 기이하게도 ‘항일투쟁’은 마지못한 의무감의 수준에서 상투적으로 다뤄졌다. 뻔한 상태로 박제시키는 것. 지난 70년간 독립군이나 항일투쟁은 박물관에서 박제화되거나 고리타분한 학술적 영역에만 갇혀있었다. 일제시대의 사건과 인물들에 ‘생기를 불어넣지’ 못하는 상상력의 차단은, 현실의 권력이 그곳에 이르는 길을 차단했던 역사와 호응한다.


더구나 이삼십대의 영화인들과 대화를 해보면, 일제시대나 통일문제와 관련된 소재 자체를 고리타분하고 식상하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것은 그동안 만들어진 영화들의 실패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어떤 접점의 상실, 일제시대와 지금을 연결하는 ‘상상력의 길’이 더욱 희미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상상력도 어떤 출발선을 필요로 한다. 한 세대를 구성하는 문화적 요소들은 다음 세대로 자동적으로 전승되지 않는다. 암살은 ‘여명의 눈동자’ 이후에 빗금 그어졌던 항일 투쟁서사의 몇 가지 맥락들을 ‘대중적인 차원에서’ 다시 연결한다. 암살은 지금의 청소년들이 일제시대와 연관된 상상의 지평을 열어갈 때, 하나의 근거가 되어줄만한 영화다.



나의 20세기
암살의 주요 인물들은 거의 짝패처럼 설계되어 있다. 하와이 피스톨(하정우)과 염석진(이정재)은 독립운동에 대한 ‘냉소주의’와 ‘실패한 암살자’라는 점에서 쌍둥이에 가깝다. 밀정과 청부살인자라는 직업도 오십보백보다. 거의 동일한 인물들이 조금씩 다른 궤적을 그려나가다가 마지막에 서로의 반대편에 선다.

친일파 재벌 강인국(이경영)의 짝패는 아네모네 마담(김해숙)이다. 재력가인 두 사람은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한다. 강인국이 항상 누군가를 죽이는 쪽에 건다면, 마담은 누군가를 살리는 쪽에 건다. 이 둘의 수족으로 등장하는 인물들도 ‘친일파 조선인’과 ‘친한파 일본인’으로 명확한 대립쌍을 구현한다.


전지현의 1인 2역, 안옥윤과 미츠코는 이 대립구도를 한 단계 더 밀어붙인다. 생물학적으로 동일한 두 인물이 전혀 다른 가치관으로 ‘일제시대’를 통과한다는 것. 이것은 ‘친일의 삶’과 ‘항일의 삶’이 우리의 내면에서 거의 분열적인 모습으로 병존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1989년 헝가리에서 만들어진 ‘나의 20세기’는 쌍둥이 소녀 도라와 릴리를 보여준다. 어린 시절에 헤어졌다가 1900년 20살이 되는 ‘20세기’의 첫 해에 ‘오리엔트 특급열차’에서 만나는 쌍둥이. 사치스러운 부르주아 창부가 된 도라와 무정부주의 운동가가 된 릴리. 베르톨루치의 영화 ‘1900년’에서는 한 마을에서 같은 날 태어난 ‘지주의 아들’과 ‘소작농의 아들’이 친구가 되어 자라난다. 둘은 전쟁과 파시즘을 겪으면서 갈등과 화해를 거듭한다.

수많은 작가와 감독이 20세기를 성찰적으로 되돌아보기 위해 쌍둥이(혹은 짝패) 설정을 사용해왔다. 이들 영화에서 대립되는 두 세력을 비유하는 인물들은, 과연 그들이 어떤 계기로부터 맞서게 되고 갈등의 폭발에 이르게 된 것인지를 되짚어 보여준다. 때로 역사가 개인의 선택을 압도하고, 사소한 욕망이 거대한 파국을 불러온다.

암살은 작위적 설정을 무릅쓰고 ‘짝패들의 서로 다른 선택’위에서 일제시대를 재구성한다. 염석진과 하와이피스톨의 삶은 ‘역사의 압력’과 ‘개인의 욕망’이라는 서로 다른 방향의 망치로 힘껏 두들겨진다. 둘 중에서 무엇이 이들의 삶을 뒤틀리게 했는지 단정할 수 없다.

관객은 다양한 인물들(안옥윤, 하와이피스톨, 연석진, 강인국, 아네모네 마담 등)을 통해 좀 더 넓은 선택지를 부여받는다. ‘내가 일제시대에 살았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 것인가?’에 대한 시뮬레이션. 돈을 밝히는 속사포(조진웅)처럼 ‘암살’ 속의 독립군들은 무결점의 영웅이 아니다. 최동훈은 영웅이라는 산꼭대기로 인물들을 올려 보내지 않고, 세속적인 번잡함으로 그들을 내려앉힌다. 그래서 우리의 가상적 선택이 가능해지도록 ‘그들에게 가는 길’을 열어놓는다. 사기꾼이나 도둑들의 세계를 다뤄왔던 감독이기에 가능한 ‘현실성’이다.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제 글은...오랫동안에 걸쳐 의도적으로 진행된 아버지와의 결별 과정이었습니다." 이것은 카프카가 그의 아버지를 상대로 쓴, 결코 보낸 적 없는 긴 편지의 한 구절이다. 카프카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모든 사물의 척도였으며 가부장적 세계 질서의 대변자’였다.

최동훈의 인물들은 대체로 직업적인 범죄자들이었다. 악의 함량이 높은 인물들. 법의 경계를 아무렇지 않게 넘나드는 이 악당들은, 최후의 순간에 이 사기극이 ‘아버지(혹은 스승)’의 죽음에 대한 복수극이었음을 밝힌다. 이것들은 그저 관객과의 게임이거나, 범죄행위에 대한 윤리적 보완물로 존재했을 수도 있다. 최동훈의 세계에서 ‘아버지의 복수’가 주제적인 패턴인지 상업적인 공식인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다만 질서(아버지라는 법)를 위반하는 범죄자가 그 범죄의 당위성을 다시 ‘죽은’ 아버지로부터 빌려오는 이상한 순환 고리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암살'은 간략히 정리하면 ‘친일파 아버지’를 죽이려는 딸의 이야기다. 왜 감독은 굳이 ‘친일청산’의 맥락을 부녀관계 안에서의 살부의식으로 압축시킨 것일까? 어쩌면 친일청산이 가족극의 형태로 수렴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 그러니까 친일파란 반쯤은 우리의 아버지인 것이고, 친일청산이란 결국 아버지를 죽이는 행위에 가 닿는 것이라고 말이다. 하와이피스톨의 살부계도 이런 측면을 확인시켜준다.

한편으로 강인국이 딸의 결혼식 날에 죽는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자신의 딸을 사업적 이익을 위해 정략적으로 이용하지만, 바로 그 날, 내선일체(內鮮一體)라고 불러야 할 ‘결혼식’이 아수라장이 된다. 웨딩드레스를 입고 총을 든 딸, 친정아버지가 유일하게 위엄을 부여받는 ‘딸의 인수인계’의 순간을 과감하게 작살낸다. 아버지에 대한 거절에서 제국주의에 대한 거절까지, 안옥윤의 탄환은 이 둘을 동시에 꿰뚫는다.

‘암살’은 보낸 적 없는 하나의 긴 편지다. 역사의 법정에 세우지 못한 ‘친일파 아버지’들을 향한 편지. 의도적으로 ‘친일파 아버지’를 제거하는 결별의 과정을 밟아간다. 새로운 출발점. 임상수가 ‘그때 그 사람들’에서 겨우 보여줬던 궁정동의 그 밤처럼. ‘암살’은 이후에 등장할 더 격렬한 편지의 밑그림이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암살’이 필요하다.
nivriti@naver.com

이영기 기자 leyoki@xport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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