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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섭 "1000경기만 보고 달려 왔다" [심층 인터뷰 ①]

기사입력 2015.07.24 08:50 / 기사수정 2015.07.24 01:32

나유리 기자


[엑스포츠뉴스=나유리 기자]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이 주인공일 순 없다. 누군가는 옆에 혹은 뒤에 서있어야 가운데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연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조연이 없으면 주연도 없다. 김원섭(37,KIA)은 꾸준히 그리고 오랫동안 '빛나는 조연'이었다.

이제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김원섭이 그토록 손 꼽아 기다려왔던 날이다. 더이상 개인 성적 욕심이 없는 김원섭이지만 딱 한가지는 욕심을 부려왔다. 바로 프로 통산 1000경기 출장이다. 

남다른 의미가 있는 숫자다. 그는 프로에 입단해 5년 가까이 '2군 선수'였다. 빛을 좀 보는듯 싶더니 건강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수 많은 언덕을 넘어 켜켜이 쌓은 1000경기이기에 감회가 클 수 밖에 없다. 23일 삼성전까지 포함해 통산 996경기. 단 4경기만 남았다. 


-프로 15년차. 베테랑 중의 베테랑 선수가 됐다. 10년이 훨씬 넘는 세월을 프로에서 보냈고, 드디어 1000경기를 눈 앞에 뒀다.

"돌아보면 아쉽기도 하고, 잘했다는 생각도 들고, 그래도 이정도면 성공했다 싶기도 하다. 조금 더 일찍 주전으로 자리를 잡았다면 좋았을텐데. 2군에서 5년 정도 보냈던 시간이 아깝지만, 좋은 경험을 했던 것 같다. 총평은 '아쉬움' 반 그리고 '잘했다' 반."


-어릴때 꿈꾸던 '야구선수 김원섭'의 모습은?

"고등학교(배명고)에 다닐때 나는 유격수였다. 그때 우리 학교로 프로팀들이 특타를 많이 하러 왔다. 해태가 그중 가장 많이 왔다. 이종범 선배님이 연습하는 모습을 숙소 철창에 매달려서 구경했다. 이종범 선배는 이미 슈퍼스타였는데 수비 훈련 하나를 할 때도 전력을 다해 하는 모습을 보고 감명 받았다. 프로 선수는 절대 헐렁하지 않구나, 정말 열심히 하는구나 싶었다. 고등학교, 대학교에 다닐때 짬이 나면 잠실 구장에 야구를 보러 갔다. 외야에 앉아 김밥을 까먹으면서 '저런 잔디를 한번만 밟아보고 싶다'는 꿈을 꿨다. 사실 난 LG팬이었는데(웃음) 해태랑 LG가 잠실에서 경기를 하면 표를 구할 수가 없었던 기억이 난다. 그냥 야구가 너무 좋았다."

-그러고보면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2군에서 오래 있을 때는 FA 같은건 생각도 못했고, 1000경기는 더더욱 생각지 못했다. 2군 생활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1군에서 편하게 야구하고 싶다는게 유일한 소원이었다. 어차피 나는 주전이 아니었다. 종종 1군에 올라오게 되면 오히려 체력을 아낄 수 있었다. 경기 후반에만 대수비, 대주자로 투입되고 숙소에 들어와서 개인 운동을 하면 잠잘 수 있는 시간이 길다. 2군은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는 반면에. 그래서 '나는 어차피 1군 주전 선수가 아니니까 여기서 쉬고, 체력을 보충하고 다시 2군 가서 열심히 하자'는 생각을 했다. 잘해야겠다는 개념이 없었다."

-그럼 언제부터 개인적인 목표와 욕심이 생겼나.

"그렇게 지내다보니 1군에서 백업 선수라도 하고 싶어졌다. 백업이 됐을 때는 나도 9명 중 한명이 되고 싶었다. 그 후로는 3할 타자가 되고 싶었다. 3할을 해보고 나니 우승을 한번 해보고 싶었다. 더 놀라운건 그러다보니 어영부영 FA가 1년 남은 거다(웃음). FA도 한번 해보자! 하고 나니까 1000경기만 남았다. 이제는 없다. 1000경기만 하면 더이상 욕심이 없을 것 같다. 지금도 개인 성적은 욕심이 없다. 다만 너무 못하면 1군에 있기 미안하기 때문에 2할7푼~8푼 정도만 유지하고 싶다. 어린 선수들이 힘들어할 때 들어가서 자리를 메꿔주고, 뒤에서 서포트를 잘하고 싶다."

-신인 시절(두산)을 되돌아보면 어떤 아쉬움이 가장 큰가.

"신인때 시범 경기때까지 잘했다. 지금 우리 수비 코치님인 김민호 코치님이 그때 두산의 최고참이었는데, 마지막 시범 경기를 앞두고 '너 개막전 엔트리에 든 것 같더라'고 말씀 하시더라. 차라리 그때 '내가 오늘 나가서 뭔가 보여줘야지' 했으면 잘됐을 수도 있다. 그런데 난 '오늘만 버티면 되는구나'라는 약한 생각을 했다. 그러다보니 수비에서 만세를 부르고 난리가 났다. 결국 개막 엔트리에 내 이름이 없더라. 경기가 끝나고 차 안에서 펑펑 울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차 창문을 두드리더라. 김경문 당시 배터리 코치님이셨다. 코치님이 내게 '너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괜찮은 선수니까 2군에서 열심히 하고 있으면 기회가 올거다'고 말해주셨다."



-그런데 생각보다 기회가 빨리 찾아오지 않았다.

"당시 2군에서도 여러가지 우여곡절이 있었다. 타격폼을 바꾸는 과정에서도 문제가 있었고, 당시 2군 코칭스태프 사이의 트러블이 내게도 영향을 미쳤다.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다. 그런데 어느날 경기 도중 갑자기 내가 대주자로 교체됐다. 그리고 트레이드 통보를 받았다."

-KIA로의 트레이드가 야구 인생의 전환점이 된 셈인가.

"당시에 KIA의 규율이 워낙 엄격하다고 들어서 한편으론 무서웠지만(웃음), 새로운 기회가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부모님이 '그냥 야구를 그만 두라'고 하시더라. 내가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리곤 KIA의 군기를 고려해(웃음) 머리를 삭발하고 혼자 운전해 광주로 내려갔다. 비가 정말 많이 오는 날이었다. 새로운 마음으로 1년, 1년 열심히 야구를 하다보니까 내가 1군 선수가 돼있었다. 열심히 준비를 하니까 기회가 오더라. 물론 운도 따랐다. 2군에서 5년씩이나 있었는데 1000경기를 뛰게 될 줄 누가 알았겠나."

-자기 관리의 대명사로 불린다. 건강 관리 뿐만 아니라 성실한 훈련 태도, 야구장 외적인 부분까지 모범이 되는 선수로 꼽히는데. 후배들에게 조언을 따로 해주는 편인가.

"내가 행동하는 것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내가 열심히 하고, 남보다 일찍 와서 준비를 하면 후배들도 느끼는게 있으리라 믿는다. 다들 성인이고 머리가 컸는데 일일이 간섭할 필요는 없다. 다만 하나 아쉬운게 있다."

-어떤 부분이.

"요즘은 2군 경기에도 팬들이 많이 찾아 주신다. 그러니까 일부 선수들이 자만심에 빠지기 쉽다. 예전에는 정말 2군에서는 눈물 젖은 빵을 먹었다. 내가 2군에 있을 때는 한여름 숨막히는 더위에 대학팀과 연습 경기를 하곤 했다. 땡볕에서 그늘도 없이 햄버거에 우유를 쪼그려 앉아서 먹다 보면 눈물이 났다. 야구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다른데 가서 돈을 벌어도 이만큼은 벌겠다는 생각도 들고, 내 스스로가 너무나 한심했다. 정말 야구를 그만두고 싶었던 적이 수만번은 된다. 그런데 요즘 2군 선수들은 그때에 비해 조건이 좋다. 그래서 간절함이 사라진 선수들도 보인다. 그 부분은 아쉽다."

-야구를 40살까지 하는게 목표라고 알고 있다.

"마흔살이 되는 그 해에 '그만 두겠다'고 공언을 할 예정이다(웃음). 지금은 경기에 출전하는 것만으로도 대만족이다. 사실은 전 경기 출장을 한번쯤 해보고 싶었지만,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다. 몸이 유연한 스타일이 아닌데다 잔부상도 있고, 무릎이나 야구를 오래하면서 얻은 직업병들이 많다. 이렇게만이라도 기회를 주셔서 참 고맙다."

※25일 '심층 인터뷰 ②편'으로 이어집니다.

NYR@xportsnews.com / 사진 ⓒ KIA 타이거즈, 엑스포츠뉴스DB

나유리 기자 NYR@xport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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